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을 만나 민족계열 위주의 건준에 동수의 공산주의자도 넣어 새로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건준은 8월 27일에 민족계열과 공산당측 각 16인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본부는 산수소학교(山手小學校, [日本小學校])에 두었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구성원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吳胤善)의 일을 돕던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당시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에 대해 "국수집 2층에서 조직된 공산당을 돕기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는데, 국수집파(派)는 서울서 온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을까봐 경계했다. 이들은 사무소를 대화숙(大和塾)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계획도 실천도 없었고 시민들도 냉담했다. 8월 26일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는 머리도, 돈도,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1] 즉 평양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세력도 보잘것 없는데다 서울서 온 인텔리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므로 자기들 간에도 불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조만식과 만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대신 공산주의자들도 동수로 참석하는 조직을 만들도록 요구한다. 이에따라 평남건준은 8월 27일 민족계열 16명, 공산주의자 16명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위원장은 조만식(曺晩植)이 맡고, 부위원장은 우파의 오윤선(吳胤善), 공산주의자 현준혁(玄俊赫) 두 사람이 맡는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1945년 8월 27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군의 진주 이후 우익 중심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공산주의자와 우익이 동수의 비율로 하여 성립하였다.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공산주의자와 우익의 연합정권으로 탄생하였으나 구체적인 정책 시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내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의 하나는 토지문제의 해결 방안의 차이였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발표한 3.7제가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에 의해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등 내연하고 있던 갈등은 업무상의 공백을 야기하였다. 이는 11월 11일에 부위원장인 오윤선 김익진 한근조 등 우익인사 일부의 사퇴가 수리되면서 상당한 정도의 조직개편으로 이어졌다. 1945년 말까지 유지되던 연합정권으로서의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는 결국 1946년 1월 5일 모스크바결정에 대한 지지문제로 위원장 조만식 등 우익인사 상당수가 사퇴함으로써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놓여지게 되었다.

인민정치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후일 한국으로 귀순 후에 당시 현준혁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에 협력했다고 하였다.[2]

한재덕의 증언

아래 한재덕의 글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구성원 명단이 나온다.[3]

民族陣營主導權(민족진영주도권)박탈 人民政治委員會(인민정치위원회)조직
…蘇軍政(소군정)의첫事業(사업)은大同團結(대동단결)의破壞(파괴)…
<민족 진영 위원>

조만식(曺晩植), 오윤선(吳胤善), 이윤영(李允榮)[4], 김병연(金炳淵), 노진설(盧鎭卨)[5], 김익진(金翼鎭)[6],
이종현(李宗鉉)[7], 김병서(金秉瑞)[8], 한근조(韓根祖)[9], 박현숙(朴賢淑)[10], 조명식(趙明植), 장이욱(張利郁)[11],
정기수(鄭基秀), 최아립(崔亞立), 홍기주(洪箕疇)[12], 김광진(金洸鎭)[13]

<공산당측 위원>
현준혁(玄俊赫), 김용범(金鎔範)[14], 박정애(朴正愛)[15], 이주연(李周淵)[16], 장시우(張時雨)[17], 김유창(金裕昌),
송창렴(宋昌濂)[18], 허의순(許義淳), 장종식(張鐘植)[19], 최윤옥(崔允玉), 이관엽(李貫燁), 문태영(文泰永),
이성진(李聲鎭), 한재덕(韓載德)[20] 외2명(外二名) (여기에 아직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이 없는 것은 주시할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에 김광진(金洸鎭)[13]을 민족진영에 넣은것은 민족진영측의 오산이었다. 민족진영에서는 전 보성전문학교 교수요, 당시 모공장의 자본주이기도한 김광진(金洸鎭)을 자기진영 사람으로 타산하였으나 그실 그는 그때 공산당원하고 도경리부장의 중책에 있는 간부당원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어제까지는 20 대 2의 비율(위원)로도 불평을 못하던 공산당 측은 쏘련상전의 덕분으로 이제는 15대 17로 오히려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세는 역전하였다.
이것은 생판 억지였다. 이것이 이른바 약소민족의 벗으로서 그 의사를 존중한다는 쏘련 공산주의자들이 해방자로 자처하면서 이땅에 들어와 정복자로 행세하며 벌여놓은 첫 사업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당장 공산화할 야망은 아직도 실현성이 없는만큼 그 두터운 뱃속깊이 감추어두고 우선 공산당이 약간 우세를 차지하게 하는 정도로부터 그 「프로그램」을 발족시키려한 것이다.
그들도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그 주위애 대한 백성들의 신망이 얼마나 크다는 것 를 아는만큼 어떻게해서든지 이를 최대한도로 이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曺)선생을 위원장으로 받들어야 한다는데 대하여는 아무도 이론(異論)을 내놓으려하지 았았다. 「못하였다」 함이 더적절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갑자기 쏘련상전의 덕분으로 우위를 차지하게된 공산당은 신바람이 나게 되고 그 중에서도 김용범(金鎔範)ㆍ박정애(朴正愛) 부부와 장시우(張時雨) 같은 과격분자들은 쏘련상전을 믿고 몹시 덤비게되었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들은 오합지중이었다. 공산측위원중의 근반수인 七명이 「대화숙(大和塾) 동창」이었으며 나머지는 그만정도도 못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쏘련군정하일 망정 쟁쟁한 민족진영 인사들이 이런 어중이 떠중이 공산당들에게 굴하려할리 만무하였다.

이리하여 위원회에서는 사사건건이 양진영이 충돌을 되풀이하고 결국 위원회 자체가 위기에 임하게되었다.
  1. 공산당측 부위원장 현준혁은 며칠 후인 9월 초에 암살 당하는데 배후가 같은 위원인 장시우(張時雨, 1891~1953)라는 설이 유력하다.
  2. 김용범은 10월 13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위원장이 된다. 아직 김일성을 내세울 단계가 아니라 대리로 나선 것이라 한다. 1947년에 죽었다. 암살이라는 설도 있다.[21]
  3. 박정애는 김용범의 처인데, 이후 상당한 직책을 맡는다.
  4. 장시우는 북한 초대 내각의 상상(商相)이 된다.
  5. (여기에 아직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이 없는 것은 주시할 사실이다.) 부분은 1965년 책으로 간행할 때 삽입한 것이다.[3] 해방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한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한재덕도 김일성이 당시 아직 평양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이런 말을 넣었다. 오늘날 북한은 소련군이 아니라 김일성이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역사를 조작해 놓았다.
  6. 박정애는 소련의 첩보 요원으로 이르쿠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가서 교육을 받았고 지하활동을 위해서 김용범과 위장결혼을 하고 국내로 파견되었다고 한다.[22]
공산당측 위원 중 현준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오영진이 말한 소위 "국수집파(派)"인 것 같다. 이들은 해방 초에는 지리멸렬하다가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후부터 아연 활기를 띄게 된다.

오영진의 증언

오영진(吳泳鎭, 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서울 : 中央文化社, 1983 (복간본) pp.75~76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平安南道 人民政治委員會)

위원장(委員長) 조만식(曺晩植) (건준·建準)
부위원장(副委員長) 현준혁(玄俊赫) (공산당·共産黨)
동(同) 오윤선(吳胤善) (建)
총무부장(總務部長) 이주연(李周淵) (共)
치안부장(治安部長) 김익진(金翼鎭) (建)
사법부장(司法部長) 장시우(張時雨) (共)
광공부장(鑛工部長) 김광진(金洸鎭) (共)
농림부장(農林部長) 정기수(鄭基秀) (建)
재정부장(財政部長) 김병연(金炳淵) (建)
교육부장(敎育部長) 장종식(張鐘植) (共)
운수부장(運輸部長) 이종현(李宗鉉) (建)
인사부장(人事部長) 이윤영(李允榮) (建)

평양시(平壤市)의 부서(部署)는
평양시장(平壤市長) 한근조(韓根祖) (建)
동 부시장(同副市長) 허의순(許義淳) (共)
평양치안서장(平壤治安署長) 송창렴(宋昌濂) (共)[18][23]
서평양서장(西平壤署長) 윤무선(尹武璿) (建)
동평양서장(東平壤署長) 유기선(劉基善) (建)[23][24]

대동군 인민정치위원장(大同郡 人民政治委員長) 홍기주(洪箕疇) (建)
  • 본부(本部)는 종래(從來)의 행정기관 건물(行政機關 建物)은 모두 군사령부(軍司令部)가 점령(占領)하였으므로 산수소학교(山手小學校, [日本小學校])로 정(定)하였다.
  • 당시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보안부 보안과장(平南人民政治委員會 保安部 保安課長)으로 박현각(朴鉉珏, 1907~ ?) 변호사가 있었다.[25]

현준혁 암살과 후임 공산측 부위원장 김유창(金裕昌)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인선이 끝나고 업무를 개시하지만 권한이 많지 않은 위원장 조만식은 많은 민원인들에게 시달리고, 소련군은 이런 저런 압박을 멈추지 않아 상당한 곤경에 처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그에게 협조적이었던 부위원장 현준혁이 9월 초에 암살 당한다. 이후 공산측 부위원장은 김유창(金裕昌)이 맡는다. 그는 사진사 출신으로 뚜렷한 자기 주관이 없는 인물이라 시키는대로 잘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한다.[26]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 1983 복간본 pp.78~79 :

[조만식] 선생(先生)의 곤경(困境)을 가장 잘 이해(理解)한 사람으로서 기본동지(基本同志) 이외(以外)의 사람으로 부위원장(副委員長)인 현준혁(玄俊爀)을 꼽아도 무방(無放)할듯싶다. 비록 노선(路線)은 달랐으나 현(玄)은 선생(先生)의 고결(高潔)한 인격(人格)과 치밀(緻密)한 두뇌(頭腦)와 강직(剛直)한 의지(意志)와 열렬(熱烈)한 애족심(愛族心)을 존경(尊敬)했고 선생(先生)은 온건(穩健)한 현(玄)의 성품(性品)과 그의 깊은 교양(敎養)을 아까와 했다. 그는 범백(凡百)의 공산과격파(共産過激派)와는 달리 같이 정사(政事)를 논의(議論)할만 하다. 현(玄)은 평남 개천군(平南 介川郡) 출신(出身)으로 경성제대(京城帝大)를 졸업(卒業)한 후(後) 오래 학생운동(學生運動)을 지도(指導)하던 지식인(知識人)이다. 그러나 현(玄)의 존재(存在)조차 조선생(曺先生)에게는 허락(許諾)되지 않았다.

현(玄)이 인민정치위원회(人民政治委員會)에서 점점 신임(信任)을 얻어가는 기미(氣味)를 알자 김용범(金鎔範) 장시우(張時雨)가 영도(領導)하는 공산당 과격파(共産黨 過激派)는 그를 경계(警戒)하고 감시(監視)하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中心)으로한 새로운 당내 세력(黨內 勢力)의 형성(形成)을 두려워 한것이다. 그의 존재(存在)로 말미암아 장래(將來)할 당(黨)의 중심세력(中心勢力)의 이동(移動)과 분열(分裂)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 그 방법(方法)은? 그들은 소련(蘇聯)의 방법(方法)을 본받는 길 밖에 없었다. 그것이 지상(至上)의 그리고 유일(唯一)의 표본(標本)이기 때문에.

9월초(九月初) 평남지구(平南地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백주 대로상(白晝 大路上)에서 현준혁(玄俊爀)을 암살(暗殺)했다. 조위원장(曺委員長)과 동승(同乘)하고 철도(鐵道)호텔로 치스차꼬프 장군(將軍)을 방문(訪問)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동차(自動車)가 호텔에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인 네거리에 이르자 돌연(突然) 괴한(怪漢)이 차(車)에 뛰어올라 권총(拳銃)을 발사(發射)하였다. 기민(機敏)한 군사령부(軍司令部)의 헌병(憲兵)은 하려고만 했으면, 당장에서라도 범인(犯人)을 체포(逮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딱 감고 모른 척 했다. 조선생(曺先生)은 『범인(犯人)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두…』하고 탄식(嘆息)했다. 며칠 후(後) 고 현준혁(故 玄俊爀)을 위하여 성대(盛大)한 장례식(葬禮式)을 거행(擧行)하고 그 시체(屍體)를 장중(鄭重)히 구 평양신사(舊 平壞神社) 자리 해방기지(解放墓地)에 묻었다. 최초(最初)의 피의 숙청(肅淸)이다.

현준혁(玄後爀)의 후임(後任)으로 취임(就任)한 공산당 출신(共産黨 出身) 김유창(金裕昌)은 해방전(解放前)까지 오래동안 평양 남문통(南門通)에서 조선사진관(朝鮮寫眞館)을 경영(經營)하고 있던 사진사(寫眞師)이다. 그는 온건(穩健)한 신사(紳士)이었으나 동시(同時) 사진기술(寫眞技術) 이외(以外)에는 별(別)로 출중(出衆)한 기능(技能)이 없는 무능(無能)한 인물(人物)이다. 공산당(共産黨)은 가장 적임자(適任者)를 선택(選擇)하여 부위원장(副委員長)으로 파견(派遺)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自己)의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할 줄 모르는 대신에 당(黨)의 명령(命令)을 충직(忠直)히 이행(履行)하는 『대변인(代辯人)』만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김유창(金裕昌)은 이런 의미(意味)에서 최적임자(最適任者)이다.

현(玄)을 암살(暗殺)하고 총무부장(總務部長) 이주연(李周淵)을 매수(買收)하고 동(東) 서(西)평양서장(署長)을 반동음모죄(反動陰謀罪)로 불법체포(不法逮捕) 구금(拘禁)한 후(後) 공산당원(共産黨員)으로 대치(代置)하여 그들은 차차로 본성(本性)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제1단계(第一段階)의 중점적(重點的)인 포석(布石)이 끝나자 이제 공공연하게 위원장(委員長)과 대립(對立)하기 시작했다.

함께 보기

각주

  1.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33
  2.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2) 韩載德(한재덕)) 1962.05.05 동아일보 2면 :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 不幸(불행)의 씨! 蘇軍進駐(소군진주) /…愛國心(애국심)·自治力誇示(자치력과시)한貴重(귀중)한몇날…
  3. 3.0 3.1 한재덕(韓載德, 1911~1970),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pp.51~53.
  4. 이윤영(李允榮)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이윤영(李允榮, 1890~1975) 위키백과
  5. 노진설(盧鎭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김익진(金翼鎭, 1896 ~ 1970) - 나무위키
  7. 이종현(李宗鉉, 1904~195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김병서(金秉瑞, 1893~197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한근조(韓根祖, 1895~197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박현숙(朴賢淑, 1896~198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장이욱(張利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홍기주(洪箕疇, 18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홍기주(洪箕疇) - 국가기록원
  13. 13.0 13.1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75 김광진 1991.08.02 한겨레 7면
  14. 김용범(金鎔範, 1902 ~ 1947) - 위키백과
  15. 박정애(朴正愛, 1907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이주연(李周淵, 1903~196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7. 장시우(張時雨, 1891~195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18.0 18.1 송창렴(宋昌濂, 1905~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19.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육국장, 북조선인민위원회 간부부장 역임.
  20. 한재덕(韓載德, 1911~1970)
  21. 김용범이 암살당했다는 동아일보 기사 : 북한괴뢰집단(北韓傀儡集團)의 내분(內紛) 경찰당국(警察當局) 정보분석(情報分析) ❶ 1957.10.04 동아일보 3면 :中傷(중상)·謀略(모략)·殺傷等(살상등) 지독한 權力(권력)싸움 連(연)달아爆發(폭발)되는肅淸事件(숙청사건) 쏘·延(연)·남노·국내 4파로 분립
  22. 조우찬, 북한 갑산파 연구 : 박금철과 구성원 관계를 중심으로 현대북한연구 제19권 제1호, 2016.4, 87-135 (49 pages)
  23. 23.0 23.1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2 중앙일보 1991.10.03 종합 9면 :◎고당과 함께 가다 암살당한 현준혁/적위대복장 청년이 총격/대낮 평양시내서 타고가던 트럭 습격/“민족계열과 친하다” 소 군정에 밉보여
  24. 유기선(劉基善, 1912~2008) - 부산역사문화대전
  25.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군중앞에 나타난 金成柱(김성주) 1972.01.20 동아일보 4면
  26. 오영진, 같은 책, pp.7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