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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해를 위해 참고해 볼 만한 표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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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3일 (토) 22:02 판

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 TV, “쇠말뚝 소동”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김용삼, “쇠말뚝 신화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75~183쪽을 기반으로 작성으로 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3) 쇠말뚝 발견과 제거의 거짓을 알린 최초의 기사인, 김용삼의 다음 글을 참고하기를 강하게 권한다. “대한민국의 국교는 풍수도참인가?”《월간조선》1995년 10월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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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해를 위해 참고해 볼 만한 표제어 [묏비나리]

쇠말뚝 소동의 전모(全貌)

쇠말뚝의 진실을 철저한 현지 조사를 통해 최초로 밝힌, 김용삼 기자의 <월간조선>1995년10월호 기사.


1984년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나선 한 민간단체가 산 정상에서 쇠말뚝을 발견하였는데, 등산객들로부터 “일본인들이 서울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은 기둥”이라는 말을 들은 뒤 제거 운동에 나서면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쇠말뚝은 한때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관에 전시되어 우리 사회에 ‘쇠말뚝 신드롬’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도 쇠말뚝 제거 사업은 민간단체의 주도로 간간이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정도였다.

특히 1995년 2월, 당시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 기념 역점 추진사업’으로 쇠말뚝 제거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 사태가 커졌다. 쇠말뚝 제거 민간단체인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구윤서)이나 서경대 경제학과 서길수 교수, 그 외 몇 명의 풍수가 들이 추진해 왔던 사업에 국가의 정책적 지원과 홍보가 더해졌다.

정부가 나서기 전까지 민간 차원에서 쇠말뚝을 제거한 실적은, 북한산 17개, 속리산 문장대 8개, 마산 무학산 학봉 1개 정도였다.

1995년 2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6개월간 전국에서 쇠말뚝이 접수된 주민신고는 모두 439건, 이 가운에 일제가 박았다고 확실시되어 제거된 것이 18개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실제로 일제가 박았다고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어느 누구도 북한산 백운대 주변에 박혀 있던 쇠말뚝이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나 혈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입증할 만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역술인과 지관이 ‘쇠말뚝 전문가’로 모셔지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본격적으로 쇠말뚝 제거 사업에 뛰어들면서,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내무부가 전국의 각 시군읍면에 공문을 보내어 사업이 시작되었다. 지방 행정관청은 해당 마을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진짜로 일제가 소위 ‘풍수침략’을 위해 박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결국 지방 행정기관들에서 동원한 전문가들은 동네에서 풍수 좀 본다고 하던 지관(地官)들이나 역술인, 무속인 등이었다.

쇠말뚝이 실제로 제거된 18곳의 현장을 모두 일일이 답사, 조사하면서 이 사건의 황당무계함을 최초로 알린 김용삼 전 《월간조선》편집장은, 《월간조선》1995년 10월호에 쇠말뚝 소동을 일으킨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하면서 그 신화를 벗겨낸 바 있다.


<중앙일보> 1991년 12월 7일자에 소개된,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과 쇠말뚝 발견 및 제거 활동. 당시만 해도 이 활동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나마 이 단체의 회장인 구윤서 회장 등도 쇠말뚝이 일제가 박았다는 증거가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소위 ‘쇠말뚝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쇠말뚝 제거 전문가로 알려진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운서 회장, 서길수 교수도 전국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일제가 풍수침략을 위해 박았다는 증거가 없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김용삼 기자(현재 ‘펜앤드마이크대기자’이자 ‘이승만학당’ 교사)가 소개한 사례들을 직접 살펴보도록 한다.

금오산 쇠말뚝: 부처님 이마에 박혔으니 일제 소행

대구의 역술인 민승만은, 쇠말뚝이 금오산에서도 풍수적으로 명당인 곳에 박혀 있었다고 했다. 용이 하늘로 용솟음치는 곳에 누워 있는 부처님의 이마 부분이 바로 그곳이었다.

이에 대해 과학적 증거를 댈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거는 없지만 금오산은 풍수적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 곳에 쇠말뚝이 박혔으니 일제의 소행으로 추정한 거다.


쇠말뚝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겉 부분의 부식 정도로만 추정했을 뿐이라고 실토했다.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눌의산 쇠말뚝

역시 대구의 역술인 민승만씨가 감정했다. (1)과 비슷한 논리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마암산 운수봉 쇠말뚝: 일본 방송에서 취재해간 푸닥거리

영동군청 담당 공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일제가 박았다는 근거가 없어서 긴가민가 하면서 뽑았다.

이렇게 의문투성이였던 쇠말뚝은 1995년 6월 5일 성대한 산신제와 함께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 제거 행사는 일본의 NHK, TBS 동경방송에서도 촬영을 해갔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1리 남한강 북벽 입구에서 발견된 3개의 쇠말뚝, 아니 뱃줄을 박는 기둥

제보자들은 이 쇠말뚝이 1894년 무렵 영춘면에서 의병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큰 전투가 있었고, 항일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일제가 장군소(장군 연못) 앞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춘면장이자 현지 주민인 우계홍 씨는 김용삼 기자에게, “일제가 박은 게 아니라 해방 후 주민들이 북벽 아래 뱃줄을 묶으려고 박은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아무리 군청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귀담아듣지 않는 바람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둔갑했다”고 했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4리 조울재 쇠말뚝: 민주적으로 다수결 원칙에 의거해 감정

이 쇠말뚝은 1995년 6월 13일 발견되었으나, 광복 50주년 기념행사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두 달을 미루어 8월 15일 제거했다.

그런데 김용삼 기자가 직접 확인해 본 바로는, 이 ‘쇠말뚝’의 길이는 볼펜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더 기가 막힌 건, 제보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나뉘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박았다는 의견과 일제가 한일합방 후에 박았다는 의견이 맞섰다. 그런데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이 더 많아서, 결국 이 쇠말뚝은 ‘일제가 박은 것’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강원도 양구군 쇠말뚝 3개: 광복 50주년 기념 국립민속박물관 도록에도 실린 영광의 쇠말뚝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국립민속박물관의 '근대 백년 민속 풍물전'의 전시 도록에 수록된, 양양과 양구에서 발견된 쇠말뚝. 2미터가 넘는 크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가 박았다는 증거가 없고, 녹도 별로 슬지 않은 상태였다.

이 지역 쇠말뚝은 대형이었다. 제일 긴 것이 2미터 58센티미터, 지름은 2.5센티미터였다. 그런데 1995년 당시 발견된 상태를 보면 녹이 슬지 않은 채로 너무나 생생하고 깨끗하였다.

그래서 혹시 일제가 박은 게 아니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된 사람들이 전문가의 고증을 받자고 의견을 보냈으나 무시되었다. 3.1.절을 즈음한 때였기 때문에,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결국 3.1.절 전날인 2월 28일, 언론의 대대적인 관심을 받으며 제거되었다.

더 나아가 이 쇠말뚝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50주년 기념 ‘근대 백년 민속풍물전’에 전시되었고, 전시 도록에 두 페이지에 걸쳐 수록되었다.

수록에는 다음과 같은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정기와 맥을 말살하려고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거나, 쇳물을 녹여 붓거나 숲이나 항아리를 파묻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유명한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지기(地氣)를 눌러 인재 배출과 정기를 누르고자 한 것이다.

쇠말뚝의 진실: 측량기준점이 뭔지도 몰랐던 조선인들의 오해

제보 지역과 측량기준점 설정 지역이 일치한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운서 회장과 서길수 교수가 솔직히 인정했듯, 쇠말뚝은 일제가 박았다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감정 요청을 받고 나서 조사 작업에 착수해 보니, 군부대에서 필요해서 박았거나 목재 전신주 지지용, 광산이나 산판에서 사용하는 물건 운반용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일제의 쇠말뚝이라고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두 사람은 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쇠말뚝이 박혀 있다고 보고된 지역을 조사해 보면, 그 지역들이 측량을 위한 기점을 활용되는 대삼각점, 소삼각점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대삼각점은 측량기준점을 말하는데, 머리 부분의 열십자(+) 한가운데 측량기의 추를 맞추고 측량을 하는 기점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다음,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사실상 이 땅에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측량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측량기준점 표식을 전국의 높은 산에 설치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잃었다고 침통한 분위기에서 조선인들은 이상한 모양의 막대기가 땅에 박힌 것을 보고 “왜놈들이 조선에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으려고 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증언이 지역 주민에게서 나왔다

쇠말뚝의 발견 지점과 측량 기준점 지역이 일치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준 증언자가 있었다.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삼화리의 이봉득 씨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21세였던 1938년 무렵 산림보호국 임시직원으로 조선총독부 임정과에서 나온 측량기사 고가 주우켄(당시 30세)과 장길복(당시 25세)이라는 사람을 따라서 화천과 양구 일대를 돌며 업무를 도왔다. 그 당시 산봉우리 등에 설치한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려고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하는 조선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측량기사가 산에 올라가 대삼각점을 설치해 놓으면 주민들이 밤에 이걸 부수고 흩어놓는 일이 자주 있었다. 측량기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할 때 부역을 한 마을 장정들은, 어른들이 쉬시하면서 하던 이야기가 실제로 가서 보니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는 허탈해 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윤서 회장도 인정한다. 그는 “쇠말뚝이 박혔다고 제보가 와서 그 지역에 가 확인해 보면 측량용 삼각점이 박혀 있는 곳이 많았다”고 시인했다.


나오며: 우리 안의 저열한 정신 문화를 반성할 필요가...

지금도 쇠말뚝 신화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우리 주변에 숨 쉬고 있다. 독도나 만주 등지에 대한 감상적 · 낭만적 해석도 무속에 불과한 독특한 정신 세계를 반영한다.

더구나 무속적 세계관을 한국인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고 굿이나 푸닥거리 등을 ‘한민족’의 고유한 정서로 내세우는 문학, 예술 작품들은 지금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백기완의 《묏비나리》나 황석영의 《임을 위한 행진곡》, 조정래의 소설에 묘사된 것과 같은 토테미즘적 세계관 등등 사례는 수없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박혀 있다는 ‘쇠말뚝’ 역시 냉정히 바라보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측의 논리에 휘말릴 필요가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참고 자료

  • 김용삼, “쇠말뚝 신화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175~183쪽
  • 김용삼, “대한민국의 국교는 풍수도참인가?”《월간조선》1995년 10월호
  • 국립민속박물관, 《근대 백년 민속 풍물전》(전시도록), 1995

(이 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 이문영,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NEWSTOF, 2019. 4. 23 기사. [1]
  • “역사바로세우기와 반일 선동 대못이 된 쇠말뚝 진실은?”, 《미디어펜》2016. 3. 22 [2]
  • ““민족정기 되찾자”「일제 쇠말뚝」 뽑기·옛 지명 살리기”, 《한국일보》1995. 2. 17
  • “쇠말뚝 제거해 민족혼 되찾자”, 《한겨레》1993. 9. 13. [3]
  • ““일제침략 잔재 없애자”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중앙일보》 1991. 12. 0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