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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산
孫中山
약력
직책 흥중회 제2대 회장
(1900년 1월 24일 ~ 1905년 8월 20일)
←전임

흥중회 제2대 회장
(1900년 1월 24일 ~ 1905년 8월 20일)
←전임


국민당 이사장
(1912년 8월 25일 ~ 1914년 7월 8일)
후임→


중화민국 제1대 임시대통령
(1912년 1월 1일 ~ 1912년 4월 1일)
후임→


중화혁명당 총리
(1914년 7월 8일 ~ 1919년 10월 10일)


중화민국 군정부 육해군대원수
(1917년 9월 10일 ~ 1918년 5월 20일)


중국국민당 총리
(1919년 10월 10일 ~ 1925년 3월 12일)


중화민국 군정부 육해군대원수
(1920년 11월 28일 ~ 1921년 5월 5일)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대본영 육해군대원수
(1923년 2월 21일 ~ 1925년 3월 12일)
후임→

생몰기간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향년 58세)
출생지 대청 광동성 광주부 향산현 남랑진 추형촌
사망지 중화민국 경조지방 협화의원
학력 향항화인서의서원
정당 중국국민당
가족 손달성(아버지)
양태군(어머니)
노모정(배우자)
오쓰키 가오루(배우자)
송경령(배우자)
진수분(배우자)
아사다 하루(배우자)
손과(장남)
손연(장녀)
손완(차녀)
미야가와 후미코(3녀)
종교 개신교

개요

손중산(孫中山, 1866~1925)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창립자이다. 대한민국으로치자면 중화민국의 이승만 대통령 정도로 보면 될듯. 둘다 자신의 조국에 자유주의 정부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그 과정에 일생을 바친점이 비슷하다. 중국은 손중산을 기점으로 전제군주제가 폐지되었으며 한국도 이승만김구 등 우익들을 기점으로 자유주의 국가의 막을 열었다. 다른점이라면 손중산과 장개석 등 중국 우익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1949년을 기점으로 공산화된다.

손중산의 부인 송경령(宋慶齡, 1893~1981)[1]은 본토에 남아 중국 공산당 정부의 요직에 올랐고, 장개석의 부인이었던 동생 송미령(宋美齡, 1897 ~ 2003)[2]은 대만으로 갔다.

생애

광동성 출신으로 향항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주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손중산은 남경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통령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원세개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주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북경에서 병사했다. 손중산의 묘는 난징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모택동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손중산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