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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소설 《아리랑》과 역사 왜곡 논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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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9일 (월) 10:14 판

함께 보기: 이승만 TV의 "황당무계 <아리랑>" 강의


조정래의 《아리랑》 1권 표지


일러두기

(1) 다음 내용은 소위 조정래의 근현대사 3부작(또는 근현대사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인, 대하(大河) 역사소설 《아리랑》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쟁을 다루고 있다. 즉 역사소설의 두 축 가운데 문학적 완성도나 성취도가 아닌, 역사소설의 근간이 되는 사료(史料)의 객관성과 사실성, 이에 입각한 정직한 해석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2) 더불어 이 문서는 이영훈, “황당무계 《아리랑》”,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4~32쪽에서 출발하되, 몇 가지 추가적인 설명을 더하여 작성하였다. 그런데 이영훈의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두 편의 논문에서 출발하였고, 그 논문의 내용이 《반일 종족주의》에 비하여 구성 및 내용이 더 치밀하다.

이영훈,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 - ④ 조정래론”, 《시대정신》 35호, 시대정신, 2007 여름.[1]

이영훈, “김제 역사의 본류에 진입 못하고 이방인으로 맴돈 조정래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구별조차 못하는 MBC”, 《시대정신》 36호, 시대정신, 2007 가을.[2]

(3) 현재 장기 휴간 상태인 계간지 《시대정신》은 주요 대학 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등에서도 전자책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검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영훈의 논문 원문은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아리랑》의 이념적 지향

이영훈의 관점에 따르면, 조정래의 창작정신은 한마디로 좌파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역사소설가로서 그에게 큰 명성과 부를 안겨다 준, 근현대사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태백산맥》(1986~1989)은 널리 알려진 대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한 좌파 정치세력에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공안당국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은 적도 있다.
이에 비하여, 연작 중에서는 두 번째이나 시기적으로는 연작 가운데 가장 앞선 때를 다루는 《아리랑》(1990~1994)의 기본정신은 민족주의다. 이 작품에서 좌파 이념의 지향성은 그렇게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시대를 무대로 하기 때문에 좌파 이념보다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정치적, 이념적 지향은 무정부주의에 가깝다고 하겠다.
조정래는 근현대사 3부작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좌파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조정래는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좌파민족주의가 한국 정치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기 전부터 이를 소설 형태로 보급하는 데 진력하였다. 역사적 우연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199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가치 지향 변화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제시하는 이념적 지향과는 정반대로 시장은 그의 이런 선구적 노력에 대하여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현재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였던 전남 보성과 《아리랑》의 무대 전북 김제에는 각각 ‘태백산맥 문학관’과 ‘아리랑 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2017년 11월에는 그의 고향인 전남 고흥에 그의 아버지 시조시인 조종현과 그의 아내 시인 김초혜까지도 기념하는 ‘조정래 가족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시장에서의 그의 성공과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소설로서의《아리랑》이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

역사소설의 두 유형

역사가의 관점에서 역사소설을 해석한다면, 우선 다음과 같이 역사소설의 유형을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첫째는 작품의 소재로 채택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 남아 전하는 사료가 너무도 적어, 그 구성과 내용이 거의 저자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장대하게 허구화되는 유형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역사학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딱히 시비를 걸 만한 연대기적 수준의 사실 왜곡이 보이지는 않는다. [1]
둘째는 작품의 소재가 된 사건과 인물이, 그것이 소비되는 시대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속하여 이와 관련한 사료가 풍부하게 전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 활동한 인물로 작품이 구성되기 때문에, 보통의 독자들은 연대기적 형식의 역사서라는 인식으로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우선 남아 있는 사료를 섭렵하여 연대기적 사실 관계를 충실히 배열할 필요가 있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료가 아무리 많다고 하나 역사적 사건의 전모를 복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남아 전하는 사료는 본질적으로 우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역사학이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부딪치는 이런 제약 조건이 역사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건의 시간적 배열 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저자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공간을 채워간다.

《아리랑》의 역사 문제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

조정래의 《아리랑》은 둘째 유형의 역사소설에 속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04~1945년 식민지기다.
작품은 1904년 러일전쟁부터 시작하여 을사조약, 의병운동, 한일합방, 조선토지조사사업, 3·1 운동,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관동대지진, 농민·노동운동, 산미증식계획, 광주학생사건, 적색노조운동, 동북항일연군, 전시기의 징용, 해방에 이르기까지 죽 펼쳐진 당시의 연대기적 사건들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소설의 무대도 그 연대기적 사실에 따라 조선, 하와이, 만주, 중국, 일본 등으로 종횡무진으로 바뀐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각 지역마다, 그의 이념과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을 통해 주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기탄없이 드러내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리랑》은, 일반 독자에게는 소설의 형식을 빌리긴 했으나 식민지기에 관한 통사적 역사서로 읽힐 수밖에 없다.
조정래 역시 그 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소설을 끝낸 뒤 그는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구체적이며 총체적으로 알리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리랑》 제12권, 323쪽·)

《아리랑》에서 묘사된 무책임한 역사 왜곡의 증거

경찰소장의 즉결 총살 장면 묘사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장악한 다음 곧바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1910~1918, 이하 ‘사업’으로 약칭)을 그린 다음 장면을 보자. 이 장면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토지조사사업을 다룬 이 부분은 역사적 의미의 부각뿐만 아니라 소설적 형상화에서도 가장 빼어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분이다”라고 극찬을 받고 있다.

“에에 또, 지금부터 중대 사실을 공포하는 바이니 다들 똑똑히 들어라. 저기 묶여 있는 차갑수는 어제 지주총대에게 폭행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 그 만행은 바로 총독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대 사업인 토지조사사업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죄인 차갑수는 경찰령에 의하여 총살형에 처한다!”

니뽄도를 빼들고 선 주재소장의 칼칼한 외침이었다. <중략>
“사겨억 준비!”
주재소장이 니뽄도를 치켜들며 외쳤다. 네 명의 순사가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발사아.”

총소리가 진동했다. 차 서방의 몸이 불쑥 솟기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리랑》4권, 81~82쪽)


이 장면은 전북 김제군 죽산면 외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여기서 차갑수라는 농민이 토지를 신고하자, 지주총대(地主總代, 지주 대표)가 신고서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소중한 토지를 빼앗기게 된 차갑수가 참다못해 지주총대의 가슴을 밀치고, 뒤로 넘어진 지주총대는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김제경찰서 죽산주재소의 소장이 차갑수를 외리 마을의 당산나무에 결박한 다음 즉결로 총살에 처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일선 주재소의 경찰이 민간인을 즉결 총살하는 장면은, 군내의 다른 동네를 무대로 소설에서 한 번 더 반복되고 있다.(4권, 279~280쪽) 전북 익산의 한 농민이 농민이 지주총대를 괭이로 찍어 죽였는데, 그날로 총살을 당하였다.(4권, 65쪽) 그리고 ‘사업’ 전 기간에 걸쳐 이러한 즉결례가 전국적으로 4000여 건이나 되었다고 소설에서는 전하고 있다. (5권, 343쪽 )
또한 소설의 서술자에 따르면, 총독부가 ‘사업’을 시행한 목적은 토지의 수탈에 있었다.(4권, 51쪽) 이에 덩달아 거의 광적으로 토지 수탈에 매진하는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친일파들의 악독한 음모와 노골적인 악행이 ‘있을 법하다’는 식의 소설적 상상력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래도 경찰에 의한 즉결 총살형은 없었음을 잘 알았다

이 장면과 관련해, 소설의 서술자는 경찰에 의한 즉결 총살이 그 당시 민간에서 당연하게 벌어졌던 사건연대기 수준의 사건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서술자가 ‘경찰령’을 언급하면서 즉결 총살의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를 사실로 믿을 수밖에는 없다. 소설의 다른 곳에서 서술자는, 그 정식 명칭이 ‘조선경찰령’이며,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방해를 하거나 반대를 하는 세력이 있을 시는 가차없이 제거하고 일소하기 위해”(3권, 173쪽), “사람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에 부여하였다(3권, 180)”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즉결 총살형은 ‘사업’ 당시에 있지도 않았으며,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1) 첫째, 지금까지 ‘사업’에 관한 논문이나 연구서에서 그런 사건이 소개된 적이 없으며, 더 나아가 당시의 신문과 잡지가 그러한 사건을 보도한 적도 없었다. 실제로 있었다면 언론이 보도를 놓칠 리 없는, 큰 사건일 텐데도 말이다.


(2) 둘째, 기록에 따르면 ‘사업’의 한복판이었던 1913년 한 해에 53명이 살인과 강도의 죄목으로 모두 복심(覆審)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곧 일선 경찰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을 유치장에 구류하거나 벌금을 과할 수 있는 즉결 처분이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1910년 12월에 발포된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가 그 모법(模法)이며, 그에 근거하여 1912년 3월 ‘경찰범처벌규칙(警察犯處罰規則)’이 공포되었다. 여기에는 즉결에 처할 수 있는 경범죄 87종이 나열되어 있다. 가령 제1항은 ‘이유 없이 남의 거주나 건축물이나 선박에 잠복한 자’이다. 즉 소설에서 묘사된 종류 또는 정도의 사건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조정래 역시 당시 이런 법령과 규칙의 존재를 분명히 알았다. 식민지 시기 초기 발포된 여러 법령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바로 이 ‘경찰범처벌규칙’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3권, 68쪽) 뒤집어 보면, 그가 소설에서 밝힌 ‘조선경찰령’이란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태연히 그러한 법령을 만들어 일개 경찰이 사람을 즉결 총살하는 장면을 두 번이나 연출하였다. 그리고 ‘사업’ 전 기간에 걸쳐 이런 사례가 4000여 건이나 되었다고 종합까지 하고 있다.

사실 소설 첫머리에서부터 이런 가공의 역사적 사실을 만드는 기교(?)가 선보이고 있다. 소설 1권의 30, 32쪽을 보면, 러일전쟁 중인 1904년 7월 한 일본인은 ‘군사경찰훈령’을 그 근거로 삼아 이렇게 말한다. “이달부터 조선 땅의 치안은 모두 우리 일본군이 맡게 되었다. 그게 바로 너의 임금님이 결정한 사항이다” 그렇지만 그런 훈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시마(千島) 비행장 대량학살 장면

드디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944년 초여름경이다. 일본군은 거짓 공습경보를 울려 1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무자들을 방공호에 가두었다. 그리고선 30분간 수류탄을 던져 넣고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몰살시켰다. 방공호 입구는 콘크리트로 봉해졌다. 방공호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시뻘건 피였다. 기관총은 30분 이상 난사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피는 도랑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략......) 그곳에 징용으로 끌려온 1천여 명은 결국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었다. 지시마 열도 여러 섬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미 4천여 명이 죽어갔던 것이다. (12권, 158쪽)


위 인용문은 1944년 지시마 열도에서 있었다는 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지시마 열도는 쿠릴 열도를 말하는데, 현재 러시아령이지만 1945년까지는 일본령이었다. 그곳의 에토로후 섬(擇捉島) 히토카쓰푸 만(單冠灣)에서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가 출발한 바 있다. 그 만큼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1943년 이후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어 미군이 북쪽에서부터 지시마 열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지시마 열도를 급히 군사기지화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고, 이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발되어 그 공사판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인용한 《아리랑》 제12권의 45장 「당신은 아는가」는 그 비극적인 공사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 장면은 논리성과 객관성은 포기한 뒤 비극적 미학을 완성한 데 지나지 않는다

지시마 열도는 북으로는 캄차카 반도와 남으로는 홋카이도(北海道)를 연결하는 약 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1943년 여름부터 벌어진 대규모 군사 토목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슈무슈 섬(占守島)에서의 가타오카(片岡) 항공기지 방공터널공사와 에토로후 섬(擇捉島)의 덴네루(天寧) 항공기지공사가 대표적이었다. 전자는 스가하라구미(菅原組)라는 토목회사가, 후자는 세자키구미(■崎組)라는 토목회사가 일본 해군의 청부를 맡아 진행하였다. 짐작컨대 이 두 공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소설의 소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 따르면 이 공사는 비행장 활주로를 닦고 주변 산기슭에 비행기 격납고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공사가 벌어진 섬과 비행장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2]
이 작품이 ‘역사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시공간의 설정 기법은 무책임한 일이다.

(1) 지시마 열도의 조선인들의 죽음은 학살 때문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에서 묘사한 지시마 열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은 현실에서 벌어진 적이 없다.
기록을 검토해 보면 공사판에서 조선인 노무자가 많이 희생되기는 하였다. 가령 슈무슈 섬의 가타오카(片岡) 비행장에는 1943년 8월 이후 500~600명의 군속이 하나의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이 가운데 조선인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공사를 담당한 스가하라구미의 숙사(宿舍)에는 매일 사망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1944년 9월 에토로후 섬의 토목공사에도 조선인 650명과 일본인 350명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1945년 5월까지 백수십 명이 사망하였고, 2백 명이 넘은 사람들이 미치거나 병들어 송환되었다.

그런데 이들 노무자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전염병으로, 열악한 작업조건과 불결한 위생상태가 그 원인이었다. 소설에서도 이 점은 잘 알고 있어서인지, 그 처참한 환경 묘사가 생생히 펼쳐져 있다. 다만 작품에서 말하는 전염병은 호열자가 아니라 발진티푸스였다. 그 북방 지역은 호열자가 발생할 환경이 아니다.

(2) 소설 안에서도 일본군의 학살 동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

이 소설이 역사에 기반한, 사실주의적 묘사와 진술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허구적 사건이라도 해도 현실적인 적합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중에 노출되어 있는 비행장 활주로와 격납고 시설이 학살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한 군사 기밀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학살이 이루어진 때를 1944년 초여름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슈무슈 섬과 에토로후 섬에서는 1944년 말까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 해 초여름은 많은 비용을 들여 조선에서부터 끌어 온 노무자들을 학살하기엔 너무 이르다.
더욱이 관련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미군에 밀려 지시마 열도에서 홋카이도로 철수하는 것은 1945년 봄이다. 그때 상당수의 노무자도 함께 철수하여 홋카이도의 다른 공사판에 투입되었다. 사할린의 미쓰이(三井) 탄광으로 철수한 약 2000명의 조선인 노무자도 있었다. 그들은 영양실조로 다리도 제대로 못 들 정도였다.

즉 만약 이들 노무자들을 부려 먹는 입장이라면 이렇게 끝까지 끌고다니면서 부려먹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전쟁 막바지에 새 인력을 동원할 수도 없고, 또 동원할 여력도 없기 때문에 이미 있는 인력을 끝까지 부려먹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 4000명씩이나 그 아까운 노동력을 한데 몰아 넣고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

자연 환경까지도 낭만화시키다 – 김제 · 만경 평야의 정치성 짙은 문학적 묘사

《아리랑》의 주 무대는 전북 김제와 군산이다. 이 작품은 김제 · 만경평야를 걸어 군산으로 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후 공간은 조선, 미국, 만주, 중국, 일본으로 변화무쌍하게 확장되고, 조선 내에서도 서울, 원산, 목포 등으로 분주하게 옮겨진다. 그러나 언제나 다시 초점은 김제와 군산으로 돌아온다.

《아리랑》에서 김제ㆍ만경평야는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 내고 있는”(1권, 11쪽) 넓은 평야로서 “살찐 벼들의 부피감으로 하여 보드랍고 폭신하고 두툼하고 묵직한 질감의 초록색”이며, “그러한 색감에 그것이 모두 식량이라는 생각까지 곁들이게 되면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한”(1권, 143쪽) 들판이다. 그리하여 그곳은 “반도의 척박한 땅에 다행히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거기서 나는 곡식으로 이 땅의 목숨 칠 할이 먹고사는”(1권, 12) 곡창지대로 그려진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그 조선의 곡창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지주의 손으로 들어간다. 김제·만경평야의 풍요로운 초록색을 문학적 기교를 한껏 살펴 표현함으로써, 실은 그곳의 토지들이 야금야금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었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지게 된다.

토지의 비옥함과 수려한 풍광을 묘사하는 동시에, 서술자는 가끔씩 실제 역사상의 주요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킨다. 그곳의 토지를 일본인에게 가장 대규모로 팔아넘긴 사람은 다름아닌 매국노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1898년 3월부터 그해 말까지 전라북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 소설에 따르면 그때 이완용은 김제군 진봉면에 3000석락 내지 5000 석락의 대규모 토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소설 속의 가상의 이야기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완용이 그 거대한 토지를 모두 일본인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설명대로라면, 이완용은 1905년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김제 · 만경평야에 있는 토지부터 먼저 팔아먹은 셈이다.

그러니 김제 · 만경 평야에 대한 서술자의 관심은 각별히 커질 수밖에 없다.

농업의 기본도 모르면서 펼쳐진 문학적 묘사가 진정성을 갖출 수 있나

(1) 19세기까지 김제 · 만경 평야에는 정교한 수리 시설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논농사는 원래 계간농업(溪間農業)이었고 이 때문에 산간지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크게 보면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농업은 이 계간농업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평탄한 평야지대가 비옥한 논농사지대로 바뀌기 위해서는 정교한 수리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즉 풍부한 수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위에 물을 보내고 빼는 공학에 기초한 수리시설을 말한다. 19세기의 김제·만경평야는 이러한 수리시설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공공 기능이 후대로 올수록 취약해지면서, 그나마 있었던 시설조차 허물어져 갔다. 결국 조금만 비가 오지 않거나 조금만 비가 내려도 재난이 연속되는 상황이었다. 곳곳에 버려진 땅이 널렸고, 갈대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었다. 밤이면 도처에 출몰하는 늑대 울음으로 더욱 황량한 들판이었다. [3] 즉 소설 속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묵직한 질감의 초록색’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이야기다.

(2) 소설에서 그토록 증오하는 식민시기에 근대화된 수리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랬던 곳이 오늘날과 같은 풍요로운 농업지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기에 걸친 수리사업 때문이었다. 황폐한 땅을 헐값으로 사들인 일본인 농장주들이 그 수리사업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 대한제국의 수리조합조례(水利組合條例)가 발포되고 가장 먼저 생긴 수리조합이 군산에 본부를 둔 옥천서부수리조합(沃溝西部水利組合)이다. 그 뒤 1909년까지 임익(臨益)수리조합, 임피중부(臨陂中部)수리조합, 임익남부(臨益南部)수리조합, 전익(全益)수리조합이 차례로 생겨났다. 1910년까지 세워진 7개의 수리조합 가운데 군산 · 김제 일대에서만 5개의 조합이 생긴 것이다.


(3) 식민 시기에 이룬 근대화의 성과를 나타내는 부분에는 침묵하는 전략

위와 같은 변화가 생겨났다고 해도 여전히 이 지역의 농업은 자연 재해에 너무도 취약하였다.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한 것이 바로 1925년에 설립 인가된 동진수리조합(東津水利組合)이다. 이 조합의 발상은 전북 진안과 순창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여수만으로 빠지는 섬진강의 풍부한 물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1910년대에 발달한 항공지도법이 이 같은 발상의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공사는 섬진강을 댐으로 막은 다음 김제 방향의 산 속으로 터널을 뚫어 동진강으로 물을 역류시킨 뒤, 동진강 곳곳에 취수구를 설치하여 김제, 정읍, 태인, 부안 등 호남평야의 구석구석까지 농업용수를 풍부하게 공급한다는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이 댐은 우여곡절 끝에 1940년에 착수되어 1961년에 완공된 섬진강 다목적댐이었다. 수몰되기까지 남한 지역에 존재한 가장 큰 댐이요, 저수지였다.
물론 공사계획이 발표되자 댐으로 수몰당할 지구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일대 소란이 발생하였다. 1919년 측량기술자들이 최초로 수몰 예정지구에 들어갔다가 주민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였고, 기타 크고 작은 충돌과 민원을 포함하여 1920년대에 전개된 동진수리조합 반대운동은 그 규모나 강도에서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수리조합이 설립된 이후에도 기존 수리 체계의 변동에 따른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말썽이 이어졌다.
그 같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10년대까지 곳곳에 갈대가 무성했던 황량한 들판이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아리랑》 전권에 걸쳐 동진수리조합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사전 조사에 충실했을 저자가 식민지기의 수리조합과 그에 대한 반대운동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더 나아가 소설에서는

“1929년경 김제 동척농장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청년회가 개입하여 소작쟁의를 수리조합 반대운동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9권 52, 61, 65~66쪽)


만 하지 수리조합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 그 지역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작품이라면 당연히 동진수리조합이 거론되어야 한다.

또한 소설에서는

1920년대 초반 일본 농업회사 후지흥업(不二興業)이 간척공사를 벌였다. 3년간에 걸친 공사의 결과로 2천5백 정보의 새로운 농지가 조성되었다. 그 농지의 용수원는 간척지 한복판의 넓이 97만 평의 저수지였다.(7권 14, 232쪽)


라고만 하지, 여기서도 후지흥업의 간척지가 김제군의 어느 면인지, 그 거대한 저수지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지 않다.

운암제와 동진강으로 대표되는 김제평야의 수리사업은 식민지기 농촌 개발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아리랑》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주 무대는 바로 이 곳이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그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것이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것이 분명한 지역의 역사가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때에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소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일본인 지주와 친일파의 수탈뿐이기 때문이다. 소설 내적인 논리로 보자면 황무지에서 무슨 수탈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 이 지역에 관한 경제사 연구들은 황량한 미간지가 비옥한 농업지대로 개발되자 인구가 몰려들고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소설설에서처럼 빼앗기고 쫓겨나 만주로 내몰린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분노와 증오의 광기로 얼룩진 작품

조정래는「작가의 말」에서 일제하 36년 동안 일제의 총칼에 학살당한 우리 동포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라고 질문을 던진 뒤, “나는 그 어림숫자를 30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잡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가 《아리랑》을 쓰게 된 목적도 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300만~400만 명이면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규모와 같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은 단 3년간 학살당했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조선인은 36년간 조금씩 나누어 학살당한 셈이다. 죽음의 고통을 따져 보았을 때, 조정래는 조선인 쪽이 단연 크다고 말한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논리에서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들은 어찌하여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알면서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어림숫자도 모르는 몽매한 군상이 되었는가를 개탄한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피학살자가 300만~400만이라는 그의 설명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1910년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는 대략 1600만 명, 330만 가호 정도인데, 이에 의거하면 평균적으로 집집마다 1명의 희생자가 난 셈이다. 그 시대의 호적이 거의 남아 있으니까 그것을 보면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금방 확인된다. 결국 조정래가 말하듯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한 대로 분노와 증오로 역사에 얼룩을 뿌려 가며《아리랑》을 이어간 셈이 된 것이다. 조정래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끝내 승리한 조선인의 역사를 쓰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 소설의 마지막은 전혀 다르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만주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공격한다. 조선인이 일본의 앞잡이였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리고 소설은 여기서 갑자기 끝이 난다. 승리가 아니라 구질구질한 패배와 분노만이 순환되는 역사로 끝을 맺고 만다.

참고 문헌

  • 이영훈, “황당무계 《아리랑》”,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4~32쪽.
  • 이영훈,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 - ④ 조정래론”, 《시대정신》 35호, 시대정신, 2007 여름.[3]
  • 이영훈, “김제 역사의 본류에 진입 못하고 이방인으로 맴돈 조정래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구별조차 못하는 MBC”, 《시대정신》 36호, 시대정신, 2007 가을.[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리랑 문학관" [5]
  • "조정래, "내 이름으로 세 번째 문학관, 관리 잘 할 것" ", 연합뉴스, 2017. 11. 30. [6]

각주

  1. 물론 문학적 해석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이다. - 편집자 주
  2. 소설과 같은 허구 서사에서 이와 같은 구성은 흔한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의도가 있지만 그 공통점은 바로 ‘정치성’에 있다. - 편집자 주
  3. 이에 대해서는 당시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호의적이지만 객관적인 묘사로 충분히 입증 가능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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