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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收奪)’의 사전적 의미는 ‘강제로 빼앗다’이다. 반면 ‘수출(輸出)’은 ‘국내의 상품이나 기술을 해외로 팔아서 내보내다’라는 의미다. 일제 당시의 표현으로는 ‘이출(移出)’이라고 한다.  
‘수탈(收奪)’의 사전적 의미는 ‘강제로 빼앗다’이다. 반면 ‘수출(輸出)’은 ‘국내의 상품이나 기술을 해외로 팔아서 내보내다’라는 의미다. 일제 당시의 표현으로는 ‘이출(移出)’이라고 한다.  


‘이출’이란 한 국가의 어떤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화물을 옮긴다는 뜻이다. 즉 이 용어 자체가 이미 일본 식민지 정책이 동남아시아나 중국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며, 조선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기본적인 관점과 인식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동질적 관계에 놓여야 했고, 그리하여 일본의 문화와 제도 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식되어야 했다.  
‘이출’이란 한 국가의 어떤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화물을 옮긴다는 뜻이다. 즉 이 용어 자체가 이미 일본 식민지 정책이 동남아시아나 중국에 대해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며, 조선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기본적인 관점과 인식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동질적 관계에 놓여야 했고, 그리하여 일본의 문화와 제도 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식되어야 했다.  


따라서 일제의 쌀 이출은 일본과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의 조선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를 가리키며, 그 외의 국가와의 거래는 ‘수출입’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쌀 이출은 일본과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의 조선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를 가리키며, 그 외의 국가와의 거래는 ‘수출입’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2019년 8월 16일 (금) 16: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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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국사 TV, “국사 교과서의 쌀 통계 자료는 모두 엉터리다” 강연.

함께 보기 2: 국사 TV, “산미증식기 미곡창고는 조선쌀 수입 억제 시설!” 강연.

함께 보기 3: 이승만 TV, “식량을 수탈했다고?” 강연.


(1) 이 문서는 김낙년, “식량을 수탈했다고?”,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44~54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특히 식량 수탈설과 관련한 1차 사료의 해석에 대해서는 위에 올린 국사 TV의 내용을 참고하도록 한다.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정확한 용어와 개념 이해하기

‘수탈’과 ‘수출’의 의미는 천양지차(天壤之差)

《고등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에서 설명하는 식민지 수탈 정책 부분. 이 내용은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편향된 기술을 이어받고 있다.

‘수탈(收奪)’의 사전적 의미는 ‘강제로 빼앗다’이다. 반면 ‘수출(輸出)’은 ‘국내의 상품이나 기술을 해외로 팔아서 내보내다’라는 의미다. 일제 당시의 표현으로는 ‘이출(移出)’이라고 한다.

‘이출’이란 한 국가의 어떤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화물을 옮긴다는 뜻이다. 즉 이 용어 자체가 이미 일본 식민지 정책이 동남아시아나 중국에 대해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며, 조선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기본적인 관점과 인식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동질적 관계에 놓여야 했고, 그리하여 일본의 문화와 제도 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식되어야 했다.

따라서 일제의 쌀 이출은 일본과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의 조선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를 가리키며, 그 외의 국가와의 거래는 ‘수출입’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종합하자면, 표면적으로만 보았을 때 ‘수탈’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듯하지만 이 자체로 이미 하나의 기울어진 해석이 내재되어 있다.

‘수탈’은 이미 해석이 내재된 비전문적, 비중립적 용어

일제 시대의 농업 경제와 무역을 논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바로 ‘수탈(收奪)’이다. 이는 《고등학교 국사》또는 《고등학교 한국사》와 같은 교과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수탈’ 아니면 그 의미를 담은 표현으로 일제 시대의 경제사를 설명한다.

교과서 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정부 산하 연구 기관의 역사 서술을 살펴보면, ‘반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 ‘가져갔다’ 또는 ‘반출’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표면적으로 보면 강제성을 배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가 또는 정당한 값을 지불했느냐 여부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점에서 ‘반출’의 의미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12월 30일 고시 이후 현재까지 시행 중인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일제시대의 농업과 쌀 수출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10년대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한국에서 값싸게 공급받고, 일본 기업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은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수리 시설의 확대와 품종 교체, 화학 비료 사용 증가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지주는 다소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소작농은 수리 조합비나 비료 대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결국 지주는 빠르게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으나,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1920년에 일제가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꾼 이후, 면방직이나 식료품 공업, 광업 분야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일제는 일본 자본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의 탄압을 일삼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민족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당했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일제가 쌀을 대량으로 ‘가져간’ 결과 조선인들이 쌀을 증산하더라도 그 혜택을 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생활 수준도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쌀의 이동과 관련한 각종 자료를 종합해서 보았을 때, ‘수탈’은 매우 한쪽으로 치우친 섣부른 해석이 개입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해방 전 조선의 소작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을 반론으로 제기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시기적으로나 관련 분야의 범위에 있어서 더욱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