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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 때 나치 도이췰란드에 의해 야만스럽고 잔인한 대학살을 겪은 유럽의 유태인 다음으로 고통을 가장 많이 겪었던 사람들은 바로 로씨야 국민이었습니다. 나치 도이췰란드 침략에 의해 소련 군인과 민간인 모두 합쳐 2천300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많은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 공산주의 독재 때 수용소로 이송되어 침엽수림에서 사망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나치 도이췰란드에 의해 야만스럽고 잔인한 대학살을 겪은 유럽의 유태인 다음으로 고통을 가장 많이 겪었던 사람들은 바로 로씨야 국민이었습니다. 나치 도이췰란드 침략에 의해 소련 군인과 민간인 모두 합쳐 2천300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많은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 공산주의 독재 때 수용소로 이송되어 침엽수림에서 사망했습니다.}}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908085#home <독재자의종말>1.요시프 스탈린] 중앙일보 1994.07.22
{{인용문|그는 자기 권력의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았다.忠僕도 이용한 다음엔 곧바로 제거해야 마음이 놓였으며 죽음의 使者가 곁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死後 이미지에 흠집낼 우려가 있는인물들을 제거하려고 몸부림 친 사실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스탈린의 비인간성은 그의 사후 곧바로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1953년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차가운 방바닥에서 뒹굴고있을 때 측근들이 보인 것은 거짓눈물과 보이지 않는 권력쟁탈전뿐이었다.그의 주검을 붙잡고 오열한 사람은 20여년 동안 가정부로 일해온 이스토미나뿐이었다.1922년 러시아 공산당서기장이된 스탈린이 독재 30여년간 이룬「최대업적」은 다름 아닌「끊임없는 피의 숙청」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다.92년 이후 옐친대통령 군사담당보좌관을 지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장군이 러시아 극비문서를 분석해 내놓은 스탈린 전 기에 따르면,29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무려 2천여만명이 숙청됐으며 이중 3분의 1이상이 사형선고를 받거나 수용소생활을 하던중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스탈린의 숙청행각은 그의 오른팔로 후계자설까지 나돌던 키로프레닌그라드市 당서기가 34년12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스탈린은 숙청의 안테나이자 하수인인 비밀경찰조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숙청은 37~38 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간 동안 赤軍간부 최고군사회의 멤버의 75%,군사령관 15명중 13명,군단장 85명중 62명,사단장 1백95명중 1백10명,대령이상 고급장교 65%가 체포됐다.
체포된 고급장교 6천여명 가운데 1천5백여명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피의 숙청을 현장지휘했던 야고다도 스탈린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각주==
==각주==

2021년 10월 21일 (목) 07:08 판

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기본 정보
출생일
1878년 12월 18일
출생지
소련 그루지야 인민자치식민주 고리
사망일
1953년 3월 5일 (74세)
사망지
소련 러시아 SFSR 쿤체보
경력
군사 경력

복무기간 : 1941년 ~ 1953년
최종계급 :소비에트 연방원수
지휘 : 전군(최고사령관)

참전 : 적백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1878~1953)은 소련의 독재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후 자신들이 교육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김일성) 대위를 내세워 그에게 최고 권력을 안겨주어 유사이래 없는 극악한 세습 전제왕조를 만드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생애

연해주 한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스탈린이 한국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친 시발점이 1937년 가을 연해주의 한인 지도자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20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것이다. 강제로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한인들은 첫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이 사망했다.

남북한 분단, 김일성 발탁, 북한 공산화, 6.25 남침의 설계자

스탈린은 한반도 분단과 북한 공산화 및 6.25 남침 전쟁의 실질적 총책임자이다. 그가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정하여 한국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고, 북한 김일성 일족의 전체주의 사교 체제도 그 결과이다. 스탈린이 한국인들에게 끼친 피해는 일제통치의 피해보다 몇배 더 크다.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 : 소련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분할 지배할 계획이었다는 증거.
1948년 4월 12일자 문건. "김일성 동무에게 보내는 충고"
1948년 4월 24일자 문건. "조선의 헌법문제에 대하여"

그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참전까지 독려했다. 1951년봄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자 김일성과 중공군은 조기 휴전을 열망하지만 스탈린은 미국을 한국 전선에 붙잡아 두어 유럽쪽에 신경쓰기 어렵게 만들려고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돌연 사망하자 불과 4개월 후 휴전협정이 타결되었다.

스탈린 때문에 북한서 일어난 희극

박갑동(朴甲東, 1919~ )의 증언이다.[2]

53년 3월 5일 세계 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악당 스탈린이 사망했다. 북로당원 가운데도 스탈린 사진을 짓밟으면서 『이 새끼가 10년만 일찍 죽었더라면 우리 조선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욕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탈린이 사망하자 노동당과 내각의 명의로 전체 인민에게 고하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 스탈린 사망을 전민족적으로 애도하라고 명령했다.

박갑동(朴甲東, 1919~ )의 또 다른 증언.[3]

이우락은 경남도당 군사부에서 일하다가 체포되어 죽었고 정태식은 박헌영을 반대하고 김일성을 지지하던 이정윤(李廷允, 1897~?)[4] 밑에 있었으나 6·25 후 내가 그를 해방일보 교정부에 넣어주어 해방일보가 로동신문에 흡수된 후 로동신문의 교정부장까지 되었으나 스탈린을 「쓰라린」이라고 교정을 잘못 본 부하의 탓으로 5년의 형을 받았다.

「쓰타린」 대원수로 써야하는 것을 「쓰라린」 대원수로 교정을 잘못 보아 처벌을 받았다는데, 실수라기 보다는 다분히 고의적이었던 것 같다. 북한에서는 한때 친한 사람들끼리 스탈린을 「쓰라린」 대원수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대숙청

스탈린이 소련을 강제로 산업화하면서 소련의 농업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대규모 기아로 소련 주민이 600만에서 80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 중 400만 명에서 500만 명이 당시 구 소련에 속하던 우크라이나 주민이었습니다.

1937년과 1938년에 구 소련에서 ‘대숙청’이라 불리던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탈린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농민과 소수민족을 탄압했으며, 주변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까지 간첩 혐의로 수용소에 수감해 학살했습니다. 사상자 수는 공식적으로 68만1천692 명이지만, 실제로는 2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기밀시효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에 따르면, 1937년과1938년에 소련의 비밀경찰(NKVD)이 154만8천367 명을 구속했고, 이 중 68만1천692명이 총살되었습니다.

1939년9월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 도이췰란드와 스탈린이 주도한 소련이 뽈스까를 침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뽈스까에서 도이췰란드와 소련은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끔찍한 전범을 저질렀습니다. 1940년 4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악명 높은 구 소련 비밀경찰(NKVD)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산림 지역인 ‘카틴 숲’에서 전쟁 포로로 붙잡힌 뽈스까 장교 2만 2천여명을 살해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나치 도이췰란드에 의해 야만스럽고 잔인한 대학살을 겪은 유럽의 유태인 다음으로 고통을 가장 많이 겪었던 사람들은 바로 로씨야 국민이었습니다. 나치 도이췰란드 침략에 의해 소련 군인과 민간인 모두 합쳐 2천300만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또 많은 소련 사람들은 스탈린 공산주의 독재 때 수용소로 이송되어 침엽수림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자기 권력의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았다.忠僕도 이용한 다음엔 곧바로 제거해야 마음이 놓였으며 죽음의 使者가 곁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死後 이미지에 흠집낼 우려가 있는인물들을 제거하려고 몸부림 친 사실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스탈린의 비인간성은 그의 사후 곧바로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1953년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차가운 방바닥에서 뒹굴고있을 때 측근들이 보인 것은 거짓눈물과 보이지 않는 권력쟁탈전뿐이었다.그의 주검을 붙잡고 오열한 사람은 20여년 동안 가정부로 일해온 이스토미나뿐이었다.1922년 러시아 공산당서기장이된 스탈린이 독재 30여년간 이룬「최대업적」은 다름 아닌「끊임없는 피의 숙청」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다.92년 이후 옐친대통령 군사담당보좌관을 지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장군이 러시아 극비문서를 분석해 내놓은 스탈린 전 기에 따르면,29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무려 2천여만명이 숙청됐으며 이중 3분의 1이상이 사형선고를 받거나 수용소생활을 하던중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스탈린의 숙청행각은 그의 오른팔로 후계자설까지 나돌던 키로프레닌그라드市 당서기가 34년12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스탈린은 숙청의 안테나이자 하수인인 비밀경찰조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숙청은 37~38 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간 동안 赤軍간부 최고군사회의 멤버의 75%,군사령관 15명중 13명,군단장 85명중 62명,사단장 1백95명중 1백10명,대령이상 고급장교 65%가 체포됐다.

체포된 고급장교 6천여명 가운데 1천5백여명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피의 숙청을 현장지휘했던 야고다도 스탈린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각주

  1. 안드레이 란코프 (엮음) 지음, 전현수 옮김, 『소련공산당과 북한 문제 :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정서(1945∼1952)』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년 08월 20일
  2.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65 중앙일보 1990.11.21 종합 9면
    박갑동(朴甲東, 1919~ ),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409
  3.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70 중앙일보 1990.12.06 종합 5면
    박갑동(朴甲東, 1919~ ),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422
  4. 이정윤(李廷允, 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