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02.13 ~ 2005.07.27)
이반 코발렌코의 저서 : 대일공작의 회상(対日工作の回想), 文藝春秋, 1996.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валенко, Ivan Ivanovich Kovalenko, 1919.02.13 ~ 2005.07.27)는 소련의 군인, 정치인이다.

생애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валенко 1919 년 2 월 13 일 - 2005 년 7 월 27 일)는 군인 출신의 소련과 러시아 정치인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에서 태어났다. 1935년에 국립 극동종합대학 동양학부 (졸업 직전에 국립 극동대학에 통합 재편)에 입학, 일본 연구에 종사하기 시작했고, 졸업 후 곧바로 군대에 들어가 노몬 한 사건의 심리 작전에 관여한다. 1940년에 결혼하고 정치부 장교 요원으로 모스크바 고등교습소에서 심리전 특별 공작대 결성을 위한 연수를 수강한다. 그후에 대 독일 전선에 파견되었다가, 1943년에 극동방면군 정치 지도자 본부에 파견된다.[1]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전 당시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Aleksandr Vasilevsky, 1895–1977) 원수의 부관(副官)으로 일본어 통역을 맡았다. 종전후에는 오바 사부로(大場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간행하는 <일본신문>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2]

그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이 되었으며, 일본 전문가였다. 대일 외교 강경파로 알려졌으며[3] '회색의 추기경(「灰色の枢機卿」)"이라 불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당시 국교가 없던 소련이 참가하는 문제에도 간여하였다.[4]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으로 있을 당시 그는 극동군 총사령부 최고위층과, 모스크바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88여단진지첸 (김일성)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선정하는 과정을 직접 보고 들었으며, 후일 이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극동지역의 소련군에 근무하면서 88여단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당시 김일성을 만난 적도 있었는데,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 김일성을 극구 칭찬하더라고 했다. 해방 후에도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적도 있으며 김일성과 여러 번 만나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990년 9월 30일 한소수교[5] 후 한국인으로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한 사람은 김국후 당시 중앙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며,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코발렌코의 증언은 아래 책에 자세히 나온다.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사, 1992년, 1993년) 하권 pp.202 ~ 212.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71 ~ 76.

1945년 9월 초 스탈린의 김일성 지도자 발탁에 대한 증언

스탈린은 1945년 9월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지도자로 낙점하였다.[6][7][8]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고 한다.[7] 당시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이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2005)는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6]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부관 이반 이바노비치 코바렌코씨의 증언

코바렌코씨에 따르면 극동군 총사령부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 후보로 추천한 이유는 그가 3년여 동안 소련 군대에서 정치 ·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나다고 판단됐으며, 30년대 중국과 만주 국경 지대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활동을 했을 뿐 조선공산당 등 종파 투쟁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바렌코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있는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켜 놓고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불러온 후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모스크바로 안내토록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직행, 그곳에서 한참동안 대기하다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받은 것이지요. 스탈린은 극동군과 KGB 극동본부에서 올린 김일성에 대한 평정서를 검토한 후 평정서 내용대로 조목조목 질문을 하더라는 겁니다. 간단한 식사를 곁들인 이 면접은 4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소련군 대위 견장을 단 김일성은 자리가 자리인만큼 너무 긴장해 "예" "예" 만 연발할 뿐 한마디도 못했다고 훗날 중앙당에서 이 자리에 배석했던 고위 간부에게 들었습니다. "
코바렌코씨는 "김일성을 면접한 스탈린은 배석했던 군 고위 책임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 북한 정권의 주역이 결정됐다"고 회고 했다.

[주] 1945년에 스탈린을 면담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는 9월초에 김일성을 면담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코발렌코에 의하면 스탈린이 김일성을 면담한 장소가 크렘린궁의 집무실이 아닌 개인 별장이었다고 하므로 비공식적, 비공개의 면담이라 기록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탈린 같은 사람이 먼 극동 변방 부대의 말단 대위를 만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비공식적이고 비공개인 별장 면담으로 되었을 것이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 원수도 스탈린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하기 전에는 말단 대위 김일성을 만나보지 않았다고 하므로 스탈린과는 더 격에 맞지 않은 면담이었다. 코발렌코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바실렙스키 원수를 찾아 잠간 인사를 했는데 모스크바로부터 결과를 미리 통보받은 바실렙스키는 김일성과 악수 정도 나누고 소련군 상관들의 지시를 잘 따르라고 간단히 말했다고 증언한다. 코발렌코는 또한 1946년 7월 김일성과 박헌영의 스탈린 면담에 대해서도 증언했는데, 이는 소련기록으로도 확인이 되므로 그의 1차 면담에 대한 증언도 사실일 것이다. 김일성이 입북하기 전에 이미 지도자로 결정되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는 많고, 코발렌코가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할 이유도 없으므로 비록 스탈린의 김일성 면담 기록이 없더라도 위 증언은 사실로 볼 수 있다. 그는 바실렙스키 원수의 전속부관(專屬副官, Adjutant)으로 원수의 동정과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대리인으로 집권

위에서 본 코발렌코의 증언대로 해방 후 북한 지역에 아무 기반도 없던 김일성이 집권하고, 88여단 출신 동료 빨치산들이 권력 핵심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이 소련의 이익을 대변할 대리인으로 김일성을 내세워 그들에게 최고 권력을 쥐어주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북한이나 남한 좌파들이 주장하는대로 항일 투쟁 경력 때문에 집권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 88여단에서 소련이 시키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 소련의 대변자 노릇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선택된 것이다. 국내에 전혀 기반이 없던 그는 무명인사에 불과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며 항일영웅 행세를 하여 가짜라는 꼬리표까지 달게 된다.

스탈린이 1945년 9월초 김일성에 대한 면접 시험을 보고 그를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것은 이미 당시에 한반도를 분단하여 북한지역에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46년 7월 초 스탈린의 김일성과 박헌영 면접시험에 대한 증언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선임된 데 대해 불만을 가진 박헌영 측이 소련에 집요한 이의를 제기하자,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순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본다. 하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최고 지도자로 정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9][10][11][12][13][14] 처음부터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이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2005)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함께 스탈린에게 불려가서 면접시험을 보는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15][16]

당시 소련 극동군 사령부 부관이었던 코바넨코는 “김일성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박헌영이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6년 5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만을 폭발했다”고 밝히면서 “이 편지는 의외의 효력을 발휘해 박헌영이 처음으로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을 면담하는 기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사령관 부관이었던 코바넨코의 자세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1946년 5월 KGB 극동본부에서 박헌영이 보낸 편지를 가지고 사령관을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극동권 총사령부가 해체되고 극동군구로 바뀌어 사령관 역시 마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1898-1967) 원수로 교체되었습니다. 소련어로 된 장문의 편지는 일제때 지하에서 항일투쟁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고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사들만 앞세우는 등 독재가 많았으며, 중앙당을 무시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남한 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 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나(박헌영)를 추종하는 당원들을 배제하면서 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등 김일성을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이 편지는 소련군정 지도부가 당 총책임자인 자신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김일성에게만 적극 협력하고 있어 당의 권위가 추락해 혁명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등 소련군정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령관은 한참동안 심사숙고 끝에 최종 판단은 스탈린 대원수께서 내릴 수 있도록 모스크바 당중앙에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KGB에서 보낸 이 편지를 놓고 중앙당에서도 한 때 고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박헌영의 편지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지요. 스탈린은 이 편지를 읽고 박헌영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근거가 있다고 보이니 평양의 25군과 김일성 진영에 지시하여 즉시 시정토록 하라고 KGB 본부에 강력히 지시했습니다. 스탈린의 지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부에서 강력히 주장했던 ‘박헌영지도자론’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박과 김을 내가 직접 만나 볼테니 그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라”는 의외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러시아어로 쓰인 박헌영의 편지는 당시 서울 주재 쏘련 총영사관 부영사 샤브신(KGB 소속)을 통해 하바로브스크의 KGB 극동본부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코발렌코가 말하는 말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1898-1967) 원수는 당시 트랜스바이칼-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으로 북한과는 별 관계가 없었으므로, 연해주 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를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메레츠코프가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스탈린과의 면담 자리에는 김일성, 박헌영 외에, 평양 소련군정 인물들인 스티코프, 로마넨코, 샤브신 등도 동석했다고 한다.[17]

김일성은 생전에 황장엽(黃長燁)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했다고 한다.[18]

[주] 1946년에 스탈린을 면담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9월초의 면담 때는 김일성이 일개 소련군 대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달리 1946년 면담 때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고, 박헌영도 조선공산당 당수로 상당한 직함을 가진데다, 스티코프 상장, 로마넨코 소장 등 소련군 장성들도 배석했으며, 장소도 크렘린궁으로 공식적인 면담이었다. 따라서 이 면담은 기록에 나올 것이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나눈 대화록에도 김일성과 박헌영이 이전에 스탈린과 만났다는 말이 나오므로[9] 이 면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저서

함께 보기

각주

  1. イワン・コワレンコ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валенко, 1919年2月13日 - 2005年7月27日) - 일본어 Wikipedia
  2. 김효순,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서해문집, 2009)
  3. Ivan Kovalenko : Deputy Chief of the Central Committee's International Department
  4. 88올림픽 南北(남북) 분산개최 蘇(소)서 긍정적 반응 1984.12.07 경향신문 3면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 코마렌코,...
  5. 한소수교(韓蘇修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6. 6.0 6.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7. 7.0 7.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8.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 pp.122~125.
  9. 9.0 9.1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ung : March 05, 1949 Wilson Center
    Cde. Stalin remembers that the last time two came to Moscow, and asks, appealing to Pak Heon-yeong, if he was the second. Pak Heon-yeong confirms this. Cde. Stalin says that Kim and Pak have both filled out and that it is difficult to recognize them now.
    김일성과 박헌영의 1949년 3월 방소 당시 스탈린 본인이 두 사람을 이전(1946년 7월)에도 만난 적이 있다고 확인해 준 셈이다.
  10. 1946년 김일성의 소련 첫 방문/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서울신문 2019.05.14.
  11. 김일성이냐 박헌영이냐/레베데프 당시 정치사령관 첫 증언 중앙일보 1991.11.30종합 1면
    스탈린/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 암시/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 중앙일보 1991.11.30 종합 3면
  12.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9) 박헌영-김일성 4차 회동(3) 중앙일보 1992.01.06 종합 11면
  13.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235~237;
  14.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p.70 : 김일성과 박헌영의 4차 회동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때 박헌영과 김일성에 대한 스탈린의 면접 시험이 있었다.
  15.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2년) pp. 210~212
  16.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 pp.126~127
  17.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18.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거쳐 수괴로 임명된 김일성 조선 Pub 201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