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참. 이 문서 작성자가 [박헌영 외신 인터뷰] 작성자와 같은 분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신탁통치 정국에서 박헌영의 거동을 샤브시나나 강원용의 증언이 부정확하다는 근거를 좀 더 말하자면


1) 샤브시나 말로는 박헌영이 1월초에 평양에 가서 지령을 받고 왔다고 하는데,

  님의 말씀대로 1월1일 박헌영이 하지와 대면했다하고, 1월2일 부터는 이미 찬탁으로 돌변있었는데, 무엇때문에 다시 평양으로 가야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몇년전 제가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중 신탁통치부분만 찾아 읽어본 적이 있는데, 1월 2일 당일 이른 아침에 외신기관과 미국, 소련 등을 향해 조선공산당의 찬탁성명을 무선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처럼 조선공산당의 입장이 180도 뒤바뀐 것이었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는데, 다시 평양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평양에 갈 이유가 있을까요?

2) 샤브시나의 표현은 '1월초'가 아니라 '1월 초순입니다' 1월 2~3일은 정신없이 바쁠 때이고 1월 5일에는 문제의 내외신 기자회견을 했습니다.다음날 부터 사방에서 공격을 당해 정신 없었을 것이고. 이런 사태 때문에 평양에 갔을까요? 그러나 샤브시나도 박헌영이 평양에 간 것은 신탁통치 입장에 관한 지령을 받기 위해 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태수습 방향을 자문받기 위해 간 것은 아니지요?)

3)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박헌영 등 중앙위원이 아니고 권동진 부터 오하영까지 9명이며 중앙위원이 회의 참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앙위원의 명단도 박헌영 뿐 아니라 그 뒤에 북한에 있는 金科奉 金武亭....비현실적입니다.

4) 1945년 12월 31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이라는 기사를 보면, "...31일 오전 9시에 경교동 임정숙사에서 구체안을 토의코자 임정측 지도위원 9명과 90명의 중앙위원이 제1차의 初會合을 하였는 바 金九주석이 과반수회원 참집으로 개회선언을 한 후 위원장 權東鎭의 불건강으로...네. 박헌영이 상임위원 21명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만, 박헌영이 그 회의에 참석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5) 제가 우연히 검색하다가 동아일보 사이트 D-storyⅡ 8 : 송진우 사장 피살 (1)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강원용의 증언을 거론하였는데

....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 강원룡 목사의 회고. 7 강 목사는 이날이 29일 밤이라고 기억했지만 전날인 28일 밤의 착각이었다. 각주8 9 10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45년 12월 29일 밤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큰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어요.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으니까.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어요. 다들 아주 격해 있었습니다..... ”

  각주8 :  김구 주석의 중대발언-독립운동 새로 출발, 1945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탁치제 반대에 대한 긴급조치안 4항과 연합국에 발송할 전문과 그 이유 4항을 결의한 후 임정에서는 각 정당에 대표 2인씩과 6대 종교단체의 대표와 각 신문사 기자의 참집을 요청하야 지난 28일 오후 8시에 약 70명의 애국 동지의 모임을 열게 되었다. 8시 반에 김구 주석 이시영 원로를 중심하야 좌우는 요인이 열석한 후 각 당 각계의 대표 70여명이 일당에 모여 흥분과 울분 속에서 연합회의를 열었다.
  각주9 :  국제정의와 민족보존 위해 불합작운동 전개, 임정 지휘로 국민총동원위원회 설치, 1945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임시정부에서도 사태의 중대성을 느끼고 28일 오후 4시경부터 긴급국무위원회를 개최한 후 바로 각 정당(2인) 각 종교단체(1인) 각 언론기관 대표자를 초청하야 비상대책회의를 동일(同日) 오후 8시 반부터 개최 심경에 이르기까지 백척간두에 서 있는 국운을 구출하고자 백열적 논의를 거듭한 결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금후 임정 국무위원회 지시 하에 일대 민족적 불합작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각주10 :  각계 대표소집, 반대운동 토의, 1945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
이 결의에 의하여 임시정부에서는 28일 밤 8시에 시내 각 정당대표 종교대표와 각 신문사 대표를 소집하고 김구 주석이하 요인 전원이 출석하여 먼저 김구 주석으로부터 신탁통치 반대에 대한 정부의 결의를 말하고 다음에 조소앙 외무부장으로부터 최근의 국제관계와 신탁통치에 대한 설명을 하여 모인 사람들의 주의를 더욱 일으키게 하고….


결론 : 제 생각에는 박헌영은 박병엽의 증언대로 12월28일 밤 8시 김구가 주관하는 회의에 얼굴을 비추었다가 불분명한 상황에 더 이상 끌려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회의 도중에 빠져나와 평양으로 월북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원용의 기억이 오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