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최덕신의 묘.[1] 지난 2014년 9월 17일 최덕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정은이 보낸 화환이 놓여 있다.

최덕신(崔德新, 1914.09.17 ~ 1989.11.16)은 군인 출신으로 5.16 직후 외무장관을 지냈고, 이후 서독 등의 대사를 지냈다. 박정희 정부와의 갈등으로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2] 이후 몇 차례 방북 후 1986년 4월 아내 류미영과 함께 월북하여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3] 6.25 당시 공비 토벌을 위해 창설된 육군 제11사단 사단장으로 1951년 2월초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책임이 있다.[4][5][1]

생애

최덕신의 부친 최동오(崔東旿, 1892 ~ 1963)가 제자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간다고 보도한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기사[6]


최덕신은 1945년 해방 후 한국에서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제3사단장,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과 함께 귀국해 한미 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엔 11사단장을 맡아 경남 일대에서 후방 안정화 작업을 맡게 됐는데 이때 수백 명의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연루자로 지탄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그해 10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년부터 4년간 서독주재 대사를 지냈다. 최덕신은 외무장관과 천도교 교령을 지냈지만 천도교 교령 재선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원이 미흡한 데 불만을 품고 해외로 이주, 아내 류미영과 함께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1986년 독일에서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입북 전 민주화운동을 가장한 반정부 활동을 하다 북한으로 넘어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1989년 숨졌다. 최덕신은 북한으로 영주하기 전 74년 주서독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육영수 여사 빈소에 찾아가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처 류미영은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0년 8월에는 북한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류미영은 한국에 있던 차남 최인국과 막내딸 최순애를 만나기도 했다.[7]

부친 최동오(崔東旿, 1892.06.22~1963.09.16)는 북한 김일성이 1926년 봄 정의부(正義府)에서 세운 만주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8]을 3개월여 다닐 때 숙장(塾長)이었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자신이 화성의숙을 다닌 때가 1926년 가을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교육을 해서 중도에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26년 봄에 3개월 가량 다니다 6월에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06.05)이 사망하는 바람에 그만 둔 것이다.

최동오는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제자인 김일성을 만난다며 평양에 갔다 돌아왔으나, 6.25 때 월북했다. 최덕신은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부친이 납북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한다.[9]

최덕신은 화성의숙을 다니던 김일성을 당시 알았을 수도 있다. 그가 월북한 것은 월북한 부친이 사망한 후이지만, 김일성이 부친과의 인연을 거론하며 월북하도록 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월북자 중 남한에서 최고위직을 지낸 인물이다.

아들 최인국의 월북

최덕신은 월북할 때 자녀들은 남한에 남겨두었는데, 둘째 아들 최인국이 월북했다고 북한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가 2019년 7월 6일자 기사로 보도했다.

북 대남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 보도
월북자로서 北고위직 오른 최덕신·류미영 부부 차남
가족 모두 남·북·해외로 뿔뿔이 흩어져…2000년엔 이산가족 상봉도

최인국은 2000년 8월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장으로 서울을 방문한 어머니 류미영을 상봉하기도 했다.

최인국이 고령에 처자를 남겨두고 단독으로 월북한 이면에는 북한에서 부모의 유산과 직책을 물려받아 말년에 지위를 누리며 살아보겠다는 나름대로 상당한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덕신의 장남 최건국은 독일에서 거주하며 윤이상, 송두율 등과 교류하며 반한 활동을 하다 독일에서 숨졌다.[7]

최동오 - 최덕신 - 최인국 3대는 김일성과의 인연을 기화로 가족을 남한에 남겨둔 채 월북하여 남북한 양쪽에서 권력과 지위를 누리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하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