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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의 조선지배 당시 북로군정서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청산리대첩에도 참전한 바 있다. 해방 후 조선민족청년단을 설립하고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생애

8.15 해방 직후 입국 시도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이범석은 중국 서안에서 비행기를 타고 8월 18일 서울 여의도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을 시도했으나 일본측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가야 했다.

8월 16일 곤명(昆明)으로부터 ‘언제 진입하게 될는지 아직 유동적이니 일단 서안 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미국측 통고를 접한 우리 광복군 정진(挺進) 대원들은 다시 비행장으로 달려가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미군측은 인원을 두 사람 줄이고 무기 탄약을 제외한 모든 휴대품은 탑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영공(領空)이 아직 위험하여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가능한 한 기체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정진군 선발대는 이범석(李範奭) 장군과 김준엽(金俊燁)·노능서(魯能瑞)[1]·장준하(張俊河) 등 4명으로 결정을 보았으며 미국측도 인원을 줄여 전원 22명으로 다시 조정되었다.
18일 새벽 3시 30분경, 정진군을 실은 항공기는 다시 서안 비행장을 이륙하여 일로 기수를 동쪽으로 향해 전진하였다. 황해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자 이범석 장군은 붉어진 눈에 몇번인가 손수건을 가져다 대기도 하였다.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에 지금 해방된 땅을 밟게 되는 감격에 어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범석 장군은 다음과 같은 즉흥시(卽興詩)를 읊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砲火)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 몸 찢기워도
찢긴 몸 이 연안(沿岸)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하지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 테니…….

비행기가 황해를 건너는 동안, 매 5분마다 일본의 조선군 사령부에게 ‘미국 군사 사절단 한국 진입 중’이라고 타전하였다. 그리고, 한강(漢江) 줄기를 따라 영등포(永登浦) 상공에 이르러서야 ‘여의도(汝矣島)에 내려라’는 신호를 처음 받았다.
영등포를 지나 기수를 낮추며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때는 11시 18분, 비행시간 7시 18분이 소요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행장 주변에는 돌격 태세의 착검(着劍)한 일본군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독면(防毒面)을 뒤집어 쓴 일본군이 점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하여 원거리 포위망을 줄여오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토록 그립던 조국 땅을 밟는 순간 일행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四周) 경계를 해야 했다.
..........
이로부터 일본군의 살벌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으며 제법 친절하게 우리측 일행을 비행장 장교 숙소에 안내해 주어 저녁에는 간단한 주연(酒宴)까지 마련해 주었다.

8월 19일 아침,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번즈 대표의 말이었다. 광복군 정진군 역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미군측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p.79] 8.15직후의 정치정세(八.一五 直後의 情勢)
.....17일(十七日)부터는 조선인(朝鮮人)의 흥분(興奮)도 좀 꺽기고 18일(十八日)에 이범석장군(李範奭將軍)이 왓다갓다는 것도 쎈프란씨스코 방송(放送)으로 겨우 나중에야 알앗섯습니다.
광복 후 그는 버드중령을 단장으로 미국군 장교 19명, 이범석·김준엽·노능서[1] 등 도합 24명으로 구성된 인원과 함께 C-26비행기를 타고 1945년 8월 17일 중국 서안을 떠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 C-16상공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시 서안(西安)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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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1.0 1.1 노능서(魯能瑞, 1923~201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