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1865년 ~ 1945년)는 조선 말과 대한제국의 구국 계몽운동가, 기독교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이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소극적으로 가입한 일로 아버지 윤웅렬은 유배되고, 그는 청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미국 에모리대학 등을 졸업했다. 1896년부터 서재필과 함께 만민공동회독립협회를 이끌었으며, 서재필의 출국후 독립신문의 2대 사장이었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였으며, 신민회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한일합방 후, 1911년 102인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가석방되었다. 독립운동 단체에서 영입을 시도했으나 거절했고, 3.1 운동 참여를 거절하였으며 송진우, 신익희 등의 설득을 거부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여러번 영입을 시도했으나 거절했다.

1930년대의 흥업구락부사건, 수양동우회사건, 청구구락부사건 당시 관련자들의 신원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가석방을 도왔으며, 이후 조선총독부의 일부 요청에 협력, 그의 명의로 된 기고문들이 올라왔다. 1945년 4월 일본 귀족원의 조선인 칙선의원으로 임명되었고, 광복 직후 일부세력의 비판을 받았다. 그해 12월 뇌일혈로 사망했다.

참고

  • 윤치호 일기

기타

그는 1883년부터 60년간 매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이 중 1910년부터 2년치 분량은 102인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총독부 경찰에 압수되었다 하고, 1941년 이후의 일기는 행방을 알수없다. 6.25 전쟁 때 윤치호의 아들 윤영선과, 미국에 있던 다른 아들 윤정선 등이 일기를 나눠 보관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자 윤영선은 일기들을 미국에 있던 형제들에게로 보내, 일기의 상당수가 후대에 전하게 됐다.

윤치호의 일기는 1970년대부터 번역되었으며, 필기체와 일부 어휘는 쉽게 번역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는 초기의 일기는 한자로, 나중에는 영어로 일기를 써,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 및 종손녀 윤경남 등의 번역본 등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