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呂運亨
조선인민공화국의 제1대 국가부원수 겸 국가원수 권한대행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2일
기본 정보
본관
함양(咸陽) 여씨
출생일
1886년 5월 25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
사망일
1947년 7월 19일 (61 세)
사망지
미 군정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암살됨
본관
함양(咸陽) 여씨
경력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조선건국동맹 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당수
학력
중화민국 난징 금릉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좌파 노선을 걸은 정치인이다.

생애

행적 기록

  • 1919년 11월 중국 상해에서 기독교 목사(牧師)로 있는 기록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3040734700、宣伝関係雑件/嘱託及補助金支給宣伝者其他宣伝費支出関係/外国人ノ部 第一巻(1-3-1-35_1_2_001)(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4.在上海中日公理基督教会 p.2 : 대정8년(1919년) 11월 14일 목사(牧師)
  • 매일신보사에서 일본어로 간행하는 국민신보(國民新報) 창간호(1939년 4월 3일)와 다음 호(4월 9일)에 여운형이 작성한 아래와 같은 동일한 기사가 2회 실렸다.
現代靑年を激勵す, 近代趣味の頹廢性を嘆く 국민신보[國民新報, 每日新報社간행] 1939년 04월 03일 10면 1단
現代靑年を激勵す, 近代趣味の頹廢性を嘆く 국민신보[國民新報, 每日新報社간행] 1939년 04월 09일 10면 1단
編輯室 여운형 국민신보[國民新報, 每日新報社간행] 1939년 11월 26일 30면 7단
健氣にも廣西省を死守せんとする白崇禧とは抑くどんな男か半島の名物男呂運亨氏は嘗て白崇禧と數回會見したことがあると聞き、 その人となりを叩いて見た。それが巻頭のデッサンである。

건기에도 광서성을 사수하려는 백숭희란 애당초 어떤 남자인지 반도의 명물인 여운형은 일찍이 백숭희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고 듣고, 그 사람됨을 두드려 보았다. 그것이 권두의 데생이다.
敵將 白崇禧 素描, 五度目の奇襲上陸に南支一帶風前の燈! 국민신보[國民新報, 每日新報社간행] 1939년 11월 26일 4면 1단
(여운형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쓴 기사)

1921년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1],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는 1921년 6월의 참변 발발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나, 11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참변 당시 러시아군에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김규식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에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2]

이 일에 대한 원전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위키백과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3]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 지도자들. 왼쪽이 여운형이고 가운데가 최운산 장군으로 추정된다.[4]

김규식(金奎植)은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저 무렵에는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등 반공적인 우파들은 배제하고, 온건한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 합작 정부를 추진했는데, 두 사람 모두 자유시 참변 당시 행적이 논란된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석 당시 영상

여운형은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김규식·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과 함께 참가했던 것이 확인된다.[5][6][7]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지난해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해 그해 8월 공개했습니다.
반 교수는 그때 최진동 장군을 비롯해 김규식·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참가 접수증을 발견하고 사진도 여러 장 확보했으나...


1922년 1월 21일 ~ 2월 2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열린 제1회 극동민족대회 참석 당시 영상. 여운형이 나오는 장면도 들어있다.

상해 한인사회의 불신을 받음

1925년 12월 5일 상해 공무국 경무처 정보문서 (프랑스어 원문의 번역)
별첨 : (선언문)

적들의 손아귀에서 노는 인형에 불과한 여운형은 우리의 운동을 조작했다. 그의 음험한 사고는 적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운동의 배신자이며 반역자인 그는 1919년부터 벌써 일본의 비밀 경찰로부터 그들에게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왔다. 이와같은 행위는 우리 당내에서 지켜져야 할 규칙과 비교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이러한 나쁜 행위를 용서해야만 했고 또한 그에게 그의 명예를 회복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나쁜 천성은 이러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의 최근의 몇몇 범죄 행위를 들추어 보면 다음과 같다.
(1)<범 아시아 협회(Association Pan-Asiatiques)>는 동아시아 침략을 위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인들에게 이용되는 단체로서, 회장은 일본 외무성 스파이라고 알려진 자이고, 부회장도 영국에 고용된 스파이라고 알려졌으며, 이미 주지의 일본 스파이인 선우갑으로부터 보좌를 받고 있는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한국 정부의 대표자임을 자처하면서 위 단체에 의해 열린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개최된 저녁 만찬에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스파이들과 일을 하면서 우리의 적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명백하다.
(2)여운형의 막내 동생인 여운홍은 소위 정부를 위해 일하는 첩보 기관인 OLA의 중계로 일본 정부에 항복한 배신자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스파이이다. 그러나 여운형은 그를 비난하는 대신 그의 동생을 변호하고 있다.
(3)여운형은 다른 한편으로 항상 학생들과 상인들에게 일본인들과 관계를 맺으라고 설득하는데 주력해 왔다. 그는 모임을 갖는 것에 대해 항상 반대해 왔다. 우리의 혁명 정신은 그것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고 있으며 적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역자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처벌받아야 마땅함을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 동지에게 처벌을 가함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우리의 국가적인 성스러운 운동은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여운형이 전 국가를 동요시키는 이러한 행위들을 자행하는데 그의 자리를 이용한다는 것은 더 이상 유감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가 처벌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동지들이여, 근로자들이여, 반 일본지사들이여, 단체이건 개인이건 모두들 일어나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내딛어야 할 첫발인 것이다.

(우리 모두), 1925년 12월 2일

조선중앙일보 폐간의 진실

여운형은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으로 취임했다.[8]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보도 사진에서 손선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간행했는데, 이 때문에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당했다는 주장이 많다. 같은 때 동아일보도 똑같이 일장기를 말소하고 보도하여[9][10] 장기 정간을 당한 후 1937년 6월 3일에야 복간했다. 두 신문의 차이나는 운명을 두고 논란이 많은데 정진석 교수의 신동아 기고문에 내막을 밝히고 있다.[11]

장지연 친일 논란이 있기 전인 2003년 8월16일 저녁에 KBS는 특별기획 ‘일제하 민족언론을 해부한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적대적인 신문으로 지목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다가 마침내 거액의 소송을 제기한 때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공교롭게 방영시기가 그렇게 잡힌 것인지, 때를 맞춘 기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KBS는 이 프로그램에서 1940년 동아, 조선 두 신문의 폐간을 총독부와의 ‘합작’으로 왜곡하는 한편,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와 관련한 폐간에 대해서는 사실과는 다른 이상한 해석을 내렸다. 프로그램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이 “확대되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모두 정간됐으나 조선중앙일보는 친일파를 사장에 앉히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해 폐간된 반면 동아일보는 해당기자를 방출하고 일제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실은 뒤 복간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역사의 창’(2006년 가을, 통권 3호)에도 이런 주장이 실려 있다.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 의사를 최소한이라도 표현할 수 없다면 ‘조선중앙일보의 사명이 다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황을 주도할 수는 없었지만 속간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중앙일보의 역사성을 지켰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5일자로 발행허가 효력이 상실되어 폐간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종래의 언론관을 고수하면서 폐간을 선택했고, 동아일보는 기업이냐 민족이냐의 기로에서 전자를 택했다.”(장신, ‘일장기 말소사건과 언론의 선택’)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여 해당기자를 쫓아내고 일제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실은 뒤 복간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중앙일보가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폐간을 선택했다는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 경위는 앞에서 소개한 ‘역사와 언론인’에서 상세히 고찰했다.(305~311쪽 참고)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시 발행된 월간 ‘삼천리’의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소화 11년(1936년) 9월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삼천리’ 1938년 1월, ‘오호, 중앙일보 수 폐간, 20여년의 언론 활약사를 남기고’[12]

이처럼 조선중앙은 속간을 위해 자체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내분과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법에 규정된 휴간 기일을 넘기는 바람에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것이다. ‘삼천리’의 기사대로 조선중앙은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것이었고, 동아일보에 비해 경미한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총독부가 사장 여운형의 경질을 요구하여 여운형이 물러났던 것은 사실이고, 실무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는 아예 없었다.

요지는 같은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강제 정간을 당했다가 9개월 뒤 복간한 반면, 중앙일보는 정간이 아니라 경영상의 애로로 자진 휴간했다가 기일을 넘겨도 복간하지 못하자 발행허가 효력이 상실되어 폐간되었을 뿐,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와 함께 강제 폐간 당하고, 조선말로 간행하는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만 남게 된다.

『삼천리(三千里)』 잡지 같은 호의 여운형 인터뷰 기사에도 여운형 본인이 조선중앙일보 복간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제반 회사 경영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복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강제 폐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친일 논란과 근거 기록

여운형은 독립운동을 상당히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친일 행적을 보여주는 다수의 문헌들도 발굴되어 있다. 좌파들이 주도하는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를 옹호한다. 반면에 우익인사들에게는 조그만 친일 의심 기록만 나타나도 가차없이 혹독하게 비판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항일 행적과 친일 행적이 모두 있는 여운형에 대한 평가와 장지연(張志淵), 김성수(金性洙),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등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 것은 후세인들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 1891~1973)도 상당한 친일 행적이 있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3]

친일사전에 없는 여운형, 친일행적 또 드러나 : 친일 잣대에 형평성 논란 정진석 교수 자료 3건 공개 동아일보 2009-12-16
〈대동신문〉의 여운형 진술서는 1943년 2월 6일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杉本寬一)에게 제출된 것으로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赤身)으로 되여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서 좌(左)에 맹세합니다"라고 썼다. 진술서 끝에는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천억(千億·일본이 중심이 된 동양)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라는 자작 한시를 덧붙였다.[14][15]
또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16]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 (아마 2000만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 정진석 교수의 글에는 여운형의 친일 논란과 관련한 여러 이슈에 대해 종합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의 이름이 올랐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보고서 명단에서는 장지연의 이름이 빠졌다.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반면 곳곳에서 친일 행적이 확인되고 있는 여운형은 검토 대상조차 아니었다. 어떤 시각으로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친일과 항일의 무게를 제대로 따지지 않으면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정진석 교수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에서 지적
우리나라 언론사를 평생 연구해온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신간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에서 "여운형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조선인 학생의 일본군 입대를 선동한 '반도학도 출진보'에 실린 여운형의 글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17]

'반도학도 출진보'는 경성일보사가 1944년 2월에 발행한 책으로, 여운형·안재홍·친일문학단체 문인보국회 등이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이 실려 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여운형은 "나는 지금 결연히 일어나 2천500만 동포와 고난을 같이하고 조선을 위해서, 일본을 위해서 대동아를 위해서 미력이지만 여생을 전부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정 교수는 "여운형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이 글이 여운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장지연과 여운형의 행적을 비교했다.

그는 장지연에 대해서는 작은 흠이라도 없는지 낱낱이 찾아내 단죄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여운형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줘야 한다고 추켜세운다면 형평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생에 '친일'과 '항일'이라는 상반되는 행위가 있었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기사

아래와 같은 경성일보, 매일신보 기사에서도 여운형의 친일행적이 발견된다.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는 대표적 친일단체 중의 하나이다.[18][19]

여운형은 경성일보 1943년 11월 9일자에 《학도여 전열(戰列)에/ 지금이야말로 보이자 황민반도(皇民半島)/ 여운형씨 마침내 일어나다(學徒よ戰列へ, 今ぞ示せ皇民半島 呂運亨氏 遂に起つ)》와 1943년 11월 11일자에 《반도동포에 호소함(半島同胞に愬ふ)》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11] 여기에는 여운형의 사진과 친필 서명도 들어있다. 1943년 11월 11일자 기사가 이듬해 3월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陳譜)』에 실린 것과 같다. ’

여운형이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고위 관료들과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아래 1939년 11월 매일신보 기사에도 이러한 사정이 잘 드러난다. 이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슨 조선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친분 관계를 이용해서 일본에 조선을 독립시켜달라고 요청하면 그렇게 해주기라도 할 것인가?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 부인 주최의 간담회. 가꾸고(嘉久子) 총독부인의 인사가 있었음.
참석자 : 중촌(中村) 군사령관 부인, 천도(川島) 정신연맹총재 부인, 총독부 각 과장 부인, 령목(鈴木) 二十사단장 부인, 감자(甘蔗) 경기도지사 부인, 고교(高橋) 부윤 부인, 민병석(閔丙奭) 자작 부인, 한상룡(韓相龍)씨 부인, 윤치호(尹致昊)씨 부인, 려운형(呂運亨)씨 부인, 리승우(李升雨)씨 부인, 유각경(兪珏卿) 녀사, 김활란(金活蘭) 녀사, 손정규(孫貞圭) 녀사 등 부내에 있는 내선 각 대표 가정의 부인 一백열명 참가.

해방 직후 기록

대동신문 1946년 2월 17, 18일자 기사

여운형 친일 행적 자료중 아래 1946년 2월 대동신문(大東新聞)의 기사 2건은 신문 발행인 이종형(李鍾滎)이 친일 극우 인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으며, 조작 기사라는 주장을 많이 한다. 물론 조작이라는 증거는 이종형이 극우 친일파라는 주장 밖에 없는 것 같다.[24] 그러나 기사에 나오는 검사 스기모토 칸이치(杉本寬一)와 서기 이가주신(李家柱臣)은 실제로 당시에 그러한 직위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특히 이가주신(李家柱臣)은 창씨개명 전 1930년대 후반에는 이주신(李柱臣)이란 본명으로 활동했으며,[25] 해방 직후 1945년 11월 24일자로 경성지방법원 검사로 발령받아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26] 대동신문 기사에는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 이주신(李柱臣)의 일제시대 창씨개명한 이름 이가주신(李家柱臣)이 주요 관련자로 나오기 때문에 사실로 보인다. 사실이 아니라면 신문사가 현직 검사를 실명으로 끌어들여 조작 기사를 쓴 것이 되는데,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여운형은 이승만, 김구에 버금가는 높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었으므로, 근거없는 기사가 나갔다면 신문사는 지지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조작기사였다면 자신의 이름이 거명된 검사 이주신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운형이 문제의 문건을 작성했다는 1943년 2월은 기사가 나갈 당시보다 불과 3년전이라 그 사안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 측이 항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박헌영의 경우는 불리한 기사가 나가면 본인은 물론이고 조선공산당과 지지자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27]

여운형은 이종형이 교장으로 있던 동흥실무학교에 재정지원 담당으로 있었던 듯하다.[28] 친일파로 매도당하는 이종형도 여운형처럼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전력도 있다.[24]

이주신(李柱臣, 1910.09.15 ~ ?)은 서울 지검 부장검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7월 7~9일경 서울 종로4가 노상에서 납북되었다.[29]

미군정기 검찰총장과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이인(李仁, 1896~1979)이 1967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도 위 대동신문의 기사가 사실임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정진석 교수의 신동아 기고문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11]

일제 말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복역했던 이인(李仁)도 여운형의 친일혐의를 증언했다. 여운형이 경찰에 검거됐을 때 일제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일본의 전쟁완수를 위해 헌신한다는 장문의 전향서와 시를 지어 바치고 석방됐다는 것이다. 대동신문이 폭로한 내용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해방 후 내가 미군정 때 대법관과 대법원장서리 자리를 내놓고 검찰총장으로 앉게 된 지 1주 후에 지방법원 서기가 찾아와 신문지에 싼 형사기록을 나에게 준 일이 있다. 그 서기는 해방되던 때는 서울지방검사국 서기로 있었는데 8·15 해방 날은 일본인 직원은 전부 도망가고 한인 서기 2명만 남았었다. (중략) ○陽은 서울지검에 나타나 자기의 전향서와 시문(詩文) 및 이에 관한 형사기록(조선대중당과 아편관계의 20여 명의 기록)을 찾아달라 했으나 한 개인이 관청서류를 임의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陽이 그의 불명예스런 기록을 말살하려는 흉계인 듯해서, 복잡해서 찾지 못한다고 말해 돌려보내고 자기가 비장했던 것인데 나에게 제출한다기에, 나는 다망중이라 일별한 뒤 서기국장 윤지선(尹智善)에게 금고에 특별보관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陽은 문맥상 여운형임을 알 수 있다.)
-이인, ‘해방전후 편편록’, ‘신동아’ 1967년 8월, 356쪽
앞에서 소개한 대동신문 1946년 2월17일과 18일자에 실린 ‘반성한 여운형의 고백’이라는 수사기록과 한시가 바로 여운형이 찾던 문건이었을 것이다.

이인(李仁)이 말한 해방되던 해 서울지방검사국 서기로 있었다는 사람은 바로 이가주신(李家柱臣) 즉 이주신(李柱臣)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인의 글로 보아 해방 직후 여운형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동신문 1946년 2월 10일자 기사

대동신문 1946년 2월 10일자 2면과 3면에는 여운형이 1943년 11월 9일과 11일에 경성일보에 쓴 친일 글을 복제하여 싣고 있다.

呂運亨의 忠誠 親日의 活證을 보라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년 02월 10일 2면 1단
不唯天下之人이 深企顯戮이라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년 02월 10일 2면 3단
여운형이 경성일보에 학생들의 입대를 선동한 글을 실었다는 다른 증거도 있다. 1946년 2월10일자 대동신문(大東新聞)은 여운형의 학병 권유 기사가 실린 경성일보 지면을 복사해 두 개 지면에 걸쳐 실었다. ‘여운형의 충성, 친일의 활증(活證)을 보라’는 제목과 함께 경성일보 지면을 사진판으로 제시했다. 경성일보 지면에는 ‘학도여 전열(戰列)에/ 지금이야말로 보이자 황민반도(皇民半島)/ 여운형씨 마침내 일어나다(學徒よ戰列へ, 今ぞ示せ皇民半島 呂運亨氏 遂に起つ)’라는 제목 아래 여운형의 사진이 들어 있는 기사 한 건과 ‘반도동포에 호소함(半島同胞に愬ふ)’이라는 여운형의 글이 실려 있었다. 바로 ‘반도학도 출진보’에 실린 글인데 여운형의 친필 서명도 있다.[11]

해방 직전 소련의 대일전 참전 저지를 위해 노력

여운형은 조선 총독부나 일본의 고관들을 많이 알고 지냈다고 한다. 독립운동 한다는 사람이 일본 고관들과 친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때로는 특정한 일을 해 달라는 그들의 부탁을 받기도 했는데, 당연히 일본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해방직전인 1945년 7월 일본 수상의 부탁으로 모택동을 찾아가서 만나 스탈린이 일본전에 뛰어들지 말고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하러 간다고 했다. 그가 실제로 모택동을 만나러 갔는지는 좀더 확인이 필요한 것같지만, 여운형은 당시 일본을 위해서도 활동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呂運亨(여운형)과 가까이 지내던 崔容達(최용달)이 政界一線(정계일선)에
그보다 두달전 六월 어느날 내집에 들른 최용달(崔容達)군은 七월 초순 여운형(呂運亨)씨와 함께 모택동(毛澤東)을 만나러 연안(延安)으로 갈 계획임을 나한테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불리한 전세(戰勢)에 몰린 일본수상(日本首相) 「스즈끼」(鈴木貫太郎)가 여운형 씨에게 「친서(親書)」를 보내어 모택동(毛澤東)을 만나달라는 부탁을 해왔는데 그길에 최(崔)군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모(毛)를 만나는 목적은 일본(日本)의 대미영전쟁(對美英戰爭)에 소련(蘇聯)이 끝까지 중립(中立)을 지키도록 (참전(參戰)하지 않도록) 「스탈린」을 움직여달라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때 나는 즉각 나의 의견을 말했던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영(美英)을 설득(說得)하여 소련과의 동맹(同盟) 관계를 파기(破棄)케하고 일본(日本)과 합작(合作)하여 소련를 치도록 하는 편이 도리어 가망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때 나의 관측이었다.
그러나 최(崔)군은 미영(美英)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옹호의 결심(決心)은 굳은 것이어서 일본(日本)과의 합작(合作)은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고 그 본보기로 그해 四월 「히틀러」가 패망할 때 자기의 진짜 적(敵)은 미영(美英)이 아니라 소련이라고 최후순간까지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미영(美英) 측은 끝내 그것을 묵살하고 「히틀러」 공격의 손을 멈추지 않았던 일을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후 최(崔) 군은 고향(양양)을 잠깐 다녀와서 연안(延安)으로 떠날 것이다 하였는데 그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한채 八ㆍ一五 해방(解放)을 맞이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의 정치 행보

미군정의 1946년 8월 16일자 기록[30]에 의하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 1891~1973)이 어느 파티에서 약간 술이 올라 한 발언이 나온다. 해방 전일인 8월 14일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여운형을 불러 일본이 항복하니 정권인수를 하겠느냐는 말에 응하였다. 아베는 처음에는 송진우에게, 두번째는 안재홍에게 제의했다 거절 당하고, 세번째로 여운형에게 의향을 물었는데, 그는 즉시 승락하고 동생 여운홍과 함께 송진우 등 극좌파와 거리가 먼 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한 조직을 꾸렸다. 하지만 이튿날인 8월 15일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遠藤柳作)가 미군은 부산과 목포지역만 점령할 것이라고 말하자, 여운형은 즉시 소련이 받아들일만한 공산주의자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조직을 다시 꾸렸다고 하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 기회주의적인 여운형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진술이다.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31]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32]

1월 14일에는 탁치문제로 대중이 분열한 죄과는 자신에게 많다며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33]

친소 친북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처음에 협력하다 앙숙의 관계로 틀어진 것만 제외하면 해방 후에도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극단적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반공적인 이승만, 김구도 배제한 채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34]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35][36]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는 버취(Leonard M. Bertsch) 중위가 깊이 관여하였다.[37] 그는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어 계급에 비해 중요한 일을 맡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중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38][39] 하지 중장의 정치ㆍ경제 고문 번스(Arthur C. Bunce)[40][41]가 1946년 평양을 방문하여 10월 6일 김일성과 회담했는데,[42]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한다.[43]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에는 발라사노프와 그의 부관 샵쉰도 동석했다. 번스는 남조선에서 우익은 좌익을 반대해 투쟁하고 좌익도 좌우합작을 원치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김구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며 박헌영도 정당들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한 반면 김규식은 인민에게 영향력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친일파와 투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번스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는 박헌영과 여운형의 합작은 미군정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번스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일부 세력을 용납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 김구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에 기초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를 보아도 미군정은 박헌영 뿐만 아니라 이승만, 김구도 멀리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 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여운형은 자신이 늘 암살과 테러 위협을 받는다고 주장했으나, 그 자신이 또한 북한 쪽 사람들과 모의하여 이승만김구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그가 북한에 보낸 아래 편지에는 소련과 북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여운형이 북쪽에 보내는 좌우합작 계획〉

북조선의 책임일꾼들에게.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벗들이여.
여러분께서는 당연히 남쪽의 상황을 알고 계실 것이기에 저는 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좌우합작 계획으로, 이 문제에 관한 여러분의 의견을 알고자 합니다.
합작의 기본 원칙과 의미(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나, 동지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1. 모스크바 결정에 근거해 소‧미공동위원회 사업 재개를 가속화시킨다.
  2. 소‧미공동위원회 사업 재개를 방해하는 이승만과 김구를 제거한다.
  3. 정부 구성을 위해 소‧미공동위원회 사업이 재개될 때까지 통합을 달성한다.
  4. 우익에서 가장 진보적인 분자들을 가려내어 좌우 통일기관을 창설한다.
  5. 이 문제에 관한 북쪽 동지들의 의견을 고려한다.
  6. 공동기관의 위원들은 당의 의견이나 지령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제시하게 될 것임을 확실히 해 둔다.
  7. 이 공동기관은 각 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정부 구성에 착수할 때까지 존속해야 한다. 협의기관의 임무는 기관의 활동 과정에서 정해질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소‧미공동위원회 사업 재개와 신속한 임시정부 수립입니다. 남조선 인민은 이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조선에서는 창조적인 사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남조선에서는 무질서와 내분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와 우익의 통합은 반동분자들과의 무원칙적인 합의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통합은 민주주의전선의 지도 아래 견고한 토대와 확고한 원칙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투쟁의 과정을 거쳐 통합에 다다르게 되며, 반드시 외교적 수법을 이용할 것입니다. 현재 민주주의전선 활동가들이 서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조율하고 있습니다. 통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술적 결과들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1. 김구와 이승만을 제거하고 우익의 분열을 야기할 것이다.
  2. 반동 기관인 ‘민주주의연맹’과 ‘독립촉진비상인민회의’의 정체를 폭로할 것이다. 이 기관들의 진보파는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
  3. 이런 전술로 우리는 대중 앞에 우익의 반동성을 폭로하여 인민대중도 민주주의전선 쪽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4. 이런 방법과 또 언론을 통해 우리는 군사령부의 개입을 이루어내고, 경찰병력을 재조직화시키며, 위로부터의 억압체제를 청산하고, 친일분자와 반동주의자들을 정리하며, 테러조직들을 해체하고, 그 수괴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우리 동지들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고, 일본인들이 탈취했던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당 사업에서의 성공과 토지개혁 실시, 노동법 실현 및 민주주의 투쟁에서의 여타 승리에 대해 여러분께 개인적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여운형.

46년 12월 15일.

미군정은 여운형이 김일성이나 소련 군정 사람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상당부분 파악하고 있은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여운형에 대한 소련의 평가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북한 단일의 임시정부 초대 수상으로 여운형을 추천했다.

45년 10월 5일 연해주군관구 사령부가 국방부와 공산당 중앙위 등에 보낸 여운형에 대한 인물평정서는 『1921년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나기도 했던 여운형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생각하며, 한반도는 소련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등 그를 친소인사로 평가, 소련이 여운형을 임시정부의 초대 수상후보로 선정한 배경이 밝혀지고 있다.

소련군은 김일성을 대중 앞에 선보이기도 전인 1945년 10월 5일에 이미 서울의 여운형은 자신들 편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여운형과 김일성의 비밀 회동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은 여운형이 비밀리에 여러 차례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동한 사실에 대해 증언하였다.[44]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선인출판사, 2010.11.10.)

제2장 김일성과 여운형의 비밀회동
제1차 회동 (1946년 2월 10일~11일)
제2차 회동 (1946년 4월 17일~ 25일)[45]
제3차 회동 (1946년 7월 31일)
제4차 회동 (1946년 9월 23일~ 30일)
제5차 회동 (1946년 12월 28일 ~ 1947년 1월 10일)

1947년 여운형의 피살 이전 활동

위의 날짜들이 정확한지는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여운형이 자주 비밀 방북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인민당의 설국환[46]은 1946년 5월의 인터뷰에서 여운형이 3월이나 4월에 두번째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 등을 만났으며, 첫번째 방문은 작년 가을이라 하였다.[47] 소련측 문건에 여운형이 1946년 9월말 평양을 방문했다고 나오므로 제4차 회동은 시기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48][49] 그의 1946년 9월말 방북에 대해 미군정은 여운형이 박헌영과의 경쟁에서 김일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고 적었다.[50]

스티코프 일기 번역본[51] 말미에는 1946년 9월말 여운형의 방북과 관련하여 다음 두 건의 기록이 나온다.

여운형은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남조선 좌익이 어떠한 정치노선을 취해야 하는지 조언을 얻기 위해 북에 온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여운형의 행동은 소련군정과 내통하여 미군정과 남한 우익에 대적하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여운형은 김일성 및 소련 군정 측 인사들과 밀서도 자주 주고 받았다.[52] 그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김일성이 평양에 와서 대중앞에 갓 출현한 1945년 10월에 여운형이 김일성에게 보내는 밀서를 평양으로 가서 전달했다고 증언했다.[53] 다른 사람들은 김일성이 왔는지도 잘 모를 때이고, 곧 이어 그가 가짜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여운형은 당시에 벌써 김일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편지를 배달한 이기건은 보천보 사건 당시 김일성을 도운 일 때문에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풀려나 북한에 나타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인 줄로 알고 그를 만나러 평양으로 가는 박금철(朴金喆, 1911~1967?)과 동행하여 같이 김일성을 만났는데,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대화가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명은 가짜라 느꼈다고 했다. 이 증언은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여운형은 무슨 수로 김일성을 알고 재빠르게 밀서까지 보냈는지 의문이다.

1946년 8월 7일, 동대문 경찰서에서 인민당 정치부장 김세용(金世鎔)의 집을 수색하여 얻은 물품 목록에는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보내는 7월 18일자 편지도 들어 있었다.[54]

딸들을 북한에 보내

그는 미군정이나 남한 우파들보다는 김일성과 소련군정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고, 테러 위협이 있다는 핑계로 딸 여연구(呂鷰九, 1927~1996), 여원구(呂鴛九, 1928~2009) 등을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으나, 왜 자신은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계속 남아있었는지 의문이다. 북한에는 김일성의 위치가 거의 확고해져 자신이 활동할 공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북한의 딸 여연구가 1994년 7월 28일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 ~ 2008)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에 의하면 그녀는 1946년 이화여대 2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다 부친의 권고로 동생 원구와 함께 북한으로 갔으며, 7월 3일 김일성의 집에 도착하여 한동안 김일성 부부의 집에서 기숙하다 소련 유학을 갔다고 했다.[55] 이후 여운형의 딸들은 북한에서 고위직들에 오르며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암살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 당했는데, 범인은 잡혔으나 배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56] 좌우파 모두 배후로 거론된다. 장례식은 8월 3일 거행되었다.[57]

p.3 : G-2 Weekly Summary #98 (pp.21~23) : Comments on the political situation - Lyuh Woon Hyung's Murderer links Assassination with that of Song Chin Woo 1947.07.31
여운형 암살은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범인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송진우 암살은 김구가 배후로 의심을 받고 있다.
번스(Arthur C. Bunce) - 김일성 대담 (1946년 10월, 평양)[42]

김일성 : 좌우통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진보주의자들을 테러하는 친일 분자들을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 강량욱 목사(김일성의 외조부 뻘로 당시 북조선 임시인민위 서기장)의 아들·딸을 테러분자들이 죽였다(46년 3월). 이 테러분자들로부터 김구의 사인이 있는 문건이 나왔다. 또 남조선에서 좌우익 통합문제를 협의한 후 테러단들이 여운형을 나무에 걸어 교수시키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당시 좌우합작위 우측 비서였으며 현재 민족통일촉진회 최고위원인 송남헌(宋南憲, 1914~2001)씨는 박헌영 진영 청년들이 서울 신당동 친지 집에 있던 여운형을 높이 10m의 나무에 매달아 죽이려다 실패했었다고 증언했다.)

번스 : 그 테러 미수사건의 배후는 좌익 진영이다. 특히 박헌영이 좌우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1993), PP. 244-248.
김일성은 처음에 서울의 조선공산당수 박헌영을 견제할 목적으로 여운형을 지원했으나, 공산당이 불법화되면서 박헌영이 월북하고, 여운형의 요구 사항이 많아지자 제거하려 했다고 함.

피살 당시 가방 속에서 나온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피살 당할 당시 가방 속에서 나온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내는 1946-11-10 일자 편지의 내용.[58]

피살 당시 그가 들고 있었던 가방 속에서 김일성김두봉(金枓奉)에게 보내는 1946년 11월 16일과 11월 30일자 편지(사본)가 발견되었다.[52]

S Korea 0107: Domestic Employment of Troops
文書名: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 極東軍総司令部文書 ; Assistant Chief of Staff, G-2 = 参謀第2部
여운형이 1946년 11월 10일자로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영문으로 정리되어 있음.
  • 한국 경찰을 재조직하거나 전복해야 한다는 내용의 김일성, 김두봉 앞 편지
Plan for Overthrowing the National Police : 25 July, 1947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한국 종로경찰서장이 서울 경찰청장 앞으로 보고하는 형식으로 발송한 공문. 여운형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여운형이 김일성과 김두봉 앞으로 발송한 서한을 첨부한다는 내용. 서한에 따르면 여운형이 김규식과 함께 한국 경찰을 재조직하던가 전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고 기술.
文書名: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 極東軍総司令部文書 ; Assistant Chief of Staff, G-2 = 参謀第2部 (일본국회도서관) p.36


아래는 피살 후 여운형의 집에서 발견된 군정청 Brown 장군에게 보내는 영문편지이다.

문서군명 : RG 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시리즈명 :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1948,

피살 직전 미군정에 제출한 청원서

여운형이 피살 직전인 1947년 6월 미군정에 제출한 청원서에는 한반도 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는 정치세력의 참여는 불허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반탁을 주장하는 김구, 이승만, 한민당 등 우파 세력은 모두 배제하고 좌파들로만 임시정부를 구성해야한다는 청원이다. 소련과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

49. Proposals concerning selection of political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to be consulted by the Joint Commission : 비망록 / Lyuh Woon Hyung Chairman Laboring People's Party Seoul Korea 발신 ; Brwon General 수신, 1947.06.17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59].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60]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61]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참고 자료

  • The Passing of Lyuh Woon Hyung : 여운형 피살 당시 미군정청이 작성한 여운형의 일대기
Information on Korean Leftist, US-USSR p.7 Lyuh, Woon Hyung:비망록 / p.8 The passing of Lyuh Woon Hyung:기록자료 / p.18 A few thumbnail sketches:기록자료 : 여운형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46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pp.2~11
  • Lyuh Woon Hyung : 미군정청이 기록한 1945년 9월 ~ 1947년 5월 24일 기간 여운형의 행적
“지상에선 신사(紳士), 지하에선 투사(鬪士)”
일제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절조 유지하면 독립운동…극좌 노선에 반대

함께 보기

각주

  1. 이주천, 제6주제: 해방전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1997/9/27 선택지 11월호 원고
  2. 뱅모, [세뇌탈출] 393탄 - 정신차려! 황교안! - 1부 (2019.04.02) : 18분경부터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여운형의 행적에 대해 나옴.
  3.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 위키백과
  4.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합뉴스 2019-12-30
  5.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합뉴스 2019-12-30
  6.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SBS 뉴스 2019.12.30
  7. 봉오동 전투의 주역…최진동 장군 사진 '최초 공개' SBS 뉴스 2019.12.30
  8. 해제 : 조선중앙일보(여운형) 국립중앙도서관
  9.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채백(부산대학교),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연구 한국언론정보학보 통권 39호 2007.08 pp.7 - 39(34 pages)
  11. 11.0 11.1 11.2 11.3 11.4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⑥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 여운형의 ‘친일’과 조선중앙일보 폐간 속사정 신동아 2010년 1월호
  12. 嗚呼, 中央日報 逐廢刊, 二十餘年의 言論活躍史를 남기고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호 1938년 01월 01일
  13. 親日派群像 > 豫想登場人物 親日派 群像(上) > 二. 自進協力者와 威脅에 依한 被動協力者① > 1. 政界, 官界, 實業界 關係 人物① > 呂運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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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5.0 15.1 反省한 呂運亨의 告白 (속)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년 2월 18일
  16. 16.0 16.1 G-2 Periodic Report, 9/8 - 10/31/45 p.9 : 1945년 9월 12일자
  17. 17.0 17.1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陳譜)』 :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1944년 3월 국립중앙도서관
  18. 조선언론보국회(朝鮮言論報國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反民者罪狀記 > 反民者의 溫床이던 雜多한 親日團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 건준위원장 呂運亨,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 매일신보 1945년 08월 17일
  2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집, 《조선공산당 문건 자료집(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 : 1945-46》, 한림대학교출판부, 1993년, pp.227~229; 원문은 pp.236~240.
  22. 《文壇三十年의 자최 (十一)》 / 金東仁 『신천지(新天地)』 제4권 제6호 (1949년 7월, 서울 : 서울신문사) pp.148-152 : 국립중앙도서관
  23. 《文壇三十年의 자최 (十一)》 / 金東仁 『신천지(新天地)』 제4권 제6호 (1949년 7월) pp.148-152 : 국회도서관
  24. 24.0 24.1 반민자 대공판기(反民者 大公判記) : 이종형 편(李鍾滎 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反民者罪狀記 : 진짜 愛國者라고 發惡하는 李鐘滎
  25. 직원록의 이주신(李柱臣) : 1935~1939년간 (창씨개명 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 1945년 11월 24일자 군정청 사령(軍政廳辭令) : 경성지방법원 검사(檢事) 이주신(李柱臣) 조선일보 1945년 11월 25일 1면
  27.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28. 財團完成 새 發足 東興實務學校昇格認可 每日申報 1945-03-25 2면 7단 : 가키모도(垣本和三郞), 이종영, 여운형, 안재홍
  29. 아들 이경찬의 부친 이주신(李柱臣) 피납에 대한 증언
  30. Interview with 2nd Lt. Leonard Bertsch, political advisor for General Hodge. : ◦ Robinson, Aug. 16, 1946 NARA 문서
  3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3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33. 託治問題로 大衆分裂 罪過는 나 自身에 만타 指導者의 자리를 물러나겟다 呂運亨氏談 동아일보 1946년 01월 16일 석간 1면 5단
  34. 좌우합작은 共委를 촉진, 탁치론보다 임정 수립이 선결, 지금은 왈가왈부를 논쟁할 때 아니다, 아놀드소장 담화 자유신문 1946년 07월 03일 1면 1단
  35.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26의 Hodge가 김규식에게 보낸 1946년 9월 18일자 편지부터 나오는 문건들
  36.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肖] "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
  37. American Members of the Political Advisory Group of the US-USSR Joint Commission Attending the Commission Meeting at the Duk Soo Palace[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정치고문단의 미국측 인사들 : 1947.06.15] 사진의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Bertsch 중위
  38.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주간조선 2359호] 2015.06.01
  39. Bertsch Papers,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옌칭 도서관 버치 콜렉션에 대하여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40. 안종철, 해방 전후 아더 번스(Arthur C. Bunce)의 활동과 미국의 대한정책 미국사연구 제31집 2010.05 pp.139 - 167
  41. 황윤희, 번스(Arthur C. Bunce)의 내한활동과 한국문제인식 숭실사학 2009, vol., no.23, 통권 23호 pp. 151-208
  42. 42.0 42.1 번스(Arthur C. Bunce)와 김일성 대화록 : Беседы Банса с Ким Ир-Сеном 국사편찬위원회 :1946년 10월 6일 진행된 김일성과 번스의 회담 내용
  43.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4.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45. 미군정 문서에는 여운형의 방북 기간이 4월 19일~4월 25일로 나옴. The Political Adviser in Korea (Langdon) to the Secretary of State Seoul, May 14, 1946.
  46. [부고] 원로 언론인 설국환씨 중앙일보 2007.06.23 종합 29면
  47.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p.201
  48.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9월 24일
  49. 노동당 대회 결과 보고 - 남조선노동당 결성 과정 및 11월 22~24일 개최된 노동당 창당대회에 관한 보고; 지도부 성원 명단 및 지방조직.
  50.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30
  51.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52. 52.0 52.1 방선주(方善柱, 1933~ ),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 192 및 자료 C (pp.214~234) : G-2 는 한국에 진주한 미 24군의 정보참모부를 말함.
  53.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1972.01.27 동아일보 4면
  54.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미군정문서) p.177
  55. 문명자(1930 ~ 2008),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여연구 인터뷰 : 김일성 김정숙 부부와의 추억 월간 말 1994년 9월호 pp.44~46
  56. RG 9, Radiograms, Microfilm No. 246-253, 주한미군의 남한 사정에 대한 보고서 (35) p.131 Lyuh Woon Hyung's Death 1947.07.19 / p.154 Lyuh Woon Hyung's Death 1947.07.20 / p.161 Assassination of Lyuh Woon Hyung 1947.07.21 / p.200 Korean Police Arrested Assassin of Lyuh Woon Hyung 1947.07.26
  57. RG 9, Radiograms, Microfilm No. 246-253, 주한미군의 남한 사정에 대한 보고서 (39) p.22 Funeral of Lyuh Woon Hyung 1947.08.04
  58. Brief of Letter Reportedly Found in Brief Case of Lyuh Woon Hyung, Korean Political Leader, Following His Assassination on 19 Jun 47. 일본국회도서관
  59.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60.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61.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