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이호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최근 수정 : 2019년 7월 22일 (월) 08:44
잔글
 
81번째 줄: 81번째 줄:
 
<references/>
 
<references/>
  
[[분류:개화]][[분류:선각자]][[분류:독립운동가문]][[분류:이석영]][[분류:토왜]][[분류:창귀]]
+
[[분류:개화]][[분류:선각자]][[분류:독립운동가문]][[분류:이석영]][[분류:토왜]][[분류:창귀]][[분류:위정척사]][[분류:유인석]][[분류:토착왜구]][[분류:사대주의]]

2019년 7월 22일 (월) 08:44 기준 최신판

이호영
출생 1869년 (고종6년)[1]
자(字) 이옹(二翁)
본인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양주(楊州)
가족관계 형(兄) 이석영(李石榮, 1855~1934)
형(兄) 이수영(李壽榮, 1858~1880)
제(弟) 이표영(李豹榮)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이호영(李虎榮)의 삶

이호영(李虎榮, 1869~ ?)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서자로 태어나, 김홍집의 갑신정변에서 시작한 단발령에 따라 상투를 자르고 단발하였으며, 담양군수 재직시 유학을 가르치는 서당이 아닌 학교(왜학)를 짓고자 노력하였다. 이유원의 장남 이수영(李壽榮, 1858~1880)[2]의 죽음으로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이 양자로 들어와 이유원의 만석 재산을 물려 받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서자라는 이유로 아버지 이유원의 재산을 물려 받지 못한 이호영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 것인가.

지금으로 부터 110년전에 한반도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상투를 자르고 서구식 학교를 짓는 다는 것은 그 당시에 보통의 선각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실행까지 하였던 인물이었다.

스러져 가는 구시대의 조선을 등뒤로 하고 떠오르는 개화의 아침 해를 바라 보는 인물이었으나 토왜(토착왜구, 친일파)로 낙인 찍혀 목숨에 위협을 받았다.그리고 그가 밟고 있는 땅은 서자라는 출생의 구시대 악습에 발이 묶여 아들이면서 아들이 아니고 아버지의 재산을 양자(이석영)에게 양보하고, 더 나아가지 못한 아픔을 간직한채 양아들인 이석영이 아버지의 만석재산을 팔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3]

그후 아버지 이유원이 제작했던 가문의 가계와 방계 기타 기록을 집대성한 소위 족보책을 1924년 이호영은 서문과 함께 재출판 하였다. 가문에선 서자라는 이유로 적자가 되지 못한 이호영이 구시대의 유물로 볼 수 있는 가계 기록에 서문을 쓰고 구시대로 돌아가 살아간 그의 삶을 보게 된다.

아버지 이유원은 영의정으로서 조선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을 고종에게 권하였다.현재 역사에서 불평등조약으로 평가받고 있는 강화도조약 체결에 일조하였다. 그런 그가 이석영의 성격과 인품됨을 모르고 양아들로 받아 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양아들로 받아들인 이석영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독립운동가로 삶을 마쳤다. 독립운동가가 될 재목으로서 양자를 받아들였을 아버지 이유원 아래에서, 서자로 아버지의 뜻을 양자 이석영에게 양보하고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이호영의 삶에 토착왜구 친일파로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형 이석영의 생부는 이유원의 12촌 동생 이유승(李裕承, 1835~1907)이며, 그 아들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시영(李始榮, 1868~ 1953)은 이석영의 생가쪽 동생이다.[4]

문헌상 기록

토왜 (토착왜구)

구한말 의병들이 토왜(토착왜구)로 이호영을 규정한 격문

이하 격문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 원문

<異國의 別學(즉 倭學) 을 획책하는 潭陽郡守에게 경고한 義陣의 軍令> 令潭陽知郡土倭李虎榮處 爲星火發令事汝以壬亂忠臣後裔背鮮削髮鮮皇之逆臣也事倭虐民倭國之忠汗也胡爲乎抛却聖人之學務厥異國之別學稱以學敎堂結構排歛民間至于萬餘金則聞甚痛駭矣又聞更設堂于東北排歛各戶二萬餘金究汝輩之罪狀卽當殺之無釋待後月行軍之時斷當卽刻處分之端矣然而爲先發令爲去乎以此愓念擧行以待後日義陣處分宜當事 (此文ハ李知郡外五名ニ步撥ヲ以テ送付ノ來ルモノ) 己酉二月十四日 鮮國復讐雲雷大將 壯義軍令

  • 번역문

<異國의 別學(즉 倭學) 을 획책하는 潭陽郡守에게 경고한 義陣의 軍令-번역문> 潭陽郡守 李虎榮에게 명한다. 성화같이 명하노라. 너는 壬辰倭亂 때 충신의 후예로[5] 조선을 배반하고 머리를 깎았으니 조선 황제의 逆臣이며, 倭國을 섬겨 백성을 학대하니 倭國의 충신이다. 게다가 어째서 聖人의 학문을 버리고 이국의 별스런 학문에 힘쓰는가. 또한 學校堂을 짓는다는 핑계로 돈을 민간에 배정해 거둔 것이 만여 금에 달하였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다. 또 들으니 다시 東北에 學校堂을 설치하여 각 호에 배당하여 거둔 것이 2만여 금이라고 하였다. 너희들의 죄상은 즉시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후일 행군할 때에 가서 즉각 처분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에 명하노니, 이를 유념하여 거행할 것이며 후일 의병 군진의 처분을 기다림이 마땅하다. 己酉二月十四日 韓國復讐雲雷大將 壯義軍令


출판 서문

<경주이씨금석록> 제1책 권두에 이만영과 함께 이호영의 서문이 실려있다.

출처: 코베이 옥션

  • 발췌 내용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이 자기 가문의 선세 및 방친들의 지장과 기타 기록을 집대성한 목판본 <경주이씨김석록>전 10책 및 < 경주이씨속 금석록> 6책등 경주이씨 관련자료 16책, 조선 후기 고종때의 영의정 이유원 선생이 1868년에 자기 가문의 선세 및 방친들의 지장과 기타 기록을 집대성한 책을 1923년 경북 의성군에서 번각하여 인출한 목판본 <경주이씨금석록>전24권 전10책 완질본 및 1924년에 후손 이호영이 쓴 서문이 붙어 있는 목판본


간찰 1점

출처: Kumyo경매

내용발췌 이호영(李虎榮)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이옹(二翁)이다. 승지(承旨), 옥과 군수, 담양 군수(潭陽郡守) 등을 지낸 인물로 그의 부(父)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를 지낸 이유원(李裕元)이다.

각주

최근 바뀜
자유 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