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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캄보디아 정부는 이 대량 학살 사건을 처리할 재판소의 설치를 위해 UN에 지원을 요청했다. 9년만에 캄보디아 법과 국제법을 절충한 재판소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6년에 판사들의 선서가 진행되었으며, 2007년 1월 18일에는 검사가 5명의 혐의자의 이름을 제시했다. 2009년 9월 19일, 크레르루즈의 2인자였던 Nuon Chea가 전쟁 범죄와 반인권 범죄로 기소되었다. 2014년 8월 7일, 그는 이 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7월 26일에는, S-21 캠프 소장이었던 Kang Kek Iew가 반인권 범죄 혐의로 3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그때 이미 11년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19년으로 감형이 되었다. 그러나 2012년 2월 2일에, 그에 대한 형량은 캄보디아 법원 특별 재판소에 의해 종신형으로 강화되었다.
1997년, 캄보디아 정부는 이 대량 학살 사건을 처리할 재판소의 설치를 위해 UN에 지원을 요청했다. 9년만에 캄보디아 법과 국제법을 절충한 재판소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6년에 판사들의 선서가 진행되었으며, 2007년 1월 18일에는 검사가 5명의 혐의자의 이름을 제시했다. 2009년 9월 19일, 크레르루즈의 2인자였던 Nuon Chea가 전쟁 범죄와 반인권 범죄로 기소되었다. 2014년 8월 7일, 그는 이 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7월 26일에는, S-21 캠프 소장이었던 Kang Kek Iew가 반인권 범죄 혐의로 3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그때 이미 11년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19년으로 감형이 되었다. 그러나 2012년 2월 2일에, 그에 대한 형량은 캄보디아 법원 특별 재판소에 의해 종신형으로 강화되었다.


==매장 장소==
==현장==
가장 유명한 킬링필드는 Choeung Ek 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불교 추모 시설이 있다. 이 시설은 수천 명의 희생자들이 묻혔던 장소 주위에 건축되었다. 희생자들은 프놈펜의 S-21 감옥에서 심문을 당한 뒤에 처형된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묻힌 수십 개의 무덤 중 일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도 있다. 폭우가 온 뒤에는 얕은 무덤에 묻혀있던 시신의 뼈와 옷가지 등이 땅 뒤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추모 공원을 방문하는 온 관광객이 땅에 흩어진 희생자들의 뼈나 이빨을 발견하는 경우드 드물지 않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Tuol Sleng에는 대량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박물관이 있다.
가장 유명한 킬링필드는 Choeung Ek 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불교 추모 시설이 있다. 이 시설은 수천 명의 희생자들이 묻혔던 장소 주위에 건축되었다. 희생자들은 프놈펜의 S-21 감옥에서 심문을 당한 뒤에 처형된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묻힌 수십 개의 무덤 중 일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도 있다. 폭우가 온 뒤에는 얕은 무덤에 묻혀있던 시신의 뼈와 옷가지 등이 땅 뒤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추모 공원을 방문하는 온 관광객이 땅에 흩어진 희생자들의 뼈나 이빨을 발견하는 경우드 드물지 않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Tuol Sleng에는 대량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박물관이 있다.

2019년 1월 25일 (금) 03:47 판

킬링필드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크레르루즈 공산 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수백만의 시신이 묻힌 캄보디아의 다수 지역을 말한다.

DC-Cam Mapping Program과 예일대학교가 20,000개의 시신 매장 지역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최소 1,386,734명의 희생자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질병이나 기아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까지 포함하면 800만 명의 전체 인구 중 170~250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베트남의 캄푸치아(Kampuchea) 침공으로 크메르루즈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학살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크레르루즈 정권은 전문가, 지식인 뿐 아니라 전 정권이나 외국 정부와의 관련성을 의심받는 거의 모든 사람을 처형하였다. 베트남인, 태국인, 중국인, 짬족, 캄보디아 기독교인, 불교 승려 등이 박해의 대상이었다. 크메르루즈 정권의 지도자였던 폴포트에 의해 주도된 이 대량 학살은 냉전 시대 최악의 학살 사건으로 여겨진다.

과정

가벼운 범죄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캄포디아 Angkar 정부에 의해 1차 경고를 받았다. 두 번 이상 경고를 받은 사람들은 재교육 캠프로 보내졌는데, 이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곳에 간 사람들은 용서와 새로운 출발을 약속받으며 범죄(자유시장 경제 활동, 미국 선교사, 국제 구호 단체나 정부 기관과의 접촉, 외국인이나 외부 세계와의 접촉 등)를 자백했지만, 그 결과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서 고문이나 살해당했다.

탄약을 아끼기 위해 살해에는 독약, 창, 죽창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살해당한 사람들은 대량으로 매장되었다.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나무 줄기에 머리를 찧어서 살해한 뒤에 부모가 있는 구덩이 속에 던져지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커서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희생자에게 자기가 묻힐 무덤을 파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형에 가담한 군인들은 주로 농민 출신의 젊은 남녀였다.

반인권 범죄에 대한 재판

1997년, 캄보디아 정부는 이 대량 학살 사건을 처리할 재판소의 설치를 위해 UN에 지원을 요청했다. 9년만에 캄보디아 법과 국제법을 절충한 재판소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6년에 판사들의 선서가 진행되었으며, 2007년 1월 18일에는 검사가 5명의 혐의자의 이름을 제시했다. 2009년 9월 19일, 크레르루즈의 2인자였던 Nuon Chea가 전쟁 범죄와 반인권 범죄로 기소되었다. 2014년 8월 7일, 그는 이 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7월 26일에는, S-21 캠프 소장이었던 Kang Kek Iew가 반인권 범죄 혐의로 3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그때 이미 11년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19년으로 감형이 되었다. 그러나 2012년 2월 2일에, 그에 대한 형량은 캄보디아 법원 특별 재판소에 의해 종신형으로 강화되었다.

현장

가장 유명한 킬링필드는 Choeung Ek 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불교 추모 시설이 있다. 이 시설은 수천 명의 희생자들이 묻혔던 장소 주위에 건축되었다. 희생자들은 프놈펜의 S-21 감옥에서 심문을 당한 뒤에 처형된 사람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묻힌 수십 개의 무덤 중 일부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도 있다. 폭우가 온 뒤에는 얕은 무덤에 묻혀있던 시신의 뼈와 옷가지 등이 땅 뒤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추모 공원을 방문하는 온 관광객이 땅에 흩어진 희생자들의 뼈나 이빨을 발견하는 경우드 드물지 않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Tuol Sleng에는 대량 학살을 기억하기 위한 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