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7년 4월 2일까지 제주도 공산주의자의 무장폭동 촉발된 비극.

정의

제주4․3사건은 공산당의 폭동이다.

개요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및 반란으로서, 남로당 인민해방군은 남한을 북한 김일성 정권 통치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무장 폭력을 사용하였고 또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이 체포되어 사건을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만 9년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살인 납치 방화를 자행하여 제주 사회를 혼란에 빠트렸던 사건이다.[1][2]

원인

남조선노동당의 활동

남한의 단독선거를 둘러싸고 사회 전반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에서 무장대를 조직하여 제주도에서 동조자들과 함께 반대한민국, 인민공화국건설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제주4․3사건의 대강(大綱)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한반도 남부에 공산국가 건설이 불확실해짐에 따라 남로당 중앙당은 남로당 제주도당에 무장폭동 지령을 내려 4․3폭동이 발발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도내 경찰지서 12개를 동시에 습격하여 지서를 불태우고 경찰과 양민을 학살하였으며, 5월 10일에는 도내 각 선거사무소를 습격하여 선거 명부를 탈취하고 선거관리위원들을 살해하며 선거사무소를 불태우는 등 대한민국 건국 선거를 방해하여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의 선거를 파탄시켰다. 그 후에도 남로당 제주인민해방군은 살인과 납치를 자행하면서 도내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1948년 7~8월에는 도민들을 협박하여 북한 정부 수립에 찬성하는 투표를 강제했고, 제주인민해방군 1대 사령관 김달삼 등은 이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조선 창건에 앞장섰으며, 1948년 10월 24일에는 이덕구 제주인민해방군 2대 사령관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군경의 진압과 귀순 공작으로 1949년 봄에 이르자 제주인민해방군 주력부대는 병력이 감소하고, 1949년 6월에는 이덕구가 사살되는 등 폭동의 기운은 일부 진정되었으나, 전투와 진압의 와중에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하였으며, 제주인민해방군 패잔병들은 끝끝내 저항하다가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체포됨으로서 만 9년간에 걸친 폭동이 끝나는 비극적 사건이 제주4․3사건이다.

출처 : 제주4.3진실도민보고서


제주4․3사건이 폭동․반란인 이유 15가지

1.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島당제주도는 1946년 8월 1일 전남에서 분리, 道로 승격하였으나 남로당제주島당은 계속 전남道당의 지휘를 받았다. 그래서 공식 당명도 ‘남로당제주島위원회’였다. 은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고 무장 폭동․반란을 일으켜 1957년 4월 2일까지 대한민국에 항적하며 양민 1,756명을 살해했다.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바로알기󰡕, 41쪽, 2014.10.16.

2. 남로당제주島당은 1948년 5․10제헌의원 선거 때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북제주 2개 선거구 선거를 파탄 내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였다.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10쪽, 2003.12.15.

3. 선거인 등록율 91.7%, 투표율 95.5%로 국민 절대 다수의 참여와 지지로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현암사, 571쪽, 2001.12.5.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에 반대하여 남로당제주島당은 8년 7개월 17일 간 항적하였다.

4. 4․3 주동자 제주인민해방군 초대 사령관 김달삼은 박헌영 지령에 따라 살인 방화 테러로 지하 선거를 실시하여 52,350명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3권, 전예원, 258~259쪽, 1995.3.20.

5. 4․3 주동자 제2대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 이덕구는 1948년 10․19여순반란사건 직후인 10월 24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하고 항적했다.김봉현․김민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오사카 문우사, 165쪽, 1963.12.15.

6. 4․3주동자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이정숙, 문등용은 월북하여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어 북한정권 수립에 앞장섰고, 김남식, 󰡔남로당 연구󰡕 1권, 돌베개, 530~531쪽, 1984.4.25.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조몽구 등은 월북했다가 6․25 때 북한인민군과 함께 남침하여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기 위해 앞장섰다.김찬흡, 󰡔20세기 제주인명사전󰡕, 제주문화원, 39~40, 84, 279~280, 379~380쪽, 2000.3.10.

7. 1948년 4․3사건 발발 후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을 개방할 때까지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356쪽, 2003.12.15.

제주도내 모든 마을 주위에 성을 쌓고 남로당 공비들의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납치를 막기 위하여 남녀노소가 총동원되어 밤낮으로 경비를 섰다.마을 주위 축성(築城) 시기는 마을마다 일정하지 않다. 특히 중산간 마을은 소개령과 그 해제로 인한 복귀 및 파괴된 주택재건 시기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안덕면 화순리는 1948년 8월, 애월읍 납읍리는 1949.4.29. 소개령 해제 이후부터이다.

8. 6․25전쟁 직후 남로당제주島당은 각 읍․면 별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여 빨치산과 함께 공세를 강화하고, 북한인민군이 상륙하면 그들과 합세하여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했다.김봉현․김민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오사카 문우사, 257쪽, 1963.12.15.

9. 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들은 인공기를 곳곳에 게양하여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며 건국 인사들을 살해하고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제주4․3연구소, ≪제주항쟁≫ 창간호, 실천문학사, 181쪽, 1991. 김봉현․김민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일본 오사카 문우사, 153~154쪽, 1963.12.15.

10.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를 의결하면서 제주4․3사건의 성격을 ‘제주도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관보≫ 제14호, 1948.11.17.

11. 제주4․3발발의 주체는 남로당이고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이며 남로당 강령은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입각한 공산주의체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12.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CNN방송에 출연하여 ‘제주4․3사건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전 세계에 천명하였다. ≪한라일보≫, ‘4.3’ 공산당 폭동으로 발생. 1998.11.24.

13. 4․3폭동의 주체인 남로당 세력들이 남긴 유일한 문서인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1948년 3월 중순경 상부로부터 무장 반격 지령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있다. 14. 남로당제주島당 대정면당 위원장 이운방은 “4․3주동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 건설이고”라고 증언했다. 제주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 1권, 한울, 198쪽, 1989. 4. 3.

15. 남로당 제주도민전 문화부장으로 4․3폭동의 두령급이었던 김봉현고문승, 󰡔제주사람들의 설움󰡕, 326쪽. 김봉현은 김달삼 휘하 2․7지대장으로 나타난다. 이 일본으로 도피해서 김민주와 함께 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도 4․3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이라고 명시했다. 김봉현․김민주,󰡔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오사카 문우사, 113, 116, 148쪽, 1963.12.15.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