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마트베예비치 이그나티예프(Александр Матвеевич Игнатьев, Alexandre Matveyevich Ignatiev, 1902 ~ 1950.08.23)는 소련군 대좌로 해방직후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46년 8월 23일 스탈린의 지시로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연안파)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을 결성한 직후[1][2] 8월 30일의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허가이, 김일성, 소련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예프 대좌, 뒷줄 오른쪽부터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 등이 보인다.

생애

소련의 타타르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Tatar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 루뱌조프스키 군(Lubyazovsky district)에서 태어났다. 계급은 대령이었으며, 북한의 소련대사관의 고문이었다. (한국전쟁 중에) 1950년 8월 23일 사망했다. 보로쉴로프 (우수리스크) 묘지에 묻혔다.[3][4] 그는 자신이 적극 참여해서 만든 나라 북한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죽은 희생자가 되었다.

대좌 이그나티예프 알렉산드르 마트베예비치 이그나티예프(1902~1950)에 대해 미군이 수집한 정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5]

이그나티예프(Ignat’yev, Al, Col.) 대좌의 나이는 대략 40세 정도이다. 로마넨코 장군 지휘하의 민정국 소속 참모부장이다(1946년 8월). 정치 관련 분야에서 활동 중이며, 조선신문과 기타 조선공산당 관련 잡지들에 글을 썼다. 조선민주당의 결성(1945년 11월)과 축출(1946년 2월)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민정국의 정치국장으로 알려져 있다.[6]

그가 6.25 전쟁 중에 전사했다는 것은 부산의 국제신보가 1951년 2월 12일자로 보도한 체포된 간첩의 증언에 나오며, 미국 CIA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7]

평양 소련군정 당시 관련 기록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에는 러시아문서보관소가 소장한 소련군정 문서들의 원문과 함께 번역문도 올라 있다. 이 문서들은 이그나티예프가 토지개혁,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연안파)을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만드는 문제 등 소련군정의 여러 일에 깊숙히 간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그나티예프는 스티코프 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