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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스탈린이 88여단의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 것은 1945년 9월초이다. 그러나 사실상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탈린이 88여단의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 것은 1945년 9월초이다.<ref name="koval"/><ref name="vasil"/> 그러나 사실상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평양의 소련군정은 당시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무명의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https://ko.wikipedia.org/wiki/스티코프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ref name="park">김일성 외교비사 ([[박길용]],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용|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ref><ref>≪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 84~90.</ref> 해방 후 김일성이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를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진두지휘한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은 아래와 같다.<ref name="park"/>
평양의 소련군정은 당시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무명의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https://ko.wikipedia.org/wiki/스티코프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ref name="park">김일성 외교비사 ([[박길용]],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용|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ref><ref>≪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 84~90.</ref> 해방 후 김일성이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를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진두지휘한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은 아래와 같다.<ref name="park"/>

2020년 12월 13일 (일) 10:43 판

개요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38도선 이북의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련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군 점령 후 수개월이 지나서부터는 조선인들의 인민위원회에 행정을 이양하고 소련군은 이를 감독하는 간접적인 형태를 취하였으나 이를 소련이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직접 통치를 한 미군정에 비해 소련 군정은 그 형태가 간접적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미군정에 비해 훨씬 더 내정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지령문에 나온대로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 단독의 공산국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9월초에 스탈린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에의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5년간 자신들이 교육과 훈련을 시킨 진지첸 (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하였다.[1][2] 북한의 소련군정은 북한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던 김일성을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무수한 정치공작을 통해 지도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이를 위해 조만식, 현준혁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우파나 기독교 세력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여러 정치 조직들을 만들어서 김일성을 책임자로 앉혔다. 소련군정 시기는 토지개혁 등 북한 지역의 공산화와 소련의 대리인 김일성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주는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체제 선택권도, 지도자 선택권도 가질 수 없었고, 소련이 강제로 만들어준 공산체제와 김일성 지도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의 일방적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다.

소련군정 기간에 시행된 북한의 주요 정책이나 법안들은 모두 소련이 결정했고, 표면적으로는 김일성이 위원장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정해서 시행하는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북한 정권 공식 출범 당시에도 헌법 제정은 물론 초대내각의 인선까지 소련이 주도권을 행사했고, 그후로도 평양의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았으며, 특경부를 설치하여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을 감시했다.

반면에 미군정은 소련과 달리 자신들이 조선인 지도자를 임의로 선정하여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새로 출범하는 국가의 체제나 헌법, 지도자 등은 모두 한국인들이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했다.

해방 후 북한의 주권은 "일본천황 -> 소련군정 -> 김일성 -> 김일성 일족"으로 이전되어 왔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북한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압제자가 바뀌어 왔을 뿐이다. 오늘날 김일성 일족의 세습전제왕조 체제는 일제보다 훨씬더 폭압적이며, 전인민이 오직 수령 한 사람만을 위해 노예처럼 살도록 강요 당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비참한 현실은 주민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체제와 지도자 김일성을 받아들이도록 강압한 소련 군정에 기인한다.

반면에 한국의 주권은 "일본천황 -> 미군정 -> 한국 국민"으로 이전되어,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국민 주권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개

소련군이 되찾아주었다는 태극기는 어디로 갔는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은 1945년 8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점령을 완료한다. 25군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었으나, 그는 야전 군인으로 정치문제에는 그다지 간여하지 않았다. 북한의 소련군정은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우수리스크에 사령부가 있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가 총괄하게 되며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된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과 민정청 사령관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등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북한 정권 출범 후 스티코프는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여전히 북한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방직전

해방직후

소련군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를 열어 국내 사람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소련군 88여단진지첸 대위를 전설적 항일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내세운다. 소련군 문서에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는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3]
김일성은 자력으로는 국내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능력도 전혀 안 되고,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사람이지만[4][5][6] 소련 군정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북한 정권의 수상직까지 차지한다.
북한 지역 공산화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갖춘 소련의 고려인들을 대거 북한으로 데려와 주요 역할을 맡김.
김일성 등 소련군 88여단에서 5년간 훈련시킨 조선인 50여명을 데려와 북한의 핵심 권력을 쥐어주고, 공산주의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소련의 고려인들을 대거 데려온 것은 소련이 처음부터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소련은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4개국 신탁통치안에 뜻이 없으면서도 북한 지역에서의 반탁운동은 일체 금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구실로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처음에는 반탁 대열에 동참했던 남한 좌익들에게도 찬탁을 지시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도 반탁을 고집하는 남한 우파의 참여를 반대한다.

소련군의 만행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 시행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시작

소련군정기에 이미 김일성 우상화 공작이 시작되었다. 북한 전지역에 스탈린김일성의 사진을 내걸도록 했고, 공개된 6.25 당시 미군 노획문서에 보면 해방 직후의 북한 문헌에도 김일성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 글이 넘쳐난다. 이때 벌써 김일성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다.


북조선 『자유황해』라는 신문을 보면 김일성 장군을 례찬하는 노래가 있다. △이건 농군 박서방이 부르는 노래란다. △그 한 구절을 보면 △김일성 장군 빛나는 그 이름 받들어 한민족의 태양이라 찬양함은 장군이 오시므로 장군이 게시므로 봄빛처럼 다사로운 행복이 내 향토와 내 살림에 갈피갈피 깃드러 빙산같이 풀일 길 없던 온갓 고통이 영원히 영원히 사라진 까닭이라.
△이 노래를 드르면 북조선은 극락이오 천당이라. △그러나 하로에 몇천명씩 아버지 할아버지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쪼껴서 온갓 모욕을 당하며 남으로 남으로 밀려오는 동포는 김일성 장군과 같은 피가 흐르느 동포가 아니던가 △이북 천지가 어두어 촉누락시에 민누락(燭淚落時 民淚落)인데 Δ홀로 빛나신 분은 김일성 장군만이시런가

혼란 조성을 위한 대남공작

소련군정은 남한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남한 좌익들을 지원하여 폭동, 파업등을 일으키게 하고, 5.10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여러가지 공작을 펼쳤다.

  • 화폐개혁
해방 직후 남북한은 한동안 구일본 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했는데, 소련은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북한 지역에서 못쓰게 된 구일본 화폐를 남한 공산세력에게 내려보내 막대한 양을 유통시켜 혼란을 조성했다.

북한 정권 출범 전후

1948년 2월 8일에 북한 인민군이 공식 창건되고, 기만적인 남북협상이 진행되던 기간인 4월 29일에는 북한 헌법이 채택되어 남한의 5.10 총선 이전에 북한은 이미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헌법 제정에는 소련이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12일자 문건. "김일성 동무에게 보내는 충고"
1948년 4월 24일자 문건. "조선의 헌법문제에 대하여"
인공국(人共國)의 헌법(憲法) 1948.05.03 조선일보 1면


1948년 9월 북한 정권의 공식 출범 당시 레베데프가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한 북한내각의 각료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정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요직의 인사 문제에 소련이 깊숙하게 간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정권 출범후 소련 군정은 표면적으로는 종식되고, 소련군도 1948년말까지 철수한다. 하지만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가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은 또 비밀 경찰조직 특경부(特警部, Special Police Section)를 운영하며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스탈린이 88여단의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 것은 1945년 9월초이다.[1][2] 그러나 사실상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평양의 소련군정은 당시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무명의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7][8] 해방 후 김일성이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를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진두지휘한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은 아래와 같다.[7]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와 김용범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평가

북한 소련군정의 목표는 스탈린 지령문에 나온대로 북한 지역에 공산 국가를 건립하고, 소련이 5년간 88여단에서 훈련시켜 데려온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는 진지첸 (김일성) 대위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역할을 할 지도자로 내세워 그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다져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지역의 민족 세력이나 기독교 세력의 정치 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이들 중 상당수가 월남하게 된다. 이후 북한 주민들은 소련이 만들어놓은 지도자 김일성을 바꾸기는 불가능했다.

소련군정이 만들어 놓은 김일성 체제는 스탈린 사후 중소이념분쟁을 이용해 소련의 절대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김일성 유일체제로 되고, 종국에는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유례가 없는 김일성 일족 세습전제왕조로 퇴보한다.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일족 수령 한 사람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노예로 전락한 것도 소련군정이 북한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만들어 놓은 체제와 지도자의 후유증이다.

참고 자료

  • 소련 군정 핵심 인물인 스티코프의 일기와 레베데프의 비망록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의 제주 4.3 자료집 - 비망록 번역문 전문을 볼 수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pdf
쉬띄꼬프 일기.pdf
쉬띄꼬프일기 해외사료총서 10권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48년 남북정치협상은 소(蘇)각본 - 소(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국토통일원, 1983 (복간본) -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판형을 바꿈.
  • Pauley 보고서 : 1946년 6월 -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점령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허락을 얻어 1946년 5월 29일 ~ 6월 4일 기간 북한 지역을 돌아보고 미국 대통령에 올린 보고서
Edwin Wendell Pauley, Report on Japanese Assets in Soviet-occupied Korea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s States June, 1946.
Edwin Wendell Pauley, Report on Japanese Assets in Manchuria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s States July, 1946.
Press Conferences, May 1946 -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 : Pauley 방한 당시 서울에서의 기자회견, 신문기사 등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이반 코발렌코의 증언
  2. 2.0 2.1 2.2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3.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4.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5.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6.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7. 7.0 7.1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용,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8.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 8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