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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인생==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프러시아 Duchy of Magdeburg 주의 Burg bei Magdeburg에서 귀족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신학 교수였고, 한때 프러시아 프레데릭 대왕의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아버지는 프러시아 세무서에서 근무했다. 클라우제비츠도 12세에 하사관으로 프러시아 군대에 들어가서 중장까지 올랐다.
라인 전투(Rhine Campaigns; 1793~1794)와 나폴레옹 전쟁(1806~1815)에 참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는 예나 전투에 참여하여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어, 1807~1808년에는 자신이 수행하던 August 왕자와 프랑스에 머물렀다.
21세였던 1801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프러시아군사대학(Kriegsakademie)에 입학해서 칸트, 피히테, 슐라이어마허 등을 공부했으며, 이곳에서 장차 개혁 프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 될 Scharnhorst 장군의 주목을 받아 1807~1814년 사이에 진행된 프러시아 군대의 개혁 작업에서 그를 돕는다.
1810년에는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의 Countess Marie von Brühl과 결혼하였다. 그후 부부는 베를린의 상류 엘리트들과 교류한다. 교육 수준이 높았던 아내 마리는 정치계에도 인맥이 있었고, 이것이 남편의 승진과 진적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그의 저작 모음을 편집하고, 출판하고,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프러시아 군대의 나폴레옹 1세와의 강압적인 동맹관계에 반대한 클라우제비츠는 프러시아 군대를 떠나서 러시아원정이 있었던 1812~1813년에는 러시아 제국 군대에서 근무했다. 러시아 군대에 합류한 다른 프러시아 장교와 마찬가지로, 그는 1813년 러시아-독일 병단의 합류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장차 프러시아, 러시아, 영국 군을 연합시켜 나폴레옹과 그의 동맹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Convention of Tauroggen(1812년)에 대한 협상을 도왔다.
1815년 러시아-독일 병단이 프러시아 군대에 통합됨에 따라, 클라우제비츠는 다시 프러시아 군에 대령 신분으로 복귀하였다. 그후 곧 Johann von Thielmann의 3군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워털루전쟁(1815년)의 Ligny 전투와 Wavre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프로시아군사대학의 교장이 되어 1830년까지 근무하였다. 그가 군대로 다시 돌아가자, 유럽의 곳곳에서 발생한 혁명과 폴란드의 위기가 또 한 번의 커다란 유럽 전쟁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는 프로시아가 이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군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폴란드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불행히도, 1831년 그의 상관이었던 Gneisenau 사령관이 콜레라로 사망하자, 콜레라를 막기 위한 방역선을 구축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그도 같은 해 11월 17일에 콜레라로 사망한다.
1832년, 미망인이 된 그의 아내는 전쟁 사상에 관한 그의 대표작을 편집하고, 출판하고, 그것을 소개하는 글을 쓴다. 1816년에 집필을 시작한 "전쟁론"은 결국 완성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전쟁론"의 서문을 집필하였고, 1835년까지 그가 집필한 저서의 대부분을 출판하였다. 아내는 1836년 1월에 사망하였다.

2019년 3월 30일 (토) 00:38 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1831년)는 전쟁의 심리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을 강조한 프러시아 장군이자 군사이론가였다. 가장 유명한 그의 저서인 "전쟁론"(Vom Kriege; On War)은 미완성 유고작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현실주의자였고, 낭만주의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유럽 계몽주의이성주의적 사상에 크게 의존했다.

클라우제비츠은 그의 변증법적 방법론 때문에 헤겔주의자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헤겔과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헤겔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 그는 다양한 요인의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강조하여, 전쟁의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군사적 결정으로 연결되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그는 역사를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충분한 연구를 통해 추출된 추상적 개념의 작업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쟁은 수량화되거나, 지도, 기하학, 그래프 등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었다.

인생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프러시아 Duchy of Magdeburg 주의 Burg bei Magdeburg에서 귀족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신학 교수였고, 한때 프러시아 프레데릭 대왕의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아버지는 프러시아 세무서에서 근무했다. 클라우제비츠도 12세에 하사관으로 프러시아 군대에 들어가서 중장까지 올랐다.

라인 전투(Rhine Campaigns; 1793~1794)와 나폴레옹 전쟁(1806~1815)에 참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는 예나 전투에 참여하여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어, 1807~1808년에는 자신이 수행하던 August 왕자와 프랑스에 머물렀다.

21세였던 1801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프러시아군사대학(Kriegsakademie)에 입학해서 칸트, 피히테, 슐라이어마허 등을 공부했으며, 이곳에서 장차 개혁 프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 될 Scharnhorst 장군의 주목을 받아 1807~1814년 사이에 진행된 프러시아 군대의 개혁 작업에서 그를 돕는다.

1810년에는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의 Countess Marie von Brühl과 결혼하였다. 그후 부부는 베를린의 상류 엘리트들과 교류한다. 교육 수준이 높았던 아내 마리는 정치계에도 인맥이 있었고, 이것이 남편의 승진과 진적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그의 저작 모음을 편집하고, 출판하고,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프러시아 군대의 나폴레옹 1세와의 강압적인 동맹관계에 반대한 클라우제비츠는 프러시아 군대를 떠나서 러시아원정이 있었던 1812~1813년에는 러시아 제국 군대에서 근무했다. 러시아 군대에 합류한 다른 프러시아 장교와 마찬가지로, 그는 1813년 러시아-독일 병단의 합류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장차 프러시아, 러시아, 영국 군을 연합시켜 나폴레옹과 그의 동맹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Convention of Tauroggen(1812년)에 대한 협상을 도왔다.

1815년 러시아-독일 병단이 프러시아 군대에 통합됨에 따라, 클라우제비츠는 다시 프러시아 군에 대령 신분으로 복귀하였다. 그후 곧 Johann von Thielmann의 3군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워털루전쟁(1815년)의 Ligny 전투와 Wavre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프로시아군사대학의 교장이 되어 1830년까지 근무하였다. 그가 군대로 다시 돌아가자, 유럽의 곳곳에서 발생한 혁명과 폴란드의 위기가 또 한 번의 커다란 유럽 전쟁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는 프로시아가 이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군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폴란드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불행히도, 1831년 그의 상관이었던 Gneisenau 사령관이 콜레라로 사망하자, 콜레라를 막기 위한 방역선을 구축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그도 같은 해 11월 17일에 콜레라로 사망한다.

1832년, 미망인이 된 그의 아내는 전쟁 사상에 관한 그의 대표작을 편집하고, 출판하고, 그것을 소개하는 글을 쓴다. 1816년에 집필을 시작한 "전쟁론"은 결국 완성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전쟁론"의 서문을 집필하였고, 1835년까지 그가 집필한 저서의 대부분을 출판하였다. 아내는 1836년 1월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