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평전은 대한민국의 변호사 조영래의 저서이다.

출간

저자 조영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되면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도피 생활을 한다. 그 중 3년 동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만나고 생존 당시 전태일과 함께한 청계천 노동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소선으로부터 전해받은 전태일 수기를 정리하여 <어느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집필한다

일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후 1983년 대한민국에서 익명으로 출간한다. 조영래 사망 1년 후인 1991년 1차 개정판에서 저자가 밝혀졌다.

논란

전태일은 노동 착취를 당했는가?

<전태일 평전>(이하 평전)에 제시된 여러가지 근로조건 가운데 전태일은 1964년 '삼일사'의 '시다'로 취직하면서 월급 1500원을 받았다(85~87쪽). 또한 그는 1년 후 1965년 같은 회사의 '미싱보조'가 되면서 월급이 두 배로 뛰어 3000원이 되었다(88쪽). 그로부터 1년 후인 1966년 가을 그는 회사를 '통일사'로 옮기며 '미싱사'로 승진하여 월급이 7000원이 되었다(109쪽). 전태일은 2년만에 두 번의 승진을 하였고 월급은 4.6배 상승하였다.

평전에서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 미싱보조로 승진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1.5~2년,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승진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3~4년이라고 말하고 있다(82~83쪽). 전태일은 미싱사에 만족하지 않고 재단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데 1966년 추석이 지나고 '재단보조'가 되며 1967년 2월 재단사로 승진한다(117쪽).

평전에 따르면 평화시장 재단사의 월급이 1만 5천원에서 3만원까지의 범위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98쪽, 261쪽). 이를 계산해보면 전태일은 평화시장 시다로 시작해 만 3년만인 19세에 재단사가 되었으며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천원으로 10배 올랐다. 같은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매년 10% 초반이었음을 감안해도 매우 높은 상승률이다.

자유경제원이 개최한 '전태일 생애 바로보기: 누가 전태일을 이용하는가'에서 박기성 교수는 전태일의 월급이 2만 3천원 정도였고 연봉으론 27만 6천원이라고 했고, 이를 1970년 한국의 1인당 GDP인 8만 7천원에 비교해봤을 때 약 3.2배라고 했다. 전태일이 착취노동을 당했다는 말이 논란이 이는 이유이다.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없었는가?

평전에서 저자 조영래는 "이렇게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이제 전태일의 머릿속은 기술자가 되어 돈을 더 벌겠다든지, 대학교를 가겠다든지 하는 생각보다 날마다 눈앞에 부딪히는 동료 직공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해 주나 하는 생각으로 미어지게 되었다"(132쪽)라고 서술한다.

이후 전태일은 만 20세가 되던 1968년 고용주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해고와 재취업이란느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동시에 그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등 노동운동에 필요한 공부를 하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고 한다(166쪽).

그러나 남정욱 교수가 '70년대 노동운동, 전태일 그리고 불편한 진실'(2016년 7월 5일 세미나)에서 지적하다시피,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는 물론 대학생 멘토까지 있었다.

"솔 앨린스키(1909~1972)는 버락 오바마가 존경한다고 말한 미국의 급진적 사회 운동가로 1939년 시카고 빈민촌에서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등 실천적 조직과 이론을 정립했다. 그의 이론 중에 '지역사회이론'이라는게 있다.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시킨 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전까지는 활동가가 지역에 침투해서 직접 조직을 꾸리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현장에서 발굴한 리더를 통해 운동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앨린스키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옆에 앉아 조용한 말로 설득했다. ‘당신을 구할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부추기고 그 선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사회개혁의 근간이라고 앨린스키는 주장했다. 운동이 시작될 때 조직가는 그 바람을 타고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며 훈련된 조직가는 선택한 현장에서 3년 이내에 운동을 일으키고 운동이 일어나면 바로 그곳을 떠나라고 그는 가르쳤다."

우리나라 운동권 역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예일대학 신학부 출신의 오재식(1938~2013)은 <기독교 사상> 1970년 12월호에 기고한 <어느 예수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현장을 통해 가장 빨리 알았던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오재식은 솔 앨린스키의 영어책 <Rules for Radicals>를 번역해 아르케에서 2008년 출판한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귀국 후 다시 기독학생운동으로 복귀하여 기독학생운동 단체들의 통합과정에서 한국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1967년에 출범한 학사단 운동에 사회문제에 대한 앨린스키의 접근방법을 풀어 넣었다. 훈련받은 학생들은 두세 명으로 팀을 구성하여 서민들의 수많은 삶의 현장에 투입되었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현장의 목소리와 울음소리를 수록하였다.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선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렇게 접근한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가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노동운동자들의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손을 잡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68년에… 미국 장로교의 조지 타드 목사는 허버트 화이트(Herbert White)란 조직가를… 한국에 보냈다. 화이트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를 베이스로 하고 수도권선교협의회에 가담해서 서울 청계천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조직가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화이트는 앨린스키의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미국 뉴욕 주의 로체스터에서 코닥(Kodak)을 상대로 한 주민조직을 성공시킨 조직가였다. 수도권선교협의회는 위원장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에게서 훈련받은 젊은 조직가들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이 훈련계획은 2년간 계속되었고 15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과정을 마쳤다. 이렇게 조직된 수도권 팀은 도시산업선교회 사람들과 연대하여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오재식의 글에 따르면 조영래의 평전은 청계천 평화시장을 둘러싼 노동운동의 전개에 외부의 훈련된 세력이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셈이다.

전태일의 분신

전태일은 김개남과 1970년 10월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노동청장에게 '평화시장 피복제품상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다. 다음날 신문은 그 진정서의 내용을 대서특필하고 전태일은 크게 고무된다. 그러나 언론 보도 후 형식적인 관심과 지원, 실질적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겪으며 전태일은 좌절한다. 결국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가 예정된 광장으로 석유를 뿌리고 뛰쳐나오며 분신자살한다.

2009년 신판 <평전>은 석유를 뒤집어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확인할 수 없는 전태일의 유언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1983년 초판 <전태일 평전>은 김개남이 성냥불을 붙인 사실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