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1980년 서울특별시 마포구 경서중학교 1학년이었던 이윤상군이 유괴되어 다음날 살해된 사건
  •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 보내면 너도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며, 결국 이 경고는 실행되었다.

내용

이 사건은 국내 3대 미스테리 사건(화성연쇄살인,이형호군 납치사건,개구리소년)에 버금 혹은 능가


할정도로 당시 전국민의 초고도 집중 관심을 받았으며 범인의 지문이나 목격자등의 단서가 전혀 없었다.


당시가 3대 미스테리사건보다 10년이상 이른 1980년이었기 때문에 현대에 일반화된 과학수사조차 거의


불가능하여 사실상 범인검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사건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포기하지 않고 적


극적으로 수사에 나서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당시 군부정권에 대한 안좋은 여


론을 불식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건 파일-


1980년 11월 당시 서울 경서중학교 1학년 14살이었던 이윤상군이 누나의 심부름으로 기념우표를 사러 외


출을 나갔다가 소리소문없이 납치된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다리가 불편했던 이윤상군은 특수학교로 진


학하지않고 일반 학교로 진학했음에도 학급 80명중 2~3등을 유지하는 총명한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이 밤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았고 그날밤 유괴범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현금 4천만원을 준비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 죽는다."


이것이 이윤상군 유괴사건의 시작이다. 전화속에는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 이윤상군의 목소리도 들려왔


다. 하지만 당시 4천만원이라는 돈은 2012년 현재의 7~8억에 상응하는 돈으로 당시 사정이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던 이윤상군 집에서는 그런 자금을 마련할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범인도 현실을 깨닫고 협상


금액을 2천만원으로 낮추기도 했다. 부모는 어쩔수없이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는데 당시는 전화 역추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3분 이상 통화를 하지 않으면 발신지가 어딘지 알아내는것이 힘들었고 그나마도 동


시간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범인은 전화를 짧게 하고 끊었기 때문에 수사는 더욱 난항을 겪


었다. 범인은 매우 용의주도했으며 돈을 받기로한 장소를 27차례나 전화로 급격히 바꾸는등 그나마도 현


장에 나타나지 않고 떠보는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사건은 흘러 흘러 105일이 지났고 범인도 점점 돈


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윤상군 부모의 요청으로 사건은


공개수사로 전환되었고 이는 당시 대통령 당선자였던 전두환 대통령 귀에까지 이 사건이 들어가면서 수사


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전두환 대통령 당선자는 이례적으로 유괴사건때문에 대국민 담화발표를 하게 되는데 그날의 담화내용 덕


택에 지지도가 상승하기도 했다.


"""이자리에서 약속하는데 3월 3일까지 아이를 보내면 너도 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서민들을 괴롭히는자들은 내가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루게 해주겠다."


보안사령관 출신의 서슬퍼런 군사정권 수장의 경고였던만큼 발언의 포스는 지금도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범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국민들의 관심도 최고조에 이르었고 전두환 대통령은 아예 이윤상군 집에 찾아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위


로금과 인삼 두 상자를 전달하며 이윤상군의 부모를 위로했다. 대국민 담화 발표이후 예상치 못하게 오른


국정 지지도때문에 정치적인 의도의 방문이었을거라고 야당은 비판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대통령의 물적


지원이 수사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정보부와 군대의 보안사마저 수사에 협조하는등 국가 수사기관의 힘


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서가 없는 사건은 수사기관의 힘이 모아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건은 완전한 미궁이었다. 단서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군사정권은 이례적으로 타국가의 수사기관 및 사립 탐정등에 자문을 구했고 결국 일본 후지TV등에


출연하며 당시 일본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일본인 최면술사와 미국 CIA에서 활동하던 프로파일링 전


문가를 동원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사를 가동하는데 여기서 작은 단서가 하나 잡히게 된다.


당시에는 최면은 장난이고 프로파일은 무논리한 것으로 여겨져 수사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않을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했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최면과 프로파일링이 큰 역할을 해내면


서 나중에 국내에서도 최면술과 프로파일링이 범죄수사에 적극 활용되는 기조가 된다. 현재는 국과수 및


경찰청에서 전문 프로파일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여튼 최면과정중에 이윤상군의 어머니가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려냈고 유괴 몇주전 아들 이윤상군이


""체육 선생님이 면담을 하자는데 간단한 일이니 굳이 엄마한테는 말하지말고 나오라고 그랬었


"어요" 라는 진술을 했었다는 점과 그날 이윤상군이 그해 최초로 장갑을 끼고 외출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것이다. 당시에 흘려들어 완전히 무의식속 기억의 저편으로 가라앉은 아들의 말이 최면수사중 납치 10


개월만에 떠오른 것이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탄다. 사실 이윤상군은 소아마비 환자였기 때문에 체육교사와 마주칠일이 거의 없었으


며 수사 초기부터 부모들이 의심하는 면식범 명단에서 빠져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수사망에서 멀찌감찌 떨


"어져 있었다. 심지어 KBS 방송국이 이윤상군 학교로 취재를 나갔을때 해당 체육교사는 "범인이 꼭 잡혀서


"죄값을 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인터뷰를 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용의자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


각하지 않았다. 수사본부는 비밀리에 해당 체육교사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윤상군 유


괴납치 사건과 별개로 해당 체육교사의 엽기적인 사제관계가 세상에 드러나서 사회에 경악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사중 해당교사가 창덕여중 재직 시절 여제자 20명과 성관계를 해서 다른 학교로 발령났던 사실이


드러났고 81년 당시에도 현직 교사신분이었던 주영형(당시 28세)은 경찰의 잠복수사결과 부인이 있음에


도 불구하고 현직 여고생인 A양(17세) B양(16세)과 함께 따로 자취방을 꾸려 이중살림을 하고 있는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주영형은 훤칠한 키에 장발을 하고 있었으며 콧수염을 기르고 다녔는데 이런 스타일은 당


시 풍토로는 일반적인 교사의 모습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모습이었다. 여튼 이런 모습에 매력을 느낀 수많


은 철없는 여중생과 여고생들이 그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젊은이 들의 긴머리와 콧수염이 그들의 영혼을 더럽힌다며 80년 9월 폐지된 장발단속의 부활을 고려하기


도 했다고 한다.



여튼 수사본부는 단서와 증거가 없는 이사건에서 난데없이 주영형을 검거했다가는 그의 묵비권에 의해


수사가 완전히 틀어질수 있다고 판단, 계속된 잠복과 감시로 그의 틈새를 노리기 시작했다. 당시 주영형은


28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박빚이 천만원 넘게 있는것이 수사도중 밝혀졌고 이에 수사팀은 그가


용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여 다른 수사팀까지 주영형 감시쪽으로 돌려 신중히 비밀리에 수사


를 진행시켜 나간다.



결국 주영형의 꼬리가 수사팀에게 밟혔고 사건 발생 1년만에 수사팀은 주영형과 동거녀 A양 B양을 동시


에 다 검거하기에 이른다. 이미 검거전 주영형과 A양 B양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심리 상태까지 파악하고


검거에 들어간 수사팀은 범행일체를 완강히 부인하는 주영형을 상대로 전문적인 심리 수사팀의 교란 수사


를 이용해 A양 B양을 분열시켜 범행일체를 자백받기에 이른다. 무서운점들은 이윤상군 살해 사건에 17세


16세에 불과한 미성년자 여고생들이 공범으로 참여했다는 점이고 마치 그녀들은 주영형이 신이라도 되는


듯 떠받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주영형에게는 A양 B양 외에도 창덕여중 시절 성관계를 가졌던 수많


은 여고생 애인이 있음이 경찰수사결과 밝혀져 그에 격분한 A양의 심경변화로 범행일부가 자백된 것이다.


'심리수사팀의 교란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거기다 이윤상군 어머니가 최면수사에서 진술한 '윤상이가 그


'날 그해 최초로 장갑을 끼고 외출했던것 같다' 는 단서를 이용해 주영형에게 함정을 파 장갑에 관련된 질


'문을 했고 주영형은 수사팀 함정에 빠져 '평소 윤상이는 ~~색 장갑을 끼는데 그 날 노란색 장갑을 낀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고 진술하는등 각종 함정 거짓말 수사에서도 범인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로써


는 인텔리 축에 속했던 그는 영리하게 범행일체를 부인하였다. 결국 궁지에 몰린 B양마저 범행일체를 자


백함으로써 주영형은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것을 알고 결국 범행일체를 자백하게 된다. B양을 수


사하던 심리전문팀에 의해 엽기적인 사실이 또 드러났는데 교사 주영형은 B양에게 청산가리를 건네며


'''나를 위해 죽어줘야겠다. 나를 사랑한다면 죽어줘라. 사랑한다. 나도 뒤를 따르겠다.'


라는 엽기적 제안을 강요했던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무서운것은 B양은 실제로 죽기위해 죽을 날짜를 정


해놓고 자신의 사망일을 기다리고 있던 상태에서 검거된것으로 밝혀졌다. 증거인멸을 위해 주영형은 A양


과 B양까지 살해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러나 심리수사팀의 교란으로 B양은 주영형이 자신만 죽이고 본인


'은 다른 여자들과 잘먹고 잘살려고 했다는것에 분노를 하고 뒤늦게 범행일체를 자백한것이다. 당시에 '여


'자를 잘꼬시는 남자중 진정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나 사람 좋은 남자는 없다' 는 말이 풍문처럼 돌았다. 결


국 용의자 주영형의 진술로 북한강변에서 이윤상군의시체가 발견되었고 이미 납치직후 살해한 것으로 밝


혀졌다. 면식범인 이상 돌려주면 자신이 잡힐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잡자마자 죽였다고 진술해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 하지만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진술이었다고 번복하고 사실 자신이 죽인것이 아니라


모포로 얼굴을 덮어놓았는데 나중에 보니 죽어있었다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핑계를 댔다. 당시 수사관


'들은 '이윤상군의 목소리를 미리 녹음해놓고 협박전화에 활용한 점을 봤을때 애당초 죽여놓고 협박하려고


'했던것이 확실하다' 고 증언했으나 법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윤상군 사망에 관한 유일한 목격자


''''는 주영형이었고 법정은 오히려 '증거없음' 으로 주영형의 손을 들어준것이다. 이로인해 주영형은 '살인'


''이 아니라 '감금치사' 가 적용되어 피해자 가족과 국민들이 엄청나게 분노했으나 법리학적으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당시 일부 진보단체가 '''사형제 폐지' 를 주장하며 ''주영형은 중살인자가 아닌


'경살인자다.' ''원래는 착실'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는등 주영형을 일부 옹호하는 발언과 함께 사형은


절대 용납 할수 없다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주영형 사건을 옹호해 국민들의 엄청난 반감을 샀다. 이 논란은


2012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주논점은 사형제 폐지를 떠나서 주영형에게 사형이 적합한 것이었나 징


역 20년 혹은 무기징역이 적합한 것이었나하는 점이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남녀노소 국민들이 주영형같


'은 잔인무도한 범죄자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 생각했지만 지금의2~30대 젊은 세대들은 '가중한 처벌이


'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 이는 진보 정치 세력에 의해 최근 세대들의 다수가 과거와


는 다른 처벌관과 인권관을 가지게 된것으로 보인다.


''남의 인권을 무참히 밟은 자는 인권을 보장받을 가치가 없으며 교화가 아닌 형벌을 받어야 한

"다." VS ''남의 인권을 무참히 밟았더라도 그의 인권은 보장되어야하고 형벌보다는 교화의 기회를 받아야 "한다."


글쎄... 둘중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수는 없겠지만 일반 범죄엔 후자를 극악범죄에는 전자가 옳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2012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영화배우 하정우씨를 닮은 용의자 주영형은 그야말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

성형이었다.


여튼 그가 검거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아동 납치는 무조건 사형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라고 엄


중히 발표함으로써 """자수하지 않으면 내손에 죽는다"''' 라는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살인' 이 아닌 '감금


'치사' 가 적용되어 실제 사형이 선고되지 않을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아동을 납치하는 자체로 특별


가중법을 적용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 어떻게든 사형을 피해보려던 주영형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 계속 '살인' 을 부인하였고 1심 사형판결


''''직후 불복하여 계속 항소했으나 2심도 사형 최종 3심도 사형을 받았다. '살인' 인지 '감금치사' 인지는 지


''금도 정확한 사실을 알수없으나 법정이 '감금치사' 를 인정했음에도 그는 사형을 피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이례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은 3심 판결 직후 저런 인간쓰레기는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서 없애는것이 서민


들이 맘놓고 사는것이라며 판결 11일만에 형을 집행시켰다.


'주영형은 3심 판결후 죄를 뉘우치며 '내속에 악마가 있었다. 부인과 부모님께 죄송하다. 나라는 인간이 세


'상에 태어나지 않았었다고 여겨달라' 는 유언을 남기며 자신의 각막과 콩팥등을 4명에게 기증하고 죽었


다. 여튼 이 수사중 전대통령은 수사과장을 경찰서장으로 파격 승진시켰으며 수사 종결후 다시 한번 경무


''관으로 승진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쟁에서 공이 있는자가 승진을 해야한다' 는 군인정신에 입각한


''것인데 야당에서는 '정작 본인은 전쟁에서 공도 안세웠으면서 4스타를 달았다' 고 비판하여 화제가 되기


도 하였다. 수사에 참여한 말단 직원들에게까지 당시로써는 상당한 금액인 금일봉 100만원을 하사하여 이


사건에 대한 본인의 관심과 의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상처로 남을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윤상군의 어머니 김해경씨는 스트레스성 암에걸려 범인의 사형집행일보다도 빨리 사망하여 국


민들의 가슴을 아프게하였다. 죽기직전 항암치료를 하면서 이윤상군 사건을 어머니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


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윤상군의아버지는 부인을 먼저 세상에 보내고 재혼을 하여 다시 새아들 둘을 얻었


으나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술로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윤상군의 친누나는 범


'인검거직후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대통령님의 노력에 감사드리며 열심히 공부해 사회에 필요


'한 사람이 되겠다' 고 하고 나중에 중앙대 수학과에 진학하였다.


차후 이윤상군 누나가 대학에 진학했을때 전대통령이 대학학비를 모두 대신내줘 국민들에게 ''정치는 공


포스럽지만'힘없는 서민들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대통령' 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공범으로 가담한 A양과 B양은 미성년자라는 점과 범행을 뉘우친점등이 참작되어 각각 징역 3~7년 미만의


경형을받았고 출소후 이름을 개명하고 신분을 숨긴채 평범한 직장인을 낚아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후 노태우 정권때 영화 그놈목소리로 유명한 이형호군 유괴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윤상군 납치사건보다


훨씬 많은단서와 검거기회가 있었음에도 범인을 안타깝게 놓쳐 전두환 정권과 비교되어 무능한 정권이라


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수사를 담당한 수사관이" "이윤상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전부 죽을 각오를


했어야하는분위기였다. 해결하지 못하면 은퇴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을 정도라 최선을 다해 수사


"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사건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영화


'''밀양'으로 재각색 되기도 했다. 여튼 피해자 가족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겨준 이윤상군 유괴사건...


아동 유괴는 성공할수 없으며 설령 잡히지 않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을수 없다는 것 즉,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에게 절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