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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사죄와 배상 문제)

햇살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8월 19일 (월) 16:18 판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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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위안부의 개념과 역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연관검색어를 참고하도록 한다.

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이승만 TV,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강연.

함께 보기 2: 이승만 TV, “여자 정신대” 강연.

함께 보기 3: 이승만 TV, “정대협, 위안부 문제 이렇게 키웠다” 강연.


(1) 이 문서는 이영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00~339쪽; 주익종,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 같은 책, 352~374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2.2.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한일 청구권 협정, 대일 민간 청구권, 대일 피해 배상 요구 (역사와 쟁점), 역사왜곡,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친일파 청산론,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김태규 판사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소신 발언, 정대협, 정의기억연대


1990년대 이후에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를 가리키게 될 때까지

위안부는 현재 ‘일본군 위안부’를 가리키는 협의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실제 사용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간의 성매매 여성을 가리키는 행정 용어로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군과 미군에도 위안부가 존재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군 위안부는 직업적으로 성을 파는 여성들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항목을 반드시 참고해야 하며,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 다음에 아래 설명을 보도록 한다.

‘위안부 =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 한일 청구권 협정의 실제 대상은?

만약 일본군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는 인식이 있었다면 해방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1952년부터 시작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협상의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13년 동안 끌어온 한일 회담에서 위안부 피해의 문제는 다루어진 바가 없다.

청구권 협정의 대상과 협상 과정에 대해서는 ‘한일 청구권 협정’과 ‘대일 피해 배상 요구 (역사와 쟁점)’ 항목을 반드시 참고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본질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것은 식민지배의 피해 배상이 아닌 명백한 민사상의 채권채무 관계를 처리하는 데 있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의 사례는 국제적으로 전무할 뿐 아니라,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일본과 함께 연합국에 무너진 패전국의 입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바로 이 점을 명백히 한 것이었고, 또 일본은 이 조약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요구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일 8개항 요구’로 정리했다. 이후 장면 정부에서는 이 요구안을 토대로 실질적 협상에 들어갔고, 박정희 정부 역시 이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아 협상을 타결시켰던 것이다. 또한 정부는 청구권과 전체 청구 금액을 최대한 많이 주장하려고 하였다. 그 모든 과정에서 청구 금액의 산출 근거는 바로 민사상의 채권채무 관계에 있었다. 즉 오늘날 말하는 정신적 피해 배상 등의 추상적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앞서 지적한 샌프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한 일본 측의 주장대로 한다면 오히려 한국이 일본에 돌려주어야 할 금액이 더 클 수도 있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이미 미군정이 몰수한 재한 일본인의 재산을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타결된 청구권 협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청구권 금액을 일괄적으로 수령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개별 청구권자에 대한 보상금은 한국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1966년 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에 따르면 민간 청구권은 청구권 자금 중에서 보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법 제정이 늦춰져 실제 보상이 상당히 지체되고 말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먼저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를 받은 다음에 청구권자에게 보상을 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5년이 지난 1971년 1월 19일에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법(법률 제2287호)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제2조가 신고 대상의 범위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9건을 지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 8건은 일본은행권 등의 재산관계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 1건이 바로 인명과 관련한 것이었다.

제2조 (신고대상의 범위) ①이 법의 규정에 의한 신고대상의 범위는 1947년 8월 15일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일본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법인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제1호·제5호 및 제7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에 일본국 및 일본국민(법인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에 대하여 가졌던 청구권 등으로서 다음 각호에 게기하는 것(이하 "대일민간청구권"이라 한다)으로 한다. 다만, 대일민간청구권의 보유로 인한 일체의 과실(이 표를 포함한다)과 법인이 보유하는 청구권중 정부의 지분에 해당하는 것은 포함하지 아니한다.

(...중략...)

9. 일본국에 의하여 군인·군속 또는 노무자로 소집 또는 징용되어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사망한 자(이하 “피징용사망자”라 한다)

② 전항 제9호에 규정된 피징용사망자의 기준과 그 유족의 범위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이 법에 따라 1971년 5월 21일부터 이듬해 3월 20일까지 신고 접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재산 관계 131,033건, 인명 관계 11,787건 등 총 142,820건이 접수되었다.

이 결과는 법조문에서 규정한 신고대상자의 범위와 같았다. 인명관계 신고가 재산 관계 신고에 비하여 1/10 이하인 이유는 강제동원 피해자로서 ‘사망자’만을 신고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을 고려하였을 때, 만약 한국 정부가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았다면 분명히 피해 배상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또한 민간에서도 위안부를 식민 지배의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이는 ‘노무동원’ 문제에 있어서 모집이나 관알선을 포함한 피징용자들이 당시에 피해 사실에 대해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교과서와 언론을 통해 본, 민간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

위와 같은 위안부에 대한 인식은 정부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의 당사자들이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 시기의 교과서에도 위안부가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1955~1962년까지 쓰인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1937년 이후와 태평양 전쟁 당시의 강제 노동 동원과 학도병 문제만 거론되어 있다.

1963년부터 시행된 2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일제의 착취는 (...중략...) 인적 자원의 수탈에도 미쳤다. (...중략...) 일제는 전선으로 우리 청년을 끌어내고, 산업 전선으로는 남녀의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1938년 조선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고, 마침내 징병제, 학병제를 시행하여 수다한 우리 청년과 학도들을 전선으로 끌어내었다. 또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위의 서술을 보면 ‘여자 정신대’는 일제의 노동력 착취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여성을 동원하여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은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보고된 바가 없다.

정신대는 노무동원의 예와 비슷하게,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이야기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여성을 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포되었다. 그 대상은 12~40세의 미혼여성이었고, 이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그 전해에 정신대를 조직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도 적고 민간의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원령을 발포한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조선에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선이라든가 관의 권유 등을 통하여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평양에 있는 군수공장이나 인천의 조병창에서 두어 달 근로한 사례는 있었다. 그 중의 일부가 일본 군수공장으로 간 사례도 있었는데, 총수는 약 2,000명 정도로 짐작된다.

이렇게 소수의 여성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공장에 투입되자, 민간에서는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지고 혼란이 확산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년층 가운데에는, 혼란과 두려움의 빠진 부모들이 빠진 부모들이 강제로 학교를 중퇴시키거나 결혼을 시켰다는 사실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후 미혼 여성에 대한 동원령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가, 1996년 이후 적용된 6차 교육과정의《고등학교 국사 (하)》에서부터 ‘정신대 = 위안부’라는 인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 우리 민족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각종 물자를 수탈당하였고, 우리의 청년들은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또 징병제와 징용령에 의해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 등지로 강제 동원되어 목숨을 잃었으며, 여자들까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위 인용문을 보면 남성은 강제 (노동) 동원의 대상이고, 여성은 위안부가 희생되는 경우가 있다는 식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교과서의 서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신문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45~1960년 사이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일본군 위안부 보도를 검색하면, 그 숫자는 단 한 건이다. 그것도 사실 일본인 여성이 일본군에 위안부로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는 네 종류의 신문에 대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한겨레》와 《매일경제》이다. 이 시기와는 관련이 없다.)

게다가 정부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 시기 성매매 여성들을 ‘위안부’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검색 결과로 나타난 신문 기사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미국군 위안부’, ‘군 위안부’와 같은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어, ‘위안부’들의 주된 상대가 누구이고 이에 대해 민간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 가능하다.

그 뒤 1960~1970년대에도 1년에 1건 이하 정도의 비율로 일본군 위안부 기사가 나온다. 그것도 1970년대까지는 ‘위안부’란 ‘미군 위안부’를 뜻했다.

이 시기 영화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조연급의 ‘위안부’는, 태평양 전쟁 말기의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그 이미지가 1960~70년대 당시의 미군 위안부에 다름 아니었다. 그 외에는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전형적인 여성의 이미지, 즉 민간 위안부의 고된 인생 여정을 그리는 정도였다. ‘정신대=위안부’와 같은 잘못 알려진 편견이 작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위안부 여성은 식민지 피해자로서의 위안부가 아니라, 가난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아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가련한 여인의 삶을 기본 서사로 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소재였을 뿐이다.

그 외에도 1980년대 일본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초점을 맞춘 오키나와에 남은 배 모 할머니라든가, 1984년 KBS 이상가족상봉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태국의 노 모 할머니의 경우 등도 참고할 만하다. 두 할머니 모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주선업자의 소개에 속거나 넘어가서 위안부 생활을 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들 보기에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당대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며, 또 실제로 이분들의 삶이 주목을 받은 것은 위안부 생활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그 분들의 기구한 삶 때문이었다. 또한 위안부 고백을 한 할머니들의 경우, 고백 이후 가족이나 친지들의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항목을 참고하도록 한다.

1990년대, 위안부 문제의 잘못 끼워진 첫 단추

해방 후 40년이 지나도록 잠잠하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앞서 살펴본 바대로, 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연구자, 교육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민간에서는 ‘정신대 = 위안부’라는 사실과는 어긋난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여자정신근로대(女子挺身勤勞隊, 약칭 ‘정신대’)’가 미미하게나마 시행되었던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퍼졌던 혼선이기도 했다.

정신대는 노무동원의 예와 비슷하게,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이야기한다. 참고로, ‘정신(挺身)’이란 어떤 일에 앞장서서 나아간다는 뜻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여성을 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포되었다. 그 대상은 12~40세의 미혼여성이었고, 이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그 전해에 정신대를 조직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도 적고 민간의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원령을 발포한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조선에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선이라든가 관의 권유 등을 통하여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평양에 있는 군수공장이나 인천의 조병창에서 두어 달 근로한 사례는 있었다. 그 중의 일부가 일본 군수공장으로 간 사례도 있었는데, 총수는 약 2,000명 정도로 짐작된다.

이렇게 소수의 여성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공장에 투입되자, 민간에서는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지고 혼란이 확산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년층 가운데에는, 혼란과 두려움의 빠진 부모들이 빠진 부모들이 강제로 학교를 중퇴시키거나 결혼을 시켰다는 사실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민간의 혼선과 혼란이 해방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일본군 위안부 자체를 공적으로 문제 삼거나 대일 민간 청구권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었다.


1983~1996년, 요시다 세이지가 ‘새로 만든 기억’으로 다시 태어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일본군 위안부에 새로운 ‘기억’이 덧붙여지면서 거짓에 기반한 일종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983년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일본에서 발표한 《나의 전쟁 범죄》에는, 그가 1943년에 부하 여섯 명과 더불어 제주도 성산포에 들어가 단추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16명을 끌고 갔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주도에서 무려 205명의 여인을 납치했다고 주장을 하였다. 남편이나 가족이 막으면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칼로 위협해서 물리쳤다고 한다. 이를 아사히(每日) 신문이 1980~1990년대에 약 16회에 걸쳐 보도하며 한국과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요시다의 책에 근거하여 1984년에는 MBC의 TV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1989년에는 《나는 조선 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의심을 샀다. 무엇보다도 제주도 현지에서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제주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요시다가 말한 문제의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을 전하고 있는데, 작은 마을에서 소녀를 열 명 넘게 잡아갔다면 그 자체로 큰 사건이고 충격일 텐데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민들은 요시다의 책에 대하여 일본인들의 얄팍한 상술이 빚어낸 일이라며 분개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996년 5월 일본의 《주간신조(슈칸신쵸, 週刊新潮)》와의 인터뷰에서, 요시다 세이지는 자신의 증언이 픽션임을 고백했다. 그 뒤 2000년에 요시다 세이지는 사망했는데, 그 후에 그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책이 모두 거짓이라고 밝혔다.

또한 2014년 8월 초 아사히신문은, 과거 요시다의 발언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32년 만에 관련 기사를 공식 취소했다. 심지어 아사히신문 구독자 등 482명은 “증언을 검증하지 않고 보도를 지속해 독자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했다”며 아사히신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이 소송에서 아사히 신문이 승소했다. 당시 일본 법원은 “특정 사람의 명예 및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또한 앞서 살핀 대로 위안부 성노예설을 주장하며 강제연행 문제를 추궁해온, 요시미 요시아키도 교수도 조선에서 관헌에 의한 노예사냥이 있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1997년에 밝힌 바 있다.


1988~1995년, 한국과 일본의 학계 및 시민단체 주도의 ‘성노예설’과 ‘강제연행설’ 대두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요시다 세이지는 결국 1992년에 한국의 언론사들을 상대로 자신이 어린 소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면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소녀들이 납치당했다던 제주도의《제주일보》와 같은 언론에서는 이 당시에도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증언 자체가 가져온 파장은 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참고로, 현재 《제주일보》의 논조는 이제는 거짓으로 밝혀진 요시다 세이지의 입장에 힘을 싣는 방향으로 변해 있다. 당시의 신문 기사는 검색 자체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이 결성된다.

이 단체의 주축 멤버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등 37개 여성단체였다.

단체 결성 2년 전인 1988년 2월 12일, 결성 주축 멤버인 윤정옥, 김신실, 김혜원 등 3인은 이른바 ‘정신대 조사단’을 구성하여 이듬해인 1989년 2월까지 일본 후쿠오카에서 오키나와, 규슈, 도쿄, 타이, 파푸아뉴기니까지 답사하였다. 1차 답사를 마친 1988년 4월 21일,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로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제주도 YMCA)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 조사 발표, 정신대 답사 보고, 정신대 문제를 다루고, 매춘문제에 대한 기독여성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는 10개국, 130명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발표의 강사는 윤정옥이었다.

또한 이 답사기는 1990년 1월, 《한겨레신문》에 네 차례(1월 4일, 12일, 19일, 24일)에 <이화여대 윤정옥교수 ‘정신대’ 원혼의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여기서 ‘원혼(冤魂)’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조선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전쟁 중에 강제로 위안부 사역을 하다가 패전 때에 학살되었다는 해석을 전면에 내놓게 된다. ‘군대 동원 처녀 사냥 예사... 물긷던 아낙 뭇매 연행도’라는 기사 제목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대협’이라는 단체명에서부터 이미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기초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들의 각종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이들은 정대협을 조직하기 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강제 연행을 사실로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인하자, 정신대 피해자의 증언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1991년 8월 14일, 첫 번째 피해 증언자 김학순 씨의 기자 회견이 이루어졌다. 8월 16일자 《조선일보》의 기사는 ‘위안부’와 ‘정신대’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섞여서 사용된다. 또한 적어도 기사 상으로 보면 김학순 씨가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다는 단계적인 추론을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김학순 씨의 증언에 이어, 1991년 12월에는 문옥주, 김복선 씨의 증언이 성사되었다. 이 중 문옥주 씨의 증언은 일본인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에게 구술한 회고록 형식으로 1996년에 출간된 바 있다. 한국어 번역본은 《버마전선일본군 ‘위안부’ 문옥주》(김정성 역, 아름다운사람들, 2005)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다 세이지의 방한 기자회견이 당시 한국과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위안부 피해 증언자들의 증언에 사회적 폭발력을 더해준 셈이었다. 일본인 위안부 사냥꾼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서로 비슷한 시기에 맞물렸고, ‘정신대 = 위안부’라는 인식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 위안부’라는 인식이 굳어져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 이영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00~339쪽
  • 주익종,“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 같은 책, 352~374쪽.
  •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1]
  • 김동호 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위 원문에 대한 번역), 《미디어워치》2016. 6. 30 [2]
  • 여성가족부 인터넷 박물관 [3]
  •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미디어워치》, 2018.4.14. [4]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위안부)” [5]
  • “‘미군 韓위안부 20명 직접 심문’ 1944년 日전범문서”, 뉴시스, 2014. 3. 17

이 기사가 미국의 버마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 49호 왜곡 번역 논란을 불러온 문제의 그 기사다. 뉴시스를 통해서는 현재 확인이 잘 되지 않는 상태다. 네이버 뉴스 링크로 대신한다. [6]

  •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일본 위키피디아 번역 (1) ~ (4), 《미디어워치》2018.5.7.~5.17 [7]
  •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 원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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