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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天元突破 グレンラガン)'''은 2007년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TV도쿄에서 방영한 27부작 애니매이션이다. [[에반게리온|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유명한 [[가이낙스]]의 작품이다.  
'''천원돌파 그렌라간(天元突破 グレンラガン)'''은 2007년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TV도쿄에서 방영한 27부작 애니매이션이다. [[에반게리온|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유명한 [[가이낙스]]의 작품이다.  


드릴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여 '인간은 드릴을 단 한바퀴만 돌려도 작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형상화하여, 인간이 가진 무한한 발전성과 그를 믿는 신념과 노력을 찬양한다.  
드릴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여 '인간은 드릴을 단 한바퀴만 돌려도 작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형상화를 통해 인간이 가진 무한한 발전성과 이를 믿는 신념, 이를 향한 노력을 찬양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발전성의 무분별함이 결국 우주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외계의 다른 종족과 부딛치게 되는데, 제목에 있는 천원돌파란 인간의 무궁무진한 발전성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우주적 위협조차도 긍정적인 인간의 발전성이 극복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발전성의 무분별함이 결국 우주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외계의 다른 종족과 부딛치게 되는데, 제목에 있는 천원돌파란 인간의 무궁무진한 발전성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우주적 위협조차도 긍정적인 인간의 발전성이 극복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2019년 7월 30일 (화) 10:24 판

Tengen Toppa Gurren Lagann

천원돌파 그렌라간(天元突破 グレンラガン)은 2007년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TV도쿄에서 방영한 27부작 애니매이션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유명한 가이낙스의 작품이다.

드릴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여 '인간은 드릴을 단 한바퀴만 돌려도 작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형상화를 통해 인간이 가진 무한한 발전성과 이를 믿는 신념, 이를 향한 노력을 찬양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발전성의 무분별함이 결국 우주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외계의 다른 종족과 부딛치게 되는데, 제목에 있는 천원돌파란 인간의 무궁무진한 발전성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우주적 위협조차도 긍정적인 인간의 발전성이 극복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개요

가이낙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부터 11년이라는 오랜 공백을 깨고 로봇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주인공을 목표로 제작하게 되었다는데, 실제로도 당시 그렌라간의 꿈이 매우 야무졌다. 건담 시리즈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지만, 가이낙스는 건담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이뤄내고 그 위엄을 몸소 체감한 명작 신세기 에반게리온까지도 돌파하겠다는 대단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가이낙스의 독립성도 이 시점에서 슬슬 보이려고 했던 것이, 그들의 이전 작품들은 전부 타사와 함께 제작한 합작 형태였던 반면 이 작품은 가이낙스만이 순수하게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단독으로 제작한 첫 번째 TV 애니메이션이 탄생하게 되었다.

내용

아득히 머나먼 미래.

사람들은 땅속에 구멍을 파서 집을 짓고 가축을 기르며, 때때로 일어나는 지진과 낙반에 겁을 먹으며 수백 년 동안이나 마치 숨을 죽이듯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 마을의 일원 · 시몬.

말수가 적고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러, 언제나 형처럼 따르고 있는 청년 카미나의 뒤로 한 발 물러나 있는 소년 시몬. 어느 날, 마을을 넓히기 위해 구멍을 파던 소년 시몬은 파들어간 곳에서 우연히 신비한 빛을 내는 작은 드릴을 발견한다. 그리고, 시몬의 형님뻘인 청년·카미나. 그는 마을 위에는 '지상'이 존재한다면서 그랜단이라는 깡패 그룹을 이끌고 사람들에게 천정(天井)을 돌파해 밖으로 나가자고 주장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지진과 함께 마을의 천정이 붕괴하면서 거대한 로봇이 떨어져 간다!

카미나는 「역시 지상은 있었다!」 라고 확신하지만, 로봇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존속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무모하게도 마을에서 날뛰는 로봇에 맞서려고 한다. 그 때, 다시 지상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왔다. 그것은 거대한 소총을 가진 소녀 요코였다. 그는 로봇을 지상에서 쫓아온 것이다. 그러나 라이플의 위력으로는 쓰러뜨리기는커녕 발을 묶어두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시몬은, 이전에 땅속에서 파낸 것을 카미나와 요코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얼굴만의 수수께끼 로봇의 머리부분이었는데...

스토리 전개 방식

그렌라간 자체의 스토리는 재밌게도 절망적 현실을 마주하는 현실적인 영웅과, 초인적 영웅을 계속 병렬로 그려나가는 스토리를 주인공인 시몬의 인생 전반에 걸쳐 소년, 청년, 중년의 모습이 모두 묘사되는 일대기의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렌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몬이 조우하는 상황은 항상 엄청나게 절망적인 상황이고, 그 상황은 큰 희생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지도 능력을 보이는 지도자이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속한 현실적인 지도자의 해결책은 '희생을 강요한다'는 부분에서 문제를 낳는다. 그러나 희생은 자원에 의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앞서 말한 '절망적 상황'은 그 자체로써 그 문명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협한다. 확률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희생은 크게 볼 경우 필요악이라 분류 할 수 있겠지만, 이 필요악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이해와 동의가 없는 상황 속에서는 부당한 압제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 희생을 강요하는 지도자는 '적'으로 분류된다. 그런 부당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시몬은 규율에 반하는 집단에 속해, "무리를 넘어 도리를 부순다"는 카미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을 이어받은 그렌단의 깃발 아래 아나키스트적인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이 아나키스트적인 그의 성격은 그가 카미나라는 롤모델을 통해 성장하여 16화 이후 치정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바퀴 돌면 더욱 크기가 커지게 되는 나선이라는 요소를 사용한 작품답게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항상 스케일이 더 커진다, 무려지하에서 우주로. 물론 5화부터 등장하는 이 문제의 큰 골자는 항상 '더 큰 위협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통제와 희생'으로 고정된다.

사실 그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이러나 저러나 괴로운 것이 당연하다. 이런 면모는 가이낙스의 작품세계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자기극복과 전인적 성장이라는 테마를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이낙스의 작품들은 언제나 주인공들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극한 상황을 미리 상정해두고 이에 대해 좌절과 현실 도피로의 방황 가운데서 외부 세계 또는 미지의 존재와의 조우를 통한 대자적 각성을 거쳐 마지막까지 의지를 짜내 현실의 모든 한계를 극복하는 존재론적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유독 가이낙스계 작품들 가운데 시로츠구나 신지 같은 소위 말하는 찌질이형 캐릭터가 많은 것도 이런 기본적인 플롯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렌라간 역시 주인공이 유약한 면모를 갖고 있고, 멘토의 죽음을 목격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겪지만,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여 성장하는 성장물의 플롯을 따른다는 것이 특징이다. XXX는 죽었어 이젠 없어 참조 바람.

사실 이는 비단 가이낙스계 작품만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이낙스의 정신을 뒤이은 트리거가 내놓은 열혈물에서의 주인공들은 성장형보다 완성형 주인공이 많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성장소년만화'라는 장르는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즉 가이낙스계 작품들 중 성장소년만화에 어울리는 찌질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작중 내성적으로 그려지는 대그렌단의 주인공 시몬은, 현실적인 지도자가 강요하는 희생에 대비되게 아군들의 자발적인 희생으로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이에 따라 전체주의적 플롯 및 등장인물의 죽음에 의존하는 플롯은 비판받기도 했다.

카미나와 같이 주인공 시몬이 크게 의지하던 핵심 인물의 죽음을 시몬의 정신적 장벽으로 만들어 작품의 중심을 견인하는 방식은 자립이나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것에 있어 훌륭한 장치가 되어주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희생 플롯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유로 죽는다면 모를까 주인공인 시몬 혹은 그렌단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죽기 때문에, 단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개인을 연상시킨다. 죽음에 대한 묘사도 심한 경우 '이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라는 느낌으로 웃으며까지 즐겁게 죽는다. 일각에서는 이를 카미카제의 은유, 카미카제의 정당화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정치적 요소를 떼놓고 봐도 이런 방식으로 사망하는 것이 한두 번이어야지, 질리도록 등장인물을 희생시키는 플롯을 고수하는 것은 작품 전반에서 주조연들이 죽어가며 주인공의 성장을 촉진하고 비장한 장면을 보여주는 일회용 도구로 쓰인다는 인상을 주어 작품의 몰입도를 해친다.

평가

작화 및 연출

스토리 같은 다른 분야는 제쳐두고 작화 및 연출 면에서만 보더라도, 드릴이라는 날카로운 이미지와 다양한 변형 가능성을 가진 소재가 열혈물이라는 뜨거운 장르와 함께 시각적으로 완벽한 시너지를 이루었다.

당시의 재정난 때문에 동화를 최대한 아끼려고 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 보인다. 가이낙스나 트리거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만들었거나 예산을 아낄수록 짙어지는 이러한 특징이 본작에서 많이 나타난 편이다. 이 문제는 1년 후에도 이어져서, 무려 극장판임에도 작붕신이 추가되었다.

다만 이렇게 그림 인력을 제한받았음에도 움직임을 속도감 있게 만들고 거친 선화를 팍팍 써댄 결과 매우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이 탄생하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붕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건 주로 일상 에피소드, 빠른 연출, 갑작스럽게 그림을 확대할 때 뿐이고 평상시에는 어느 정도 작화 퀄리티를 유지하려는 편이다. 그리고 가이낙스 계열 제작진들이 대개 최종 결전에 작화력을 영혼까지 갈아 몰빵하기 때문에 클라이막스 만큼은가히 열혈물 분야에서의 왕도에 걸맞는 영상미를 보여준다.

스토리 및 각본

분야가 비현실적이고 초인적인 열혈물인 만큼 별 현실적인 생각을 두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중도 하차 없이 꾸준히 시청한다면 그 후로 본작의 대주제인 '인간의 힘과 가능성'을 다룬 희망적인 철학과 심오한 해석 그리고 사이다 같이 가슴을 뚫어주는 주연들의 대사에 심취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이보다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명작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다소 답답한 1부와 3부에서 버티지 못한다면 고구마만 왕창 먹고 끝날 수밖에 없다. 즉 끈기 있게 정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사실 3부가 2부와 4부처럼 고평가를 받지 못하고, 답답하다는 감상평이 많은 이유가 1부처럼 스토리가 진부해서만은 아니다. 1부는 대놓고 짝수 회차마다 일상 에피소드를 끼워넣은 결과 내용 자체가 진부해졌기 때문에 그럴 만 하지만, 3부는 그것보다도 안티 스파이럴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전개된 시몬과 로시우의 대립에서 떨어지는 각본의 개연성과 로시우의 잘못된 판단이 고구마 양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대해선 로시우 아다이 문서도 참조. 다만 열혈물이라는 점에 딱히 관심 없는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3부가 일상 에피소드 주제에 의외로 전개가 빨라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는 평도 존재한다.

어쨌거나 중간중간이 그렇다는 거고, '열혈'이라는 감정이 두드러지는 부분에서는 열혈물이라는 장르를 전제로 뒀을 때 시청차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며, 이것이 단순히 가슴 뜨거운 연출과 명대사 제조기라는 점에서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말로만 '열혈'을 강조하지 않고, 충분히 현실적으로 고뇌하면서 개연성을 부여한 후 위기를 헤쳐나가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의지를 올곧게 만드는 것만으로 적들을 격파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주연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여유를 거쳐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