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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사죄와 배상 문제)

햇살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8월 21일 (수) 06:15 판 (아시아 여성 기금을 통한 일본 정부의 노력을 매도하고 흔들기)

목차

개념

위안부의 개념과 역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연관검색어를 참고하도록 한다.

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이승만 TV,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강연.

함께 보기 2: 이승만 TV, “여자 정신대” 강연.

함께 보기 3: 이승만 TV, “정대협, 위안부 문제 이렇게 키웠다” 강연.


(1) 이 문서는 이영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00~339쪽; 주익종,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 같은 책, 352~374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2.2.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한일 청구권 협정, 대일 민간 청구권, 대일 피해 배상 요구 (역사와 쟁점), 역사왜곡,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친일파 청산론,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김태규 판사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소신 발언, 정대협, 정의기억연대

1990년대 이후에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를 가리키게 될 때까지

위안부는 현재 ‘일본군 위안부’를 가리키는 협의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실제 사용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간의 성매매 여성을 가리키는 행정 용어로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군과 미군에도 위안부가 존재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군 위안부는 직업적으로 성을 파는 여성들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항목을 반드시 참고해야 하며,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 다음에 아래 설명을 보도록 한다.

‘위안부 =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 한일 청구권 협정의 실제 대상은?

1, 2, 6차 교육과정에 쓰인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일제 침략' 또는 '수탈' 등과 관련한 서술 부분. '정신대' 문제가 언급되더라도 노동과 관련한 부분에 국한되거나, 오늘날과 같은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오랫동안 없었다는 것을 확이할 수 있다. 1996년부터 적용된 6차 교육과정에서부터야 '위안부' 문제가 조금씩 거론된다.

만약 일본군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는 인식이 있었다면 해방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1952년부터 시작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협상의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13년 동안 끌어온 한일 회담에서 위안부 피해의 문제는 다루어진 바가 없다.

청구권 협정의 대상과 협상 과정에 대해서는 ‘한일 청구권 협정’과 ‘대일 피해 배상 요구 (역사와 쟁점)’ 항목을 반드시 참고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본질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것은 식민지배의 피해 배상이 아닌 명백한 민사상의 채권채무 관계를 처리하는 데 있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의 사례는 국제적으로 전무할 뿐 아니라,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일본과 함께 연합국에 무너진 패전국의 입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바로 이 점을 명백히 한 것이었고, 또 일본은 이 조약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요구해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일 8개항 요구’로 정리했다. 이후 장면 정부에서는 이 요구안을 토대로 실질적 협상에 들어갔고, 박정희 정부 역시 이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아 협상을 타결시켰던 것이다. 또한 정부는 청구권과 전체 청구 금액을 최대한 많이 주장하려고 하였다. 그 모든 과정에서 청구 금액의 산출 근거는 바로 민사상의 채권채무 관계에 있었다. 즉 오늘날 말하는 정신적 피해 배상 등의 추상적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앞서 지적한 샌프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한 일본 측의 주장대로 한다면 오히려 한국이 일본에 돌려주어야 할 금액이 더 클 수도 있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이미 미군정이 몰수한 재한 일본인의 재산을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타결된 청구권 협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청구권 금액을 일괄적으로 수령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개별 청구권자에 대한 보상금은 한국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1966년 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에 따르면 민간 청구권은 청구권 자금 중에서 보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법 제정이 늦춰져 실제 보상이 상당히 지체되고 말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먼저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를 받은 다음에 청구권자에게 보상을 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5년이 지난 1971년 1월 19일에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법(법률 제2287호)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제2조가 신고 대상의 범위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9건을 지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 8건은 일본은행권 등의 재산관계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 1건이 바로 인명과 관련한 것이었다.

제2조 (신고대상의 범위) ①이 법의 규정에 의한 신고대상의 범위는 1947년 8월 15일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일본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법인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제1호·제5호 및 제7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에 일본국 및 일본국민(법인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에 대하여 가졌던 청구권 등으로서 다음 각호에 게기하는 것(이하 "대일민간청구권"이라 한다)으로 한다. 다만, 대일민간청구권의 보유로 인한 일체의 과실(이 표를 포함한다)과 법인이 보유하는 청구권중 정부의 지분에 해당하는 것은 포함하지 아니한다.

(...중략...)

9. 일본국에 의하여 군인·군속 또는 노무자로 소집 또는 징용되어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사망한 자(이하 “피징용사망자”라 한다)

② 전항 제9호에 규정된 피징용사망자의 기준과 그 유족의 범위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이 법에 따라 1971년 5월 21일부터 이듬해 3월 20일까지 신고 접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재산 관계 131,033건, 인명 관계 11,787건 등 총 142,820건이 접수되었다.

이 결과는 법조문에서 규정한 신고대상자의 범위와 같았다. 인명관계 신고가 재산 관계 신고에 비하여 1/10 이하인 이유는 강제동원 피해자로서 ‘사망자’만을 신고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을 고려하였을 때, 만약 한국 정부가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았다면 분명히 피해 배상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또한 민간에서도 위안부를 식민 지배의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이는 ‘노무동원’ 문제에 있어서 모집이나 관알선을 포함한 피징용자들이 당시에 피해 사실에 대해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교과서와 언론을 통해 본, 민간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

위와 같은 위안부에 대한 인식은 정부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의 당사자들이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 시기의 교과서에도 위안부가 피해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1955~1962년까지 쓰인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1937년 이후와 태평양 전쟁 당시의 강제 노동 동원과 학도병 문제만 거론되어 있다.

1963년부터 시행된 2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일제의 착취는 (...중략...) 인적 자원의 수탈에도 미쳤다. (...중략...) 일제는 전선으로 우리 청년을 끌어내고, 산업 전선으로는 남녀의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1938년 조선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고, 마침내 징병제, 학병제를 시행하여 수다한 우리 청년과 학도들을 전선으로 끌어내었다. 또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위의 서술을 보면 ‘여자 정신대’는 일제의 노동력 착취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여성을 동원하여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은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보고된 바가 없다.

정신대는 노무동원의 예와 비슷하게,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이야기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여성을 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포되었다. 그 대상은 12~40세의 미혼여성이었고, 이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그 전해에 정신대를 조직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도 적고 민간의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원령을 발포한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조선에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선이라든가 관의 권유 등을 통하여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평양에 있는 군수공장이나 인천의 조병창에서 두어 달 근로한 사례는 있었다. 그 중의 일부가 일본 군수공장으로 간 사례도 있었는데, 총수는 약 2,000명 정도로 짐작된다.

이렇게 소수의 여성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공장에 투입되자, 민간에서는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지고 혼란이 확산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년층 가운데에는, 혼란과 두려움의 빠진 부모들이 빠진 부모들이 강제로 학교를 중퇴시키거나 결혼을 시켰다는 사실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후 미혼 여성에 대한 동원령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가, 1996년 이후 적용된 6차 교육과정의《고등학교 국사 (하)》에서부터 ‘정신대 = 위안부’라는 인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 우리 민족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각종 물자를 수탈당하였고, 우리의 청년들은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또 징병제와 징용령에 의해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 등지로 강제 동원되어 목숨을 잃었으며, 여자들까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위 인용문을 보면 남성은 강제 (노동) 동원의 대상이고, 여성은 위안부가 희생되는 경우가 있다는 식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교과서의 서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신문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45~1960년 사이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일본군 위안부 보도를 검색하면, 그 숫자는 단 한 건이다. 그것도 사실 일본인 여성이 일본군에 위안부로 강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는 네 종류의 신문에 대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한겨레》와 《매일경제》이다. 이 시기와는 관련이 없다.)

1965년 정창화 감독, 신영균 주연으로 개봉한 영화 <사르븬 강에 노을이 진다>의 포스터. 이 영화의 조연으로 일본군 위안부가 등장하는데, 그 이미지는 영화의 개봉 당시 일반인들의 뇌리에 박힌 미국인 위안부의 모습 그 자체다.

게다가 정부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 시기 성매매 여성들을 ‘위안부’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검색 결과로 나타난 신문 기사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미국군 위안부’, ‘군 위안부’와 같은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어, ‘위안부’들의 주된 상대가 누구이고 이에 대해 민간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 가능하다.

그 뒤 1960~1970년대에도 1년에 1건 이하 정도의 비율로 일본군 위안부 기사가 나온다. 그것도 1970년대까지는 ‘위안부’란 ‘미군 위안부’를 뜻했다.

이 시기 영화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조연급의 ‘위안부’는, 태평양 전쟁 말기의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그 이미지가 1960~70년대 당시의 미군 위안부에 다름 아니었다. 그 외에는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전형적인 여성의 이미지, 즉 민간 위안부의 고된 인생 여정을 그리는 정도였다. ‘정신대=위안부’와 같은 잘못 알려진 편견이 작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위안부 여성은 식민지 피해자로서의 위안부가 아니라, 가난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아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가련한 여인의 삶을 기본 서사로 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소재였을 뿐이다.

그 외에도 1980년대 일본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초점을 맞춘 오키나와에 남은 배 모 할머니라든가, 1984년 KBS 이상가족상봉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태국의 노 모 할머니의 경우 등도 참고할 만하다. 두 할머니 모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주선업자의 소개에 속거나 넘어가서 위안부 생활을 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들 보기에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당대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며, 또 실제로 이분들의 삶이 주목을 받은 것은 위안부 생활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그 분들의 기구한 삶 때문이었다. 또한 위안부 고백을 한 할머니들의 경우, 고백 이후 가족이나 친지들의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항목을 참고하도록 한다.

1990년대, 위안부 문제의 잘못 끼워진 첫 단추

해방 후 40년이 지나도록 잠잠하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앞서 살펴본 바대로, 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연구자, 교육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민간에서는 ‘정신대 = 위안부’라는 사실과는 어긋난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여자정신근로대(女子挺身勤勞隊, 약칭 ‘정신대’)’가 미미하게나마 시행되었던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퍼졌던 혼선이기도 했다.

정신대는 노무동원의 예와 비슷하게,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이야기한다. 참고로, ‘정신(挺身)’이란 어떤 일에 앞장서서 나아간다는 뜻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여성을 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포되었다. 그 대상은 12~40세의 미혼여성이었고, 이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그 전해에 정신대를 조직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도 적고 민간의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원령을 발포한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조선에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선이라든가 관의 권유 등을 통하여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평양에 있는 군수공장이나 인천의 조병창에서 두어 달 근로한 사례는 있었다. 그 중의 일부가 일본 군수공장으로 간 사례도 있었는데, 총수는 약 2,000명 정도로 짐작된다.

이렇게 소수의 여성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공장에 투입되자, 민간에서는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지고 혼란이 확산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년층 가운데에는, 혼란과 두려움의 빠진 부모들이 빠진 부모들이 강제로 학교를 중퇴시키거나 결혼을 시켰다는 사실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민간의 혼선과 혼란이 해방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일본군 위안부 자체를 공적으로 문제 삼거나 대일 민간 청구권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었다.


1983~1996년, 요시다 세이지가 ‘새로 만든 기억’으로 다시 태어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일본군 위안부에 새로운 ‘기억’이 덧붙여지면서 거짓에 기반한 일종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983년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일본에서 발표한 《나의 전쟁 범죄》에는, 그가 1943년에 부하 여섯 명과 더불어 제주도 성산포에 들어가 단추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16명을 끌고 갔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정대협은 1990년 출범 이전부터 '일본군 위안부 = 위안부', '정신대 = 위안부'라는 인식 아래 일본에서부터 파푸아뉴기니까지 답사하며 당시까지 생존하던 한국인 위안부들을 찾아나섰다. 이 답사기는 1990년 1월 《한겨레》 신문에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주도에서 무려 205명의 여인을 납치했다고 주장을 하였다. 남편이나 가족이 막으면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칼로 위협해서 물리쳤다고 한다. 이를 아사히(每日) 신문이 1980~1990년대에 약 16회에 걸쳐 보도하며 한국과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요시다의 책에 근거하여 1984년에는 MBC의 TV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1989년에는 《나는 조선 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의심을 샀다. 무엇보다도 제주도 현지에서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제주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요시다가 말한 문제의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을 전하고 있는데, 작은 마을에서 소녀를 열 명 넘게 잡아갔다면 그 자체로 큰 사건이고 충격일 텐데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민들은 요시다의 책에 대하여 일본인들의 얄팍한 상술이 빚어낸 일이라며 분개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996년 5월 일본의 《주간신조(슈칸신쵸, 週刊新潮)》와의 인터뷰에서, 요시다 세이지는 자신의 증언이 픽션임을 고백했다. 그 뒤 2000년에 요시다 세이지는 사망했는데, 그 후에 그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책이 모두 거짓이라고 밝혔다.

또한 2014년 8월 초 아사히신문은, 과거 요시다의 발언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32년 만에 관련 기사를 공식 취소했다. 심지어 아사히신문 구독자 등 482명은 “증언을 검증하지 않고 보도를 지속해 독자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했다”며 아사히신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이 소송에서 아사히 신문이 승소했다. 당시 일본 법원은 “특정 사람의 명예 및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또한 앞서 살핀 대로 위안부 성노예설을 주장하며 강제연행 문제를 추궁해온, 요시미 요시아키도 교수도 조선에서 관헌에 의한 노예사냥이 있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1997년에 밝힌 바 있다.

1988~1995년, 한국과 일본의 학계 및 시민단체 주도의 ‘성노예설’과 ‘강제연행설’ 대두

정대협의 시작

정대협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 결정적 계기인, 1991년 8월 14일 첫 번째 위안부 피해 증언자 김학순 씨의 증언. 정대협은 현재 정의기억연대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림은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서 소개된 단체 활동 연혁.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요시다 세이지는 결국 1992년에 한국의 언론사들을 상대로 자신이 어린 소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면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했다.

소녀들이 납치당했다던 제주도의《제주일보》와 같은 언론에서는 이 당시에도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증언 자체가 가져온 파장은 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참고로, 현재 《제주일보》의 논조는 이제는 거짓으로 밝혀진 요시다 세이지의 입장에 힘을 싣는 방향으로 변해 있다. 당시의 신문 기사는 검색 자체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이 결성된다.

이 단체의 주축 멤버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등 37개 여성단체였다.

단체 결성 2년 전인 1988년 2월 12일, 결성 주축 멤버인 윤정옥, 김신실, 김혜원 등 3인은 이른바 ‘정신대 조사단’을 구성하여 이듬해인 1989년 2월까지 일본 후쿠오카에서 오키나와, 규슈, 도쿄, 타이, 파푸아뉴기니까지 답사하였다. 1차 답사를 마친 1988년 4월 21일,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로 “여성과 관광문화” 국제 세미나(제주도 YMCA)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 조사 발표, 정신대 답사 보고, 정신대 문제를 다루고, 매춘문제에 대한 기독여성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는 10개국, 130명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발표의 강사는 윤정옥이었다.

또한 이 답사기는 1990년 1월, 《한겨레신문》에 네 차례(1월 4일, 12일, 19일, 24일)에 <이화여대 윤정옥교수 ‘정신대’ 원혼의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여기서 ‘원혼(冤魂)’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조선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전쟁 중에 강제로 위안부 사역을 하다가 패전 때에 학살되었다는 해석을 전면에 내놓게 된다. ‘군대 동원 처녀 사냥 예사... 물긷던 아낙 뭇매 연행도’라는 기사 제목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1991년 8월 16일 《조선일보》에 실린, 첫 번째 위안부 피해 증언자 김학순 씨 관련 기사와 사설. 보도와 사설 모두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하여 쓰고 있다. pdf 파일의 첫 장 왼편이 김학순 씨 증언 보도, 두 번째 장 왼쪽 아래가 관련 사설이다.

‘정대협’이라는 단체명에서부터 이미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기초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들의 각종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이들은 정대협을 조직하기 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강제 연행을 사실로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인하자, 정신대 피해자의 증언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1991년 8월 14일, 첫 번째 피해 증언자 김학순 씨의 기자 회견이 이루어졌다. 8월 16일자 《조선일보》의 기사는 ‘위안부’와 ‘정신대’의 개념이 혼란스럽게 섞여서 사용된다. 또한 적어도 기사 상으로 보면 김학순 씨가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다는 단계적인 추론을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김학순 씨의 증언에 이어, 1991년 12월에는 문옥주, 김복선 씨의 증언이 성사되었다. 이 중 문옥주 씨의 증언은 일본인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에게 구술한 회고록 형식으로 1996년에 출간된 바 있다. 한국어 번역본은 《버마전선일본군 ‘위안부’ 문옥주》(김정성 역, 아름다운사람들, 2005)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다 세이지의 방한 기자회견이 당시 한국과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위안부 피해 증언자들의 증언에 사회적 폭발력을 더해준 셈이었다. 일본인 위안부 사냥꾼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서로 비슷한 시기에 맞물렸고, ‘정신대 = 위안부’라는 인식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 위안부’라는 인식이 굳어져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과 세계를 향한 ‘실력행사’ 시작

수요집회의 시작

정대협은 1992년 1월 8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첫 번째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사진은 정대협의 후신인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 공개된 상태다.

1991년 8월 첫 위안부 피해자 증언이 나온 이후 약 2년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현재와 같은 위안부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정치적, 외교적 틀을 마련하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정대협은 1992년 1월 8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첫 번째 수요집회를 시작하였다.

이 집회는 2019년 8월 14일 1400회를 맞이하였는데, 바로 이 날은 1991년 첫 번째 위안부 피해 증언자인 김학순 씨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기도 하다. 또한 이 날은 정대협을 이은 정의기억연대에서 제7차 세계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집회는 세계 최장기 집회 기록도 세웠다.

일본 학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일본 정부에 사죄와 진상 조사 요구

일본 학자로부터 위안부의 ‘성노예설’ 문제가 불거지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 1월에는 일본 주오대(中央大)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가 기존까지 일본 정부가 견지했던 공식 입장과 정 반대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그는 일본 방위청(현 방위성) 방위연구 도서관에서 공문서 6점을 발견하였다. 이 문서는 일본 육군성과 중국 파견부대 사이에서 교환된 것으로, 1938년 3월 초에 육군성이 중국 전선의 부대에 위안부 모집업자를 선정하되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인물로 물색해 보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 또한 이 문서에는 그 전해 7월에 육군성이 각 부대에 위안소를 신속하게 설치하도록 지시한 첨부 문서가 덧붙어 있었다. 그 외에도 중국 전선의 한 부대가 위안소 개업을 보고하는 문서도 있었다.

이와 같은 공문서의 발견은,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과 운영에 깊게 관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대협은 일본 정부의 사죄 및 보상과 철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였다.


일본 정부의 역사적인 첫 번째 공식 사과와 진상 조사

1992년 1월 17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연설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과했다.[1]

저는 그 동안 한반도의 여러분이 우리나라의 행위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한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충심으로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 최근에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가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이는 매우 마음 아픈 일로서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에서는 이와 같은 사과가 지금까지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미야자와 총리의 연설 이후 일본 정부는 조사 작업을 진행하여, 같은 해(1992년) 7월 6일에 위안부 1차 조사 보고서를 냈다. 또한 당시 관방장관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는 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안소의 설치, 위안부의 모집 담당자에 대한 관리, 위안시설의 축조 · 증강, 위안소의 경영 · 감독, 위안소 · 위안부의 위생관리, 위안소 관계자에 대한 신분증명서 등의 발급 등에 대해서 정부의 관여가 있었다 (...중략...) 정부는 국적 및 출신지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을 겪은 모든 분들에 대해 다시금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신 분들에 대해 우리들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각 방면의 의견도 들으면서 성심껏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

이와 같은 사죄 및 배상 약속 이후, 일본 정부는 다시 그 해 12월부터 2차 조사를 실시, 1993년 8월 4일에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발표문을 통해, 일본 정부는 위안소의 설치와 경영, 관리뿐 아니라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한일 사이의 일본군 위안부 협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고노 담화 (전문)’다. 보고서는 pdf 문서 형태로 아시아여성기금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2]

이 보고서 및 고노 담화를 통한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죄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정대협의 반발과 위안부 문제의 ‘세계화’

라디카 쿠마라스와미가 UN 인권위원회에서 특별조사보고관으로 임명되어 한국과 일본, 북한에서 위안부를 찾고 증언을 들은 뒤 작성한 보고서. 제목은 "전쟁 중 군대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 및 일본 조사보고서"이다.

일본 정부의 진상 조사 결과와 고노 담화에 대하여 정대협은 즉각 반발하였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모집에 개입했다는 것만 확인했지, 모집의 강제성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이라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안부는 ‘공권력에 의해 폭력으로 강요된 성노예’이며, 위안소 운영이 전쟁범죄라는 것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정대협은 비슷한 뜻을 가진 일본 단체들과 협력하는 한편, 앞서 말한 요시미 요시아키 등의 일본인 학자, 연구자들과 함께 합동연구회를 만들어 조사 활동을 이어갔다. 더 나아가 이들은 아시아 피해국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연대회의를 조직하여 해마다 대회를 개최하였다. [1]

더 나아가, 정대협은 유엔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져갔다. 1992년 8월, 유엔 인권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현대형 노예제’임을 알리는 선전 활동을 이어갔다. 결국 1996년, 유엔 UN경제사회위원회 인권위원회는 여성폭력문제 특별보고관으로 임명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의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전쟁중 군대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 및 일본 조사 보고(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하겠지만, 이 보고서는 북한의 위안부 문제까지도 포함한다.

당시 쿠마라스와미 특별보고관은 한국과 일본을 직접 방문하였고, 북한은 인권센터(Center for Human Rights)가 대리 방문해 모두 16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다.

이 보고서는 일본 정부를 향하여, 법적 책임 수용 · 피해자 개개인에 배상 지불 · 관련 문서 및 자료의 완전한 공개 · 피해자 개개인에 서면에 의한 공적인 사죄 · 교육 내용 수정 · 범행자 처벌을 권고했다. 쿠마라스와미의 보고서는 1998년과 2001년에도 나온 바 있으며, 그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성고문과 중국의 북한여성 인신매매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1998년 6월에는 제50차 유엔 인권위원회 소위원회는 게이 맥두걸(Gay Mcduall)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를 내고, 이 보고서를 토대로 한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보고서의 제목은 《전시하 조직적 강간,성노예제 및 유사 성노예 관행에 관한 최종 보고서》이다.

유엔 인권위 소위원회 특별조사관 맥두걸의 1998년 보고서. 제목은 "systemic rape, sexual slave and slavery-like practices during armed conflict"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군과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강간임을 규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1990년 중후반에는 국제 사회에서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바로 유고 연방이 해체, 재편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이 일어났는데 세르비아계 병사들이 보스니아계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는 등, ‘인종청소’라고 불릴 정도의 살상과 강간, 강제 임신 문제가 국제적 이슈였다. 그 당시 이러한 국제적 여론에 힘입어 일본군 위안소도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자 전쟁범죄로 간주되었다.

이외에도 정대협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에도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요청하였다.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 중 강제노동에 해당된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그리하여 1996년 ILO의 전문가 위원회의 보고서 즉 “ILO 협약 및 권고 적용 전문가 위원회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매해 이어져 2013년까지 발표된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과 일본 정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김영삼 정부의 자체 해결 노력

1993년 발표된 고노 담화 (전문)에 대하여, 당시 한국 정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분위기였다. 일본의 총리가 대한민국 국회에서 최초로 연설하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죄의 뜻을 비추었고, 이후 일본 정부가 자체 진상 조사에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당시까지는 1965년 타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과거사와 관련한 일체의 청구권이 정리되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새롭게 대일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우리 스스로 원 위안부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1993년 6월 11일, “일제하일본군위안부에대한생활안정지원법(약칭: 위안부피해자법 , 법률 제4565호)”가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당시까지 생존한 위안부 신고자 121명에게 그 해 8월부터 생활안정금 500만 원과 생활지원금 매달 14만 원, 영구임대주택 선입주권 등을 제공했다.


일본의 실질적 보상과 지원 노력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 홈페이지에 게대된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인사말. 이 기금은 사실상 정부출연기관이었지만, 여성단체 등의 강한 반발로 결국 위안부 피해자들이 위로금 신청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영삼 정부 역시 처음 약속과는 달리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결국 이 기금은 2002년에 한국 내 위로금 지급을 끝냈다. 2007년에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그간의 성과와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진 각종 보고 등을 공개하는 페이지를 개설하였다.

아시아 여성 기금을 통한 일본 정부의 배상 노력

일본 정부도 한일 청구권 협정 등에서 합의한 내용을 토대로, 법적 배상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의 차원에서 위로금 지급을 결정하였다. 이는 미야자와 총리의 대한민국 국회 연설이나 가토 관방장관의 발표문 등을 통하여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에 대해서는 1993년 11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일본 총리가 방한하면서 한국과 일본 간에 양해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50주년 종전 기념 행사에서 당시 일본 총리였던 사회당 연립정권의 무라야마 도이치(林山富市)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소위 ‘무라야마 담화 (전문)’으로 알려진 이 담화문에서,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일본 정부 차원의 사죄가 이루어졌다.

바로 뒤이어 일본 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 약칭 ‘아시아 여성 기금’ 또는 ‘국민기금’)을 조성하였다.

이 기금은 재단법인의 형식으로 운영되었는데, 1995년부터 2007년 3월까지 활동하였다. 이때의 이사장이 바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이다.

기금의 운용 방식은 이러하였다. 일본 기업과 국민에게서 모금한 돈으로 재단법인을 조직하여, 1997년 1월 7명에게 각자 200만 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가 정부 자금으로 의료비를 지급하고, 재단 운영비도 지급하였다. 원 위안부들에게 순차적으로 일시금을 지급하여 기금을 청산한다는 것이 주요 활동 목적이었다.

2007년 3월에 해산한 이 재단의 안내에 따르면 총 364명의 위안부 생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다. 이는 추정 생존 위안부 700여 명 가운데 절반에 이르는 숫자였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국내의 상당수 위안부 생존자가 이 위로금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재단 운영과 기금 등 총 비용은 46억 25백만 엔으로, 민간 모금액은 총 5억 7천만 엔이었다. 즉 비용의 90%를 일본 정부가 낸 것이었다.

이는 형식상 관민합작에 의한 위로금 지급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정부출연기금이었던 것이다. 즉 일본 정부가 비록 한일 협정으로 인해 법적 배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상 일본 정부가 비용의 거의 대부분을 출연함으로써 정부 차원의 사죄와 배상을 달성하고자 한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하여, 박원순 변호사와 정대협 등의 시민단체가 발표한 입장문. 이들의 강한 반발은, 계속되는 일본 총리 등의 사죄에도 끊이지 않았다. 이 입장문은 '성평등아카이브'에서 검색 및 내려받기가 가능하며, 기증자는 박원순으로 되어 있다.

아시아 여성 기금을 통한 일본 정부의 노력을 매도하고 흔들기

정대협은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 발표 이후에 조성된 아시아 여성 기금의 배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이었으므로, 민간 모금을 통한 위로금 지급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정대협은 국민기금이 위안부 피해자들 사이뿐 아니라 피해자들과 정대협 사이를 분열시킨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기금의 위로금을 공개적으로 받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 기금의 90%가 일본 정부가 낸 것으로서 실질적인 정부출연기금이었다. 아시아 여성 기금은 기금을 수령한 원 위안부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대협을 비롯한 각종 시민단체 등의 반대가 거세지자 1998년 사업을 중단하였고, 2002년에 한국 내의 위로금 지급이 종결되었다.

여기서 김영삼 정부의 입장이 처음과 달라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대협 등이 주도하여 조성한 여론에 떠밀려, 김영삼 정부가 나서서 일본의 기금 지급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한국의 외무부는 1997년 1월에 이루어진 첫 위로금 지급에 대해서 ‘심히 유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김영삼 정부는 일본의 기금 이상으로 개별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 뒤를 이은 김대중 정부는 위안부 신고자들 186명에게 각자 3,800만 원씩을 지급했다. 이 가운데 정부 자금이 3,150만 원이었고 정대협의 모금액이 650만 원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기금을 받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한국 정부의 위로금을 지급하지 않기고 했다. 사실상 한국 정부가 나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위로금 수령을 막은 셈이었다.

문재인 정권의 박근혜 정부 지우기에 위안부 문제가 활용

2006년 원 위안부들이 헌법소원을 냈다.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의 배상 청구권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은 것이 기본권 침해라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5년 뒤인 2011년(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확인” 판결을 내렸다. 쉽게 말하면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의 배상청구권과 관련하여 한일 간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 판결 직후에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협상을 거쳐 2015년 말에 정상회담을 가진 후, 양국의 외교장관 명의로 위안부 문제의 합의안을 내놓았다.

당시 발표된 한국과 일본의 입장은 이러하였다. 아래 내용은 ‘화해치유재단’에도 공개되어 있다.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 발표 내용 중 일본측 표명사항>

일·한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양국 국장급 협의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협의해 왔음. 그 결과에 기초하여 일본정부로서 이하를 표명함.

①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정부는 책임을 통감함.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함.

②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 왔으며, 그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이번에 일본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前 위안부 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함.

구체적으로는, 한국정부가 前 위안부 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정부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 일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前 위안부 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함.

③ 일본정부는 상기를 표명함과 함께 이상 말씀드린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 또한,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함.

또한 앞서 말씀드린 예산 조치에 대해서는 대략 10억 엔 정도를 상정하고 있음. 이상 말씀드린 것은 일·한 양 정상의 지시에 따라 협의를 진행해온 결과이며, 이로 인해 일·한 관계가 신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 발표 내용 중 한국측 표명사항

한·일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양국 국장급협의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협의를 해 왔다. 그 결과에 기초하여 한국정부로서 아래를 표명한다.

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표명과 이번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조치를 평가하고, 일본 정부가 앞서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한다.

②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③ 한국 정부는 이번에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가 착실히 실시된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

당시 이 합의에 대하여 정대협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2016년 ‘화해치유재단’을 설립, 피해자 개인별로 위로금 지급에 나섰다. 이 때 일본은 정부 예산으로 위로금을 지급하였다. 즉 이로써 일본 정부는 스스로 자기 책임을 다시 한 번 인정한 셈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위안부 피해자와 그 유족이 한 사람당 1억 원의 위로금을 지급받았다. 참고로, 재단에서 공개한 생활안정 및 특별지원금 지원 현황을 보면, 1998년 5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규등록 시 지원되는 특별지원금(일시금)이 5백만 원에서 4천 3백만 원으로 인상되었고, 인상 이전에 지급받은 피해생존자는 차액을 지급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대협 등의 시민 단체의 반발은 계속 이어졌다. 바로 이 때 발족한 단체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약칭 정의기억재단)’이었다. 400여 개의 단체와 시민이 모은 10억 여 원의 기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 재단이 2016년 무렵부터 ‘평화의 소녀상’을 연쇄적으로 건립하고 홍보 활동을 이어온 것이다.

2019년 현재도 이 재단을 통해 각종 지원금과 위로금이 지급되고 있지만, 사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맺은 합의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그 합의를 정식 폐기한 뒤 2018년 말에 해산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위안부 관련 여성, 시민단체의 주요 활동

위에서 계속 설명한, 정대협의 활동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다양하게 계속되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에도 국제적인 단체들과 연계한 각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몇 가지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보도록 하자.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2000年日本軍性奴隸戰犯女性國際法廷)

정대협은 해외의 인권단체들과 함께 2000년 12월에 일본 도쿄에서 위안부 국제전범 모의재판을 열었다. 이는 일본군 성노예제와 관련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열린 민간차원의 국제인권법정으로서, ‘2000년법정’, 또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라고도 한다.

이 법정은 1998년 4월 한국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연대회의의 결정으로 추진된 것으로, 당시 이 회의에는 한국 외에도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이 참가하였으며, 이후 북한과 중국, 동티모르 등도 참가하였다. 또한 정대협에서 같은 해 12월 7일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 한국위원회’를 발족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이다.

한편 앞서 설명했듯1996~1998년 정대협의 공격적인 활동으로 UN 인권위원회는 특별보고관을 임명하여,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하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인종청소’와 같은 전시하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까지도 맞물리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 운동의 중요 주제로 부상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만들어진 국제형사재판소에서도 처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국제전범재판 법정은 이 문제에 대해 세계적인 법률가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법정과 같이 헌장을 만들고 법정의 형태를 취하여 진상을 다루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인 전범재판은 특정 개인을 상대로 사실과 법리를 논한다. 이에 비하여 이 모의법정은 개인책임과 국가책임을 함께 다루었다. 또한 히로히토(昭和) 천황에게 강간과 성노예 범죄에 대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고, 일본정부에게 국가책임이 있다는 일차 판결을 하였다.

다음 해인 2001년 12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최종 판결이 이루어졌다. 즉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아시아 각지에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행한 강간과 성노예제, 인신매매, 고문 등의 전쟁 범죄가 히로히토 천황을 비롯하여 그들이 세운 10명의 피고인 및 일본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미 하원과 유럽 의회, 아시아의 결의안 채택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 게시된, 미국 하원에서 채택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영문본.

정대협의 전 세계적인 활동은 2007년에 미국 하원과 유럽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내도록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미국 하원은 2007년 7월에 채택한 결의안에서, 일본군이 위안부에게 성노예(sex slave)를 강제하였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할 것, 그리고 관련 사실을 일본 내외에서 교육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런데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처음으로 발의한 것은 1997년 윌리엄 리핀스키(William Lipinski) 당시 하원의원에 의해서였다. 그 뒤 레인 에반스(Lane Allen Evans, 1951~2014) 하원의원 등이 6차례에 걸쳐 발의하였는데, 이 때는 일본 정부도 결의안을 막기 위하여 전방위 로비를 펼쳐 채택되지 못했다.

그 뒤 2007년 마이크 혼다(Michael Makoto Honda) 의원의 주도로 의회에 발의된 결의안(Hous Resolution 121)이 그 해 7월 30일 미국 하원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이다. 이 때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미 하원에서 열린 청문회에 직접 참석하여 증언을 하였고, 미국 내의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청원활동이 영향을 끼쳤다.

미 하원이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각국 정부 차원의 결의안 채택에도 큰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2007년 11월 8일에는 네덜란드 의회에서도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열흘 뒤인 11월 18일 캐나다 의회와 12월 12일 유럽연합 의회에서도 결의가 채택되었다.

유럽에서의 결의안 채택을 앞두고, 정대협 등의 시민단체들은 국제 앰네스티와 함께 한국, 대만, 네덜란드 피해자를 동행하여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을 순회하는 증언집회를 열었다. 유럽의회 청문회에서도 의원들을 대상으로 참여를 호소했다.

다음해인 2008년 10월 27일, 대한민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고, 대만 역시 11월 11일에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문제의 ‘소녀상’ 건립과 각종 ‘위안부 기림’ 사업들

정의기억연대의 핵심 활동 중 하나는, 국내외에 위안부 소녀상을 건립하는 것이다. 사진은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소녀상 각 부분에 담긴 의미를 캡처하였다.

일본 정부를 향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여론을 가장 크게 환기시킨 사건은 단연 ‘소녀상’ 건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정대협은 2011년 12월 수요집회 1천 회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일본 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웠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이를 구청 소관 사항이라는 이유로 묵인하였다.

2016년 8월에는 서울시에서 남산에 있는 통감관저 터를 ‘위안부 기림터’로 조성한다. 이 곳은 일제의 통감 및 총독 관저가 있었던 곳이었다는 점에서 이 활동의 정치적 목적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위안부 소녀상은 2016년 말에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도 세워졌고, 현재는 ‘강제 징용 노동자상’도 그 곁에 세워졌다.

이외에도 홍대 앞에 소녀상을 세우려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위안부 소녀상은 정의기억연대의 설명에 따르면 ‘평화비’ 또는 ‘평화의 소녀상’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 단체에서 소개하는 소녀상 건립 지역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위안부 소녀상 건립 장소

(1) 국내

- 강북구청 앞 소나무길 - 거제문화예술회관 소공원 - 경기도의회 청사 입구 - 고창문화의전당 - 광주 북구청 광장 앞, 서구청 앞, 광주시청 앞 - 구로역 북부광장 - 마포중앙도서관 - 부산 일본총영사관 후문 앞 - 용인시청 광장 -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앞

(2) 해외 - 대만 국민당 타이난지부 부지 - 독일 레겐스부르크 인근 공원 - 미국 뉴욕주 아이젠하워공원 - 미국 뉴저지주 클리프사이드 공원 옆 -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메리 스퀘어 공원 - 일본 오사카 노자키 - 일본 오키나와 현 도카시키 섬 - 호주 시드니 애쉬필드 교회 내

계속되는 위안부 소송

2016년 박근혜정부에서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고 피해자 개인에 대한 위로금 지급에 들어갔을 무렵인 2016년 12월, 위안부와 유족 20인이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이에 대하여 일본정부가 “국가는 타국 법원에서 동의 없이 소송의 피고가 되지 않는다”는 국제법상 주권면제 원칙에 입각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국제법상 주권면제 원칙’이란 국가가 외국의 재판소에 원고로서 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강제로 피고가 될 수 없는 원칙이다. 국제법상 국가와 국가의 재산이 외국의 재판관할권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2019년 5월, 대한민국 법원은 해당 서류를 법원에 게시하여 공시송달 효과를 갖추었다는 이유로 소송의 심리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법원이 일본 정부에 배상 명령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커졌다.


정의기억연대의 구성과 활동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된 용어가 바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과 ‘정의기억연대’일 것이다. 전자의 단체명 자체가 ‘정신대=위안부’라는 객관적 사실조차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비교적 최근까지 사용되었다는 점도 이 문서를 읽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간단히 이 두 단체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어 중복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설명하도록 한다.

먼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등 37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단체였다.

또한 ‘정의기억재단’의 정식 명칭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으로서, 단체의 설명으로는 2015년 박근혜 정부 때에 이루어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발하여 400여개 단체와 시민들이 10억여 원의 기금을 모아 발족하였다고 한다.

이 두 단체가 2018년 7월 중순에 통합하여 단일 법인이 되었다. 그 명칭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약칭 ‘정의연’)로 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정대협의 상임대표인 정미향을 선출하였다.


이 단체의 핵심 활동인 수요집회는 세계 최장기 집회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집회는 1992년 1월 8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되었다. 2019년 8월 14일(수)는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날이었다. 먼저 첫 번째 위안부 피해 증언자인 김학순 씨가 27년 전인 1991년 이날 기자회견을 하였으며, 수요집회가 1400회를 맞는 날이었다.

이 집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음의 7가지라고 홈페이지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나. 전쟁범죄 인정

둘. 진상규명

셋. 공식사죄

넷. 법적배상

다섯. 전범자 처벌

여섯. 역사교과서에 기록

일곱.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참고 자료

  • 이영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00~339쪽
  • 주익종, “주익종, “한일 관계 파탄 나도록”, 같은 책, 352~374쪽.
  •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3]
  • 김동호 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위 원문에 대한 번역), 《미디어워치》2016. 6. 30 [4]
  • 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인터넷 박물관) [5]
  • 재단법인 화해 · 치유재단[6]
  •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7]

-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서 유엔 인권위원회의 보고서나 미국 의회의 결의안 등 중요한 관련 문서의 원문과 한국어 번역을 확인할 수 있다.

  •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 [8]
  • 성평등아카이브 [9]
  • 한국교회여성연합회 [10]
  • 위안부문제와아시아여성기금 디지털 기념관 [11]

이 단체는 2007년 해산되었으나, 그간의 활동을 기념하여 각종 자료를 공개하는 페이지를 개설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자료는 다음과 같다.

-《정부조사 <종군위안부> 관계자료집성》(전 5권) - 고노 담화 등 일본 정부와 아시아여성기금의 주요 담화 및 보고 문서(약 30여 종)

- 유엔 등 국제 기관의 심의과 관련한 각종 보고서

  • Gay J. McDougall, “전시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유사 성노예 관행에 관한 최종보고서(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like practices during armed conflict)”, UNITED NATIONS Economic and Social Council, 1998. 6. 22.
  • Radhika Coomaraswamy, “전쟁 중 군대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 및 일본 조사보고서(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UNITED NATIONS Economic and Social Council, 1996. 1. 4.
  • “Individual Observation concerning Convention No. 29, Forced Labour, 1930 Japan(ratification: 1932)”, 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1996
  • “Congressional Report Services Memorandum, " Japanese Military's Comfort Women"”, U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CRS), 2006, 4. 10.
  • “정신대 존재 내가 증명합니다”, 《조선일보》, 1991. 8. 16
  • “국내 최초의 정신대 증인”, 《조선일보》, 1991. 8. 16
  • “미야자와총리 국회연설”, KBS NEWS, 1992. 1. 17 [12]
  •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일본군위안부’”,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13]

- 이 페이지에서는 ‘정신대’ 관련 기록물을 볼 수 있다.

  • 박유하, 《화해를 위해서: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뿌리와이파리, 2015
  •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미디어워치》, 2018.4.14. [14]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위안부)” [15]
  • “‘미군 韓위안부 20명 직접 심문’ 1944년 日전범문서”, 뉴시스, 2014. 3. 17

이 기사가 미국의 버마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 49호 왜곡 번역 논란을 불러온 문제의 그 기사다. 뉴시스를 통해서는 현재 확인이 잘 되지 않는 상태다. 네이버 뉴스 링크로 대신한다. [16]

  •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일본 위키피디아 번역 (1) ~ (4), 《미디어워치》2018.5.7.~5.17 [17]
  •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 원문 [18]

각주

  1. 2019년 6월에도 정의기억연대는 일본 와세다대학의 도야마 캠퍼스에서 ‘희망씨앗기금 2주년 행사’를 개최하여 요시미 요시아키 등과 함께 199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일본군 위안부 관련 활동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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