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남국

기원전 인도에서 온 혼전왕자와 캄보디아 현지의 지도자 유엽부인이 혼인을 맺고 부남국을 건국하면서 캄보디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국교는 인도교였고 시바를 숭배했으며 당시 인도지나반도의 왕국들 중에서는 제일 강대한 나라였다. 양나라 사신들의 고문헌과 한글불경 등에서 그 존재가 간간히 언급되나 6세기 중엽에 쇠락하여 속국인 진랍국에 의해 멸망한다.

진랍국

크메르족의 첫 왕국인 진랍국은 범어를 공용어로 정한 후 엄격한 법치제도를 마련하고 점성국(자유월남)을 비롯한 많은 왕국들과 교역을 하며 부국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쇠락하여 수진랍과 육진랍으로 분열하다가 수진랍이 육진랍을 흡수통일하여 크메르제국이 건국된다.

크메르제국

크메르제국은 부남국과 진랍국보다도 번영하여 당시 인도지나의 또다른 강국인 대월국(월맹)도 위협하였다. 이들이 낳은 문화와 언어는 현재 태국과 라오스의 문화와 언어의 뿌리가 되었고 앙코르왓을 비롯하여 거대한 인도교 및 불교사원과 왕릉들이 제국 내의 각지에 건설되었다. 사신 주달관은 이 당시의 크메르제국을 방문한 후 <진랍풍토기>라는 책을 남겼는데 현 캄보디아학계에서도 이 서적을 참고하여 크메르제국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왕족들의 막대한 사치와 강제노역으로 국력이 쇠락하여 민심을 잃었다. 이 틈을 노려 속국인 태국과 라오스가 독립하여 이들에게 패배하고 왕이 천도를 하여 크메르제국은 막을 내린다.

암흑시대

크메르제국의 왕족들은 이웃나라의 위협을 피해 수도를 여러 번 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인도지나의 양대열강인 월남과 태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영토의 대부분을 강탈당하였다. 월남이 완조를 개창한 후에는 장명강 장군을 총지휘관으로 삼은 침략군이 관찰사 썬꾸이를 참수하고 그의 관할 하에 있던 메콩강 삼각주를 강탈한 것으로 캄보디아의 암흑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다가 프랑스군이 월남을 정복하고 태국을 격파하면서 이들의 종속국으로 있었던 캄보디아 또한 프랑스의 속국으로 들어갔다.

제1차 프랑스시대

프랑스군은 월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인도지나연방이라는 이름의 속국으로 묶고 연방수도인 하노이에 총독부를 설치한 뒤 각방에 통감을 보내어 연방총독(총통전권대신)을 대리해 통치하게 하였다. 캄보디아도 명목상으로는 왕실이 국민들을 대표하고 지도했지만 실권은 통감에게 있었다. 이에 반발한 캄보디아인들의 독립운동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대부분 진압되었다.

일제시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캄보디아 역사상 최초로 내각책임제를 도입시키고 노로떰 씨허눅 국왕을 초대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월남인과 캄보디아인의 혼혈인 공산주의자 산옥성과 협력하여 캄보디아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고 시도하였다. 허나 미군의 리틀보이와 팻맨 투하로 항복하여 캄보디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제2차 프랑스시대

프랑스군은 캄보디아를 재점령하여 다시 노로떰 씨허눅 국왕을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씨허눅왕은 수상직에 있으면서 전쟁으로 황폐해진 캄보디아 전반의 복구와 정쟁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는 것에 힘쓰는 반면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프랑스정부와 여러 번 협상한 끝에 1953년 11월 9일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받았다.

캄보디아왕국

씨허눅왕은 갓 독립한 캄보디아의 수상이 되어 각계의 단결을 이룩하고 캄보디아의 문화사업을 부흥시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산옥성의 후신을 자처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월남의 지령을 받고 국론분열을 주도하여 씨허눅왕의 민심을 잃게 하도록 하였다. 이에 씨허눅왕은 반공사상이 투철했던 캄보디아왕실군의 원수 론놀을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론놀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씨허눅왕과 왕족들을 축출하고 크메르공화국을 건국했다.

크메르공화국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론놀은 크메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미군과 자유월남의 지원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유월남의 오정염 대통령과 라오스왕국의 쑤완나 푸마 수상과는 달리 무능과 부패, 독재, 학살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뽈뽓을 총지휘관으로 삼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그 또한 축출되어 미국을 향한 망명길에 오른다.

민주캄보디아

정권을 잡은 뽈뽓은 공산국가를 건국하고 씨허눅왕을 복위하겠다고 국민들을 기만한 뒤 씨허눅왕을 비롯한 왕족들을 왕궁에 가택연금시키고 그 악명높은 킬링필드를 열어 집단학살을 벌였다. 학살의 열기가 높아지면서 뽈뽓의 뒤를 봐주고 있는 월남까지 건드리게 되자 월남인민군은 캄보디아를 점령하여 뽈뽓을 축출했다.

캄보디아인민공화국

월남인민군은 캄보디아에 주둔하여 저항하는 캄보디아인들을 학살하고 각종 물자들을 수탈했으나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친월파인 헹썸린을 국가주석으로 삼은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공화국을 수립하고 뽈뽓정권에 의해 수감된 정치범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캄보디아국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은 캄보디아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헹썸린의 측근인 훈쎈이 캄보디아국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월남의 간섭은 배재되고 공산주의 정책도 폐기되었으며 사유재산의 인정을 시작으로 점차 자본주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UN통치

UN는 황폐해진 캄보디아를 잠정으로 통치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임시권력기구를 설치했다. 이 시기에 뽈뽓정권의 후신들은 차츰차츰 소멸되고 왕정복고의 추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캄보디아왕국

1993년 9월 24일 왕정이 복고되어 캄보디아는 완전히 재건되었다. 씨허눅왕은 왕좌를 되찾았고 그의 아들인 로너릇왕자가 초대 수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훈쎈이 차기 수상이 되었고 씨허눅왕이 요양 중 북경시에서 승하하자 그의 아들인 씨허무니왕자가 현 국왕으로 재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