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 TV, "과연 강제 노동이었나?"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이우연, “‘과연 ‘강제노동’ · ‘노예노동’이었나?”,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77~87쪽; 이우연,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 같은 책, 88~98쪽을 기반으로 작성으로 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3) 정부 주도로 ‘강제징용’과 관련한 각종 자료집과 보고서들이 수집, 발간되고 있으니 기본 자료들과 함께 비교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홈페이지 자료실 [1]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홈페이지 [2]

연관 검색어

  • 다음 표제어들을 기본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징용, 강제징용, 강제동원, 일제의 강제노역, 전시체제기 강제동원, 일제의 강제연행, 한일 청구권 협정,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과 역사 왜곡 논쟁

  • 또한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영화 《군함도》, 영화 《군함도》 광고 논란, 강제징용 노동자상,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 다음의 표제어와 영상도 참고하면 좋다.

반일종족주의 #일제 징용자의 진실과 반일종족주의, 이우연 일제징용자의 진실에 대한 영상들

‘징용’의 역사 왜곡의 출발점

'징용’의 정확한 의미와 ‘강제징용’, ‘강제동원’ 등과 같은 용어의 논리적 모순은 노무동원을 참고할 것.


2015년 부산에 문을 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앞에 세워진 소위 '징용노동자를 위한 추모탑'. 여기에 얼마 전까지 일본판 '염전 노예'들의 사진이 조선인 징용자로 둔갑되어 붙어 있었다. 사진은 해당 역사관 홈페이지 첫 화면.


아래 내용 또한 노무동원에서 옮겨온 뒤, 추가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강제징용’과 ‘강제연행’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쓴 것은, 일본 조총련계 조선대학의 교원인 박경식(朴慶植)에서부터다. 그는 1965년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이런 주장을 폈다.

이 책은 처음에는 일본어로 쓰였으나, 2008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바 있다. 현재 절판 상태다.

흥미롭게도 이 책이 나온 해가 1965년인데, 이 해는 바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해이다.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북한은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포위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선전 선동의 목적으로 이런 주장을 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동은 지금까지도 성공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이 주장은 학계에서 관련 연구를 진행할 때 토대가 되어, 한국의 정부 기관, 학교, 언론계, 문화계 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책뿐 아니라 ‘강제징용’ 등의 용어를 써가며 수행하는 보도, 탐사, 연구 자료들의 소위 ‘증언’들은 이런 식이다.

  • 자고 있다가 순사에게 끌려갔다
  • 논에서 일하는데 헌병순사가 나를 억지로 일본으로 억지로 끌고갔다.
  • 이런 식으로 일본에 끌려가서 죽도록 일하고 짐승처럼 학대를 받다가 돈도 한 푼 못 받고 돌아왔다.

박경식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 징용 현장의 실태는 이러했다.

  • 많게는 하루 20시간을 일했다.
  • 임금을 현금으로 준 것이 아니라 모두 저금 시켜서... 송금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자기 혼자 먹고살기도 힘들 정도였다.
  • 임금 자체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 정도였다.
  • 조선인들은 탄광의 갱내(坑內) 노동과 같은 “가장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구타와 집단 린치, 감금은 일상이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전기호 경희대 명예교수의 주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 민족적 임금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 일본인이 기피하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조선인이 하도록 강제로 배치하고, 임금에서 소액의 용돈만 빼고 나머지는 강제로 저금하게 했다.
  • 채찍과 폭력, 감금을 통해 자유와 자율이 전혀 없이 조선인을 ‘감옥적’으로, ‘노예적’으로 대우했다.

일제 징용사 뽀개기

이제부터 위에서 주장되는 내용들을 하나씩 뽀겨내도록 하자.

‘징용’이라는 말 자체가 쓰이지도 않았다 – 1939년부터 1944년 8월까지의 ‘모집’과 ‘관알선

1944년 9월부터 시행된 징용 이전에는 ‘모집’과 ‘관알선(官斡旋)’의 방법을 통해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하였다. ‘관알선’이란 말 그대로 관청의 소개와 지원을 통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징용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발성’이다. 즉 조선인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렇다고 처벌을 받거나 하지도 않았다.

2차 대전이 시작되자, 일본의 탄광과 같은 근로 현장에서는 젊고 건장한 인력이 대거 전장으로 끌려가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쟁 말기까지 조선인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2등 국민’이었다는 것이다. 다소 복잡한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는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침략 지배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 ‘동화’되어야 하는 곳이었고, 따라서 일본의 법률과 체계, 제도 등이 이식되면서 일본과 서서히 동질화되어갔다. 한반도의 물질적 · 경제적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본질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과 조선인은 1910년 한일병합을 통해 일본의 한 지역으로 편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중적인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즉 일본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으므로 조선인은 일본 호적법이 아니라 별도의 민족적(民族籍)을 갖는 ‘조선인’으로 규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병역의 의무를 질 필요가 없었다. 일본군 장교가 되는 것이 조선 청년들의 ‘로망’이었다는 것도 뒤집어 보면 이런 이중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일본 청년들이 전쟁에 동원되느라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업과 민간의 노동 수요 즉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 시행한 것이 모집과 관알선이었다. 민간 수요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니 강제성 없이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시경제 하에서 소중한 인력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한 쪽이 오히려 일본이었다

영화 《군함도》를 보고 소감을 말하는 이 노인의 인터뷰를 유심히 보자.

인터뷰의 의도와 달리, 영화의 묘사가 비현실적이고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마지막까지 인간적 예우를 해주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일보닷컴 2017년 8월 12일 기사, ““포로생활보다 더 끔찍” 최장섭 옹의 ‘군함도 3년10개월'”에 수록된 인터뷰.


길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동시에 일본의 ‘모집’이 시작되는 1939년 9월부터, 짧게는 정확하게 징용이 실시되는 1944년 9월부터 1945년 8월에 이르는 기간을 전시(戰時) 기간으로 본다면,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수행한 것은 ‘정당한 댓가를 받고 제공하는 노동’이었다.

전시 경제 하에서는 기본적으로 시중에 현찰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 정부가 막대한 규모의 현금을 살포하기 때문인데, 군수 기업은 그 중에서도 현금이 풍족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현찰이 아닌 현물이다. 넘치는 현찰에 비해 물자는 부족하고, 기업에서는 정부가 요청하는 대로 생산량은 늘려야 하는데 상황은 여의치 않으니 누구나 힘든 시기를 겪을 수밖에는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의 청장년이 모두 군인으로 동원되었으니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을 겪게 되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력이 곧 이윤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에는 회사가 노동력을 확보하고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아무리 조선인이 밉다고 해도 당장의 이윤을 생각한다면 공연히 임금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일본은 탄광과 같이 숙련된 노동이 필요한 근로 현장의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던 상황이라 모집과 관알선으로 일본에 간 조선인들이 배치된 곳은 대부분 광산이었다. 통계로는 64%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산업 구조 자체가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으로 자발적으로 간 조선인들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었다. 숙련 노동자도 아닌데다 농업과는 전혀 다른 일에 종사해야 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광산에서 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많은 조선인들이 건설 현장으로 도망을 치거나, 그나마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오랫동안 그 일을 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계약 기간(1~2년 정도)만 채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제징용’을 최초로 주장한 박경식이 제시한 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 모순이 금방 드러난다. 그가 제시한 홋카이도 탄광의 예에서, ‘임금 분포표’만 본다면 일본인 노동자 중 82%가 50원이 넘는 월급을 받지만, 조선인 노동자는 75%가 50원 미만의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박경식이 제시한 이 통계 바로 뒤에 나오는 ‘근속 기간 분포표’를 보면, 조선이 장기 근속자가 전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같은 탄광에서 5년 넘게 근속한 일본인은 전체의 31% 정도인 반면, 조선인은 한 명도 없다. 길어야 3년 미만의 기간이 최대이다.

채탄 자체가 숙련 기술을 요구하는 것인데, 앞서 말했듯 조선인들의 숙련도는 매우 낮았다. 게다가 농사에 익숙한 조선인들은 체격이 아무리 건장해도 탄광 노동 자체가 두렵고 낯선 일이었기에 대부분 계약 기간만 채우면 바로 귀국했다.

조선인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일본의 광업 기술이 낯설기만 한 비숙련 노동자였다

(1) 누가 누워서 탄을 캐나? 광업 기술의 일대 혁신

일본의 광업 기술은 1930년대부터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사람이 직접 땅을 파고 엎드리고 누워서 탄을 캐는 재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1934년 일본 오무타시(大牟田市)의 한 일본인 기술자가 채탄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약 100년 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현대적인 모습이다. 사진을 보면 괭이가 아닌 공기 압축 착암기(coal pick)를 사용하여 채탄을 하고 있다.

이미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의 탄광 대부분의 갱도 높이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을 정도였고, 5미터 이상의 폭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 순진한 농촌 출신 조선인들만 한 조를 짜 최신식 탄광에서 일을 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에서는 탄광으로 두 서너명씩 무리를 지어 들어간 뒤, 말 그대로 ‘굴을 파는’ 방식은 비효율적인 재래식으로 과거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 식으로는 채굴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석탄이 많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광업에서의 일대 혁신이 일어나면서 채탄 기술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longwall 즉 장벽식(長壁式) 채탄이라는 기술이 도입되었는데, 큰 갱도를 탄맥을 따라 나란히 판다. 그 길이가 무려 200미터 이상이 되는 곳도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것이다.

이런 기술을 도입하면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작업조들이 서로 5~6미터 간격으로 줄을 지어 ‘서서’ 작업을 하게 된다. 게다가 착암기와 같은 최신 설비는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계식 드릴, 압축식 착암기, 소형 굴삭기, 컨베이어 등의 장비는 지금도 상당 기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훈련이 고된 이유는 그 자체로 재해나 생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광업 기술의 혁신은 바로 1929년의 세계 대공황 때문이기도 하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기계화가 급속도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 조선인은 1939년 이후 대거 현장에 투입되었으므로, 그때는 벌써 기계화가 크게 진전된 때였다.

1934년 일본에서 숙련된 일본인 기술자가 공기 압축식 착암기를 이용해 채굴하는 사진. 이런 기술은 오랜 학습이 필요하다는 점, 특히 이 즈음에는 이미 재래식으로 채굴하는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반일 종족주의> 81쪽 수록 사진.

장벽식 채탄법에서 조선인만으로 작업조를 짠다면, 분명히 함께 줄지어 일하는 다른 조들의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고 더 위험한 결과를 낳게 된다. 고도의 숙련 기술을 요구하는 위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미숙련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조에서 작업한 절우(切羽)는 다른 막장과 달리 돌출되어 튀어나온다. 그렇게 되면 전체 작업조가 함께 사용하는 큰 컨베이어를 동시에 일직선으로 탄맥에 따라 옮길 수가 없게 되어 전체 작업에 손실이 생긴다.

또한 채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수록 작업의 위험도도 그만큼 커진다. 사고 발생율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아질 수는 있어도, 사고의 크기나 정도의 측면에서는 고도로 훈련된 기술력을 갖춘 사람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 잘 숙련된 일본인과 경험이 없는 조선인을 한데 묶어 조를 편성해 주어야 작업조 전체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밖에는 없다.

또한 탄광에서 징병된 일본인들은 갱내부 중에서도 비교적 더 큰 힘을 써야 하는 작업조 출신이 많았다. 이들의 빈자리를 조선인들이 메꾸었는데, 일본 기업에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 파견된 사원들이 당연히 건장한 조선인 청년을 모집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탄광에서의 작업배치 비율에서 일본인들과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갱내부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하여 재해 발생율이 높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농촌 출신으로서 일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 건설 현장으로 빠지거나 2년 정도의 계약만 채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탄맥 전체에 있는 석탄을 모두 캘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징용사 왜곡 사건 일지

뉴욕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역사 왜곡을 자랑하다

2017년 7월 뉴욕 타임스퀘어에 내걸린 영화 <군함도> 광고. 여기에 쓰인, 누워서 탄을 캐는 노동자는 일본인으로, 1950년대 중반 일본 서민의 삶을 다룬 사진집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 광고를 위해 서경덕 교수는 국민으로부터 2억의 성금을 모았다.


2017년 7월 뉴욕 타임스퀘어의 대형 전광판에,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의 주도로 영화 《군함도》의 광고가 등장했다. 그는 이 광고를 위하여 국민들로부터 2억 원의 성금을 모았다.

말 그대로 재래식으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보호 장구도 없이 탄광에 누워서 탄을 캐는 조선인의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전시되어 있고, 중학교 교과서(천재교육 《역사2》교과서)에도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일본의 사진작가 사이토 고이치(齊藤康一)가, 1961년 일본의 서민의 삶을 담기 위해 찍은 사진으로, 일본 치쿠호우(筑豊) 탄전지대의 한 폐광에서 석탄을 도굴하는 장면이다. 사진의 필름은 지금도 작가가 소장하고 있다.

이 사건이 알려진 뒤, 2019년 4월 3일 일본 《산케이 신문》은 상세한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뉴욕 한복판에 이 사진이 반복적으로 광고되면서, 한국의 연구 및 교육 기관과 국가 기관, 서경덕 본인이 일본인의 초상권이나 사이토의 저작권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원작자 사이토는 2018년 국립역사관을 방문하여 항의하며 전시 중단을 요구했으나, 역사관은,

“강제 동원의 실상은 이 사진과 같다.”

는 이유로 전시를 고집했다.

일본판 ‘염전노예’가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으로 둔갑

일본에서의 조선인 '노예 노역'의 증거로 계속 나오는 사진. EBS의 다큐멘터리 중 한 장면이다. 2019년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1926년 일본판 '염전 노예'를 고발하는 사진으로, 사진 속 인물은 모두 일본인이다.


부산에서 2015년에 문을 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입구에 세워진 추모탑은 소위 ‘징용 피해자’라고 불리는 조선인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추모탑 뒤에는 낙성대연구소의 이우연 박사 등의 항의를 받기 전까지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채로 멍하게 서 있는 이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 사진은 2019년 현재 초등학교 6학년 《사회》교과서 54쪽에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노무동원된 조선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1926년 9월 9일 일본의 《아사히카와(旭川) 신문》에 게재된 것으로,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토목건설 현장에 감금된 채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10명의 일본인을 담고 있다. 일종의 고발 기사로 취재된 내용의 일부로, 이 보도로 인해 사업자는 검거되어 처벌을 받았다. 이 때 기자가 구조된 피해자들을 촬영한 것이다. 이 피해자들은 한국식으로 하면 2014년에 전라남도 신안군 일대에서 벌어진 ‘염전노예’와 비슷한 유형이다.


2019년 4월 4일 <펜앤드마이크>에 소개된, 중학교 교과서에 조선인 징용자 사진으로 잘못 올린 사진의 정정을 요구하는 일본인 원작자 사이토 씨 관련 기사.

일본판 ‘염전 노예’로부터 모티프를 얻은 강제징용 노동자상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100미터 부근에 설치된 '강제징용노동자상'. 위안부 소녀상 곁에 설치되었다. 애초에 일본판 '염전 노예' 사진으로 잘못 알려진 데서 모티프를 얻어 온 것이 분명하다.


2016년부터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설치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민노총, 한노총,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등이 주도하는 ‘일제하 강제징용 노동자상 설치 추진위원회'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이 동상은 2016년 서울 용산 기차역 10미터 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같은 해 인천 부평역, 제주도와 창원에도 세워졌다.

2018년에는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하려다 경찰에 의해 100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밀려난 바 있다.

2019년 8월 15일에는 북한과 연대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노동자상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의 설치 장소로는 일본 대사관 곁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 바로 옆자리라고 한다.

지금까지 세워진 동상의 노동자 모습은 위에서 소개한 1926년 일본 《아사히카와 신문》의 ‘건설 노예’ 사진의 일본인과 매우 흡사하다.

나오며 – 소위 ‘강제징용’의 자료가 쌓일수록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셈이다

이념성향이 분명한 소위 ‘인터넷 독립 언론사’를 표방하는 ‘참세상’이라는 곳에는 이런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추도비 인물이 조선인이 아닌 1926년 홋카이도 강제노역 ‘일본인’임을 뒤늦게 인지하고 사진을 철거해도, 초등 6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린 이 사진에 대한 교육부의 오류 인정과 시정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른바 강제징용노동자상 설치는 멈출 줄 모른다.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도외시한 이상한 계산 방식의 보상금 요구와 왜곡된 이미지의 동상 설치사업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끊임없이 모욕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제야 우리는 가공할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동상 게시를 철회하라는 내용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 자체로 위선과 모순에 차 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다만 명백한 증거가 나왔으니 동상을 철거하라는 부분에서는 역사 왜곡을 겨냥하는 입장에서 새겨둘 필요가 있는 부분이 많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만든 작가 부부의 인터뷰. MBN 인터넷판 기사. 2017년 8월 9일.

조선인 노무동원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그 강제성과 폭력성을 주장하는 측이 자료를 발굴하고 발표할수록 더욱 모순이 깊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강제동원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소위 ‘기증’을 받았다는 사진을 보면, 건장한 청년들이 밝은 표정으로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맞추어 자세를 잡은 형상이다. 또한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은 사진관에 가서 근사한 옷을 빌려 입고 찍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즉 생활 자체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는 방증이 된다.

동시에 자료집들에 수록된 임금 지급 명세서라든가 근무 일지 등은 그 자체로 노동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강제 노동, 노예 노동이라면 급여 명세서를 만들 이유 자체가 없다.

위에 올린 ‘강제 동원 기증 자료집’은 노무현 정부 때에 만들어진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낸 것으로, 이 기관은 일본으로 동원된 한국인들에게 피해 보상을 하였다. 이 때 보상을 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했고, 그 때 나온 것들이 바로 근로 현장에서의 기념 사진이라든가 임금 명세서였다.

결국 강제징용을 주장하는 측이, 자신들이 수집한 자료들이 가리키는 기본적인 사실 관계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셈이다.

참고 자료

  • 이우연, “‘과연 ‘강제노동’ · ‘노예노동’이었나?”,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77~87쪽
  • ______,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 같은 책, 88~98쪽
  • “反日이데올로기는 民族主義가 아니라 種族主義”, 《월간조선》, 2019년 7월호

[3]

  • “[인권펀치] 민노총은 일본인 이미지 징용상 설치 중단해야”, 《참세상》 인터넷 기사, 2019년 7월 12일

[4]

  • “천재교육,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1961년 일본인'을 '일제 징용공'으로 왜곡”, 《펜앤드마이크》, 2019. 4. 4.[5]
  • 교과서에 실린 ‘징용노동자' 사진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 노동자 사진, 《월간조선》, 2019년 3월 12일 인터넷판 기사.

[6]

  • “강제징용 노동자상, 부산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에 세운다”, 《노동과 세계》 기사, 2017. 9. 18 [7]
  • “포로생활보다 더 끔찍” 최장섭 옹의 '군함도 3년10개월'”, 한국일보닷컴 기사, 2017. 8. 12. [8]
  • “소녀상 작가부부, 강제징용의 아픔을 빚다”, MBN, 2017. 8. 9.

[9]

  • “전기호 전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천만원 쾌척”, 민족문제연구소, 2016. 5.2. 알림 게시물, [1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11]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12]
  •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홈페이지 자료실

[13]

다음 자료는 위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공개한 자료 중 주요한 것들이다.

  •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강제동원기증자료집》, 2006
  • 대한민국정부, 《강제동원보고서 04 조세이 탄광: 日本の長生炭鉱 水没事故に関する真相調査》(일본어), 2007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동지위원회, 《전시체제기 규슈(九州)지역 ‘아소(麻生)광업(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진상조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