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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승만]]

2018년 9월 4일 (화) 07:36 판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건국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진짜 박사 학위를 가진 대통령이다. 제목은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1]


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이 살던 시대는 조선왕조였다. 왕조 시대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개화 운동을 하는 것은 극도로 의협심이 있는 선각자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 험한 한성 감옥에서 장장 7년의 형을 마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떠났다. 출옥 시기는 1904년, 29세였다. 1912년생인 김일성이 태어날 때 그는 37세였다.

이승만은 1904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42년 동안이나 미국에서 살았다. 이승만은 하버드 석사에 프린스턴 박사였다. 미국의 유명한 역대 대통령들이 프린스턴 출신들이었다. 그 학교 출신의 미국 대통령 윌슨이 그의 스승이었다. 당시 세계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의 학력이 가장 화려했다. 1919년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44세의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고, 이동휘가 국무총리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고 이동휘는 지독한 공산주의 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이동휘는 임시정부에 좌익들을 불러들여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고 이어서 1921년 1월에 여운형, 김두봉 등을 주축으로 하는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40만 루불의 공작금을 받아 임시정부 조직을 소련식 ‘위원회’ 편제로 하자며 이승만을 압박했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했다. 이 때 이승만을 압박한 사람들에는 이동휘 말고도 여운형, 안창호, 이동녕 등이 있었다. 결국 이들은 1925년 3월 다수파를 만들어서 이승만을 탄핵하여 이승만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의 나이 50이었다.

이승만은 미국 민주주의 생활양식만 몸에 젖은 것이 아니라 애국자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란체스카라는 여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1934년에 그들은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10월에 뉴욕에서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35세, 이승만의 나이 60세였다. 바야흐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도 종결되어가고 있었다.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미국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치는 반공 활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은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미 국무성의 끈질긴 방해로 귀국할 수 없었니다. 결국 그와 친분이 있는 맥아더 장군(1880)이 주선해준 수송기를 타고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71세였다. 참고로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했을 때, 맥아더의 나이는 71, 이승만의 나이는 76세였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에도 70대는 청춘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15개국을 합병했고, 20개국을 위성 국가로 만들었으며 일본으로부터는 북방 4개 섬인 쿠릴 열도를 빼앗아 버렸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든 후, 그 다음 날인 2월 9일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했다.

이처럼 소련이 영토 욕에 사로잡혀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을 때 어이없기도 미국은 한반도 자체가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조선을 포기했고, 이어서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이것이 북한과 소련의 오판을 불러 6.25전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당시 남한인구는 북한의 2배로 많았지만, 1인당 GNP는 북한의 반도 안 되었다. 1948년 4월 연석회의 참석 차 북한에 갔던 김구나 김규식 등의 눈에 북한은 선진국처럼 보였고, 남한은 후진국처럼 보였다. 전력의 96%, 석탄의 95%가 북한의 소유였다. 그래서 그들은 김일성에 아부하는 발언들을 했다.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벌이는 온갖 방해를 받아가면서 북한에 비해 1인당 GNP가 반도 안 되는 경제력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해 싸웠다. 1949년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특사로 미국을 방문했지만 미국 관리들은 ‘민주주의만 잘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원론만 들려주고 돌려보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71세인 1945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면서 74세였던 1948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그 후 12년 동안 문맹률 80%인 국민에게 주권이라는 것을 선물해주었으며 문맹 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남이야 전봇대를 뽑아 이쑤시개를 하든 말든, 남이야 절간 변소에서 낚시질을 하든 말든 웬 상관이야~” 이런 말들이 당시의 민주주의를 상징했다. 자유 방임이 곧 민주주의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선진국들은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피를 많이 흘렸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하늘(미국)이 준 선물이었고,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도 하늘(미국, 이승만)이 준 선물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국들처럼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잘 모른다. 그래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방해하는 무책임한 매너들이 아직도 고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어지러웠니다. 일반 국민들은 연료 및 식량부족에 허덕였고, 일부 부유층들에서는 축첩, 양주, 양담배로 표현되는 사회악이 난무했다. 이는 깨끗함과 풍요를 내세우는 공산 세력의 선동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더 더러웠지만 그들은 언제나 정의와 아름다운 말과 깨끗함으로 위장하여 군중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군중들을 움직여 부패한 기득권을 공격했다. 당시의 사회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제주 4.3사태 때 제주도로 가서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는 제주도로 가는 척하다가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부터 국보법을 시행하여 6.25일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숙군작업을 실시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을 단행하면서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변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오해가 있었고, 억울한 희생도 많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희생을 놓고 소련과 북한은 한국정부를 야만 집단인 것으로 선전했고, 지금도 좌익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매도한다. 좌익들은 또 미국과 맥아더를 증오한다. 이승만, 미국, 맥아더 이 세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박헌영이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했을 텐데, 이 3개의 존재가 원수라는 것이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다. 사실 월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생명을 바치게 했지만 패했다. 그 이유는 월남에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다. 단지 영국은 잘 알려진 나라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이다.”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손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전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애

'우남'이란?

우남(雩南)은 서울(당시 한양) 남산에서 그의 유소아 시절 성장기 거주하던 곳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우(雩)는 제사나 굿을 하던 장소의 의미. 남(南)은 남산의 첫 글자를 따 온 것.

한성감옥 당시

우남은 대한제국 역모죄로 1898년 수감된다.

우남의 기독교

우남은 사형선고를 받음. 이후 우남은 한성감옥에서 외국인 선교사와 교류한 후 기독교를 믿기 시작함.

우남의 독립정신

우남이 수감 중 저술한 우남 최초의 책. 한성감옥에서 조-영사전을 만들던 우남은 러일전쟁 소식을 들은 후 뜻한 바 있어, 계몽목적의 독립정신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우남 독립정신 주 내용은 당대 선진외국을 모델로 조선 선진화를 이루려면 각 개인이 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

한학 수준이 남달리 높았던 우남이 책을 한글로 쓴 이유는 조선인들이 쉽게 읽게 하려는 의도. 즉 '민국'을 가지기 위한 내용임.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역모일 수 있음을 알기에 지인들이 나서서 미국으로 원고를 가져간 후 책으로 발행됨. 일제 강점기 하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남의 '독립정신'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고 함.

박사학위논문

우남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제출한 박사 논문은 당시로서도 그 독창성이 두드러진 탁월한 논문이다. 흔히 우남을 '이박사'라고 세인이 호칭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남을 평가절하하려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에서 악의적 편집을 했으나, 그 근거가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이승만 연보


저서 및 논문

  • 이승만(李承晩), 《독립정신(獨立精神)》 :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저술. 국내에서 간행되지 못 하고,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2][3]
독립정신의 출현(獨立精神의 出現) 황성신문(皇城新聞) 大韓隆熙四年四月二日土曜 (1910.04.02) : 독립정신 발간 소식 보도
리승만, 《독립정신(獨立精神)》, 서울 : 태평양출판사, 1954 : 최초의 국내출판본으로 보임.
Syngman Rhee (Author), Han-Kyo Kim (Translator), 《The Spirit of Independence: A Primer of Korean Modernization and Reform》 Paperback – October 1, 2000
독립정신 (이승만 지음 | 박기봉 교정 | 비봉출판사 펴냄, 2018-05-05)


  •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 Princeton 대학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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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승만,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제31호) pp.16~18.[4][5]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원문 PDF 스캔본 보기 :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 홈페이지


영문 1941년판 PDF 스캔본.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일본 내막기》 등의 제목으로 다수의 번역판 있음.

자료


이승만 관련 저서

2001년 8월부터 12년 동안 111회에 걸쳐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연재 했던 것으로, 월간조선 홈페이지 지난 호 기사에서 검색 열람할 수 있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孫世一의 비교 評傳 (7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美軍進駐와 兩分되는 政局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엮음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