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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은 달력에서 기독교 명절들을 지우고 [[혁명의 날]]과 [[자유]], [[이성]] 및 ‘[[최고존재’의 축전일]]을 제정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프랑스 전역의 교회를 [[국유화]]하고 [[인간이성]]을 [[숭배]]하는 [[신전]](Temple of Reason)으로 둔갑시켰다. 급기야 [[카톨릭]]을 대체하는 ‘[[이성숭배]]’(Cult of Reason)를 [[공식 국교]]로 채택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이 또다른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혁명가]]들은 곧이어 [[이성숭배]]를 ‘[[최고존재의 제전]]’(Cult of the Supreme Being)으로 다시 탈바꿈했다. [[무신론]](Atheism)이 [[이신론]](Deism)으로 순화된 듯했지만 사실 신의 존재를 인간이성과 철학에 가둬버려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형상화해 [[숭배]]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공포정치]]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는 이 제전의 [[대제사장]]으로 군림했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은 달력에서 기독교 명절들을 지우고 [[혁명의 날]]과 [[자유]], [[이성]] 및 ‘[[최고존재’의 축전일]]을 제정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프랑스 전역의 교회를 [[국유화]]하고 [[인간이성]]을 [[숭배]]하는 [[신전]](Temple of Reason)으로 둔갑시켰다. 급기야 [[카톨릭]]을 대체하는 ‘[[이성숭배]]’(Cult of Reason)를 [[공식 국교]]로 채택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이 또다른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혁명가]]들은 곧이어 [[이성숭배]]를 ‘[[최고존재의 제전]]’(Cult of the Supreme Being)으로 다시 탈바꿈했다. [[무신론]](Atheism)이 [[이신론]](Deism)으로 순화된 듯했지만 사실 신의 존재를 인간이성과 철학에 가둬버려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형상화해 [[숭배]]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공포정치]]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는 이 제전의 [[대제사장]]으로 군림했다.
   그렇게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자주 인용했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말을 실제로 프랑스혁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그 어떤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그 절대적 [[왕좌]]에 [[인간이성]]을 올려놓아 새로운 [[사람중심]]의 종교를 ‘[[발명]]’한 것이다. 같은 시기 [[페인]]도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와의 논쟁을 거치며 [[인간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론화 한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라는 마지막 책을 내놓았다. [[페인]]은 이 책에서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과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사고와 ‘[[신앙의 이성화]]’를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훗날 니체가 “신은 죽었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ref>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35&replyAll=&reply_sc_order_by=I <nowiki>[조평세 칼럼]</nowiki> 1776의 자유와 1789의 자유</ref>
   그렇게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자주 인용했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말을 실제로 프랑스혁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그 어떤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그 절대적 [[왕좌]]에 [[인간이성]]을 올려놓아 새로운 [[사람중심]]의 종교를 ‘[[발명]]’한 것이다. 같은 시기 [[페인]]도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와의 논쟁을 거치며 [[인간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론화 한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라는 마지막 책을 내놓았다. [[페인]]은 이 책에서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과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사고와 ‘[[신앙의 이성화]]’를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훗날 니체가 “신은 죽었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ref>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35&replyAll=&reply_sc_order_by=I <nowiki>[조평세 칼럼]</nowiki> 1776의 자유와 1789의 자유</ref>
==혁명의 폭력성과 수정주의==
프랑스 혁명의 폭력성과 공포정치로 인한 살육에 대한 수정주의를 소개하는 [[김응종]] 교수<ref>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74400309&orderClick=LAG&Kc=#N 프랑스혁명사</ref>
<center><youtube>https://youtu.be/NKzqCCd8GeQ</youtube></center>
===François Furet==
[[프랑수아 퓌레]] ([[François Furet]])<ref>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74400309&orderClick=LAG&Kc=# 프랑스 혁명사</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8%98%EC%95%84_%ED%93%8C%EB%A0%88 프랑수아 퓌레,한국 위키</ref><ref>https://en.wikipedia.org/wiki/Fran%C3%A7ois_Furet 프랑수아 퓌레 영문 위키</ref>
프랑스혁명 연구가인 퓌레는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로, 68년 [[바르샤바조약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 항쟁을 유린한 이후 [[지성인]]들의 사상적 전향에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이다. [[레몽 아롱]]을 사상적 스승으로 삼은 그는 지성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 해방되어 [[민주적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퓌레도 원래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56년 헝가리 국민의 항쟁이 소련군 개입으로 유린'''되는 것을 보고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유럽의 지성인들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공산주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혔으며 왜 빨리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던가를 규명하는 연구를 해왔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7277000701 유럽 知性들의 마르크스 결별史</ref>~중략~문제의 핵심은 지성인들이 [[공산주의]]라는 환상을 믿고 싶어하는 의지 때문에, 사리를 따지고 회의(懷疑)를 품어보는 이성의 활동이 마비된데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그것을 구현하려던 제국에 종지부를 찍는데그치지 않고 2백여년전 [[프랑스혁명]]으로 형성되었던 혁명에 대한 신화까지도 완전히 허물어버렸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3026067 "환상의 역사" 프랑수아 퓌레著</ref>-『[[환상의 역사]]』(Le passe d'une illusion.Robert Laffont/Calmann-Levy.
사상 유례없는 인간성 파괴를 불렀던 [[1차 세계대전]]은 또다시 혁명의 필요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이와 때를 같이해 나온 것이 [[레닌]]의 [[볼셰비키혁명]]이었다.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 혁명에서 애써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아 낌없는 동조를보냈다.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허상]]을 지적하긴 했지만 [[히틀러]] 등장.[[경제 대공황]].[[2차 세계대전]]등 일련의 굵직한 사건이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내부에서 무자비하게 진행되던 [[피의 숙청]]에 눈이 멀었다.러시아내부의 실상이 서구 지식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였다.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 옹호가 더 어렵게 되자 서구 지식인들이 공산체제에 보다 냉정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3026067</ref>저자는 또 [[레닌]]과 [[무솔리니]],[[스탈린]]과 [[히틀러]]간에 이데올로기적 유사성과 상호보완성을 파헤치고 [[파시즘]]체제와 [[공산체제]]의 기원을 다같이 1차 세계대전에서 찾는 독창성을 보인다.레닌이 1917년,무솔리니가 1922년에 각각 권력을 장악하고 히틀러가 1923년에 실패했다가 1934년에 [[총통]]으로 취임하는 연대를 보면이들의 역사를 [[인과관계]]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다.퓌레는 또 역사를 단순한 인과관계로만 해석할 경우 나치체제도 볼셰 비키혁명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체제에 어느정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퓌레는 구체제 사회경제 구조에 내포된 봉건적 성격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봉건적 반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사회경제적인 구조를 바꾼 [[사회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시킨 [[정치혁명]]으로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된다.그러나 [[르페브르]]와 [[소불]] 등 정통파 학자들은 프랑스 구체제가 여전히 귀족들을 끌어안은 채, 그들의 특권과 이익을 보장하면서, 여전히 그 봉건적인 성격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한다.이러한 [[봉건제]]의 잔재는 농민과 도시 대중의 협조 속에서 사태 전개를 주도해 간 혁명지도부에 의해서 완전히 철폐될 수 있었으며, 또한 이에 입각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질서가 수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프랑스혁명은 본질적인 개념상 [[부르주아]]적인 사회혁명이며, 그것은 혁명의 진행에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집단의 사회적 소속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ref>http://egloos.zum.com/ajdajfjd2/v/1037966 이혜령 외 6인 공저(담당 집필자:윤혜령),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1), 373~375페이지</ref>
- 일원적 통합원리에 대한 비판<ref>https://multitude.co.kr/m/604 자코뱅주의와 시민사회: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ref>
좀은 퓌레의 담론분석 방법에 의거하면서, 대혁명에서 비롯되는 프랑스의 ‘정치문화’의 특징을 탐구한다. 『[[자코뱅파]]의 담론과 민주주의』(1989)에서는 혁명기의 클럽과 의회에서의 자코뱅파의 담론을 검토하고, 당(parti)에 의한 [[도덕적 혁명운동]]이 대표하는 자·대표되는 자의 [[일체성]]을 산출하며, [[주권]]을 구성한다는 독특한 정치관의 성립을 지적했다. 이런 정치관은 [[나폴레옹]] [[제정]]기의 집권론, 7월 왕정기의 [[[독트리네르]]의 [[이성주권론]]으로 계승된다. 그는 이어서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의]] 사조들을 검토하고, 거기서 일관된 특징을 <u>‘'''삭제된 개인’(individu effacé)'''</u>라고 평했다. 대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세 개의 사조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코뱅주의적 정치인식에 대항하고 '''개인의 내면적 자유의 불가침성'''과 입헌주의에 의한 권력억제를 주창한 [[스탈 부인]], [[콩스탕]], [[프레보스트-파라돌]](Prevost-Paradol) 등의 사조이다. 둘째는 [[개인]]보다 ‘[[사회]]’를 [[권력]]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의지[의사]를 대표하는 공적 기관으로의 집권화에 의해 더 고차적인 자유가 실현된다'''고 파악한 [[르와이에-코라르]], [[레뮈제]], 기조 등 [[독트리네르]]의 사조이다. 셋째는 '''개인적 자유에 대해 종교적 ‘진리’를 우위에 두고 신적 권위에의 복종에 의해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라므네]], [[몽타랑베르]], 세기말의 자유주의 [[가톨릭]] 등의 사조이다. 이 중 둘째와 셋째 사조가 프랑스 자유주의의 주류를 두고 다투며, 두 번째 사조가 1875년 이후에 체제원리가 되며, 자유주의와 양립하는 공화체제를 이끌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간략 보기==
<center><youtube>https://youtu.be/8qRZcXIODNU</youtube></center>
<center><youtube>https://youtu.be/EQmjXM4VK2U</youtube></center>


*[[이강호]]
*[[이강호]]

2020년 11월 4일 (수) 10:18 판

프랑스 大革命
영어: French Revolution
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세계 3대 시민혁명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1789년 작

개요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하에서 신흥 자본가계급이 부상하고(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 미국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민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도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 민족의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 민족을 거느린 주변 여러 강대국을 불안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제1공화국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일으킨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간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상으로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의 보장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었다.

혁명의 배경

사회적 배경

국가재정

당시 프랑스의 국가 채무는 심각할 정도로 컸다. 루이 14세때 벌인 다양한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채무가 쌓여 있었던 상태에, 루이 16세때는 전통의 라이벌인 영국에 맞선 미국 독립전쟁미국측 동맹국으로 참가하여 추가적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되었다. 혁명 직전에는 국가 예산의 절반을 채무 이자의 상환에 쓰고 있을 만큼 당시 프랑스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귀족의 특권

당시 프랑스의 귀족은 면세혜택과 각종 특권을 누렸다. 이 귀족들을 구분해보자면 이들의 반은 대검귀족(noble of the sword)이라 불리는 중세시대에 영주가문 출신이었다. 이들은 중세시대에는 자신들의 영지에 지어놓은 성에 살면서 농지의 소출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 시기쯤이 되면 파리 외곽의 베르사유에 있는 궁전에 빌붙어 살면서 궁정파티 등으로 시간을 축내는 일이나 하였다. 물론 정부의 여러 직위를 맡아 업무 수행에 열중한 귀족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궁정에서의 사치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귀족에는 대검귀족 외에 법복귀족(noble of the robe)이 있었다. 이들은 법률가 출신으로 이들 중에 상당수는 귀족 직위를 돈으로 산 이들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부르주아들이 귀족작위 구입 등으로 귀족이 되는 것을 막고 기존 귀족들의 특권을 강화하는 판결을 내리곤 했다.

정리하자면 대검귀족들은 하는 것 없이 면세혜택과 각종 특혜만 누리고 있었고 법복귀족은 이런 귀족들을 위해 특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의 성장

중세시대에 도시민을 뜻했던 부르주아는 어느 새 은행가, 법률가, 자본가, 중소지주 등 경제적으로 부유한 평민을 일컫는 말로 바뀌어 있었다. 이들은 각종 하급 행정 업무 등을 수행하며 국가 시스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경제력과 학교제도 덕택으로 상당한 교양도 보유했다. 다만 이들은 경제력은 가지고 있으나 권력이 없어 국가와 귀족에게 수탈당했으며, 면세혜탁을 누리는 귀족과 가난하여 세금을 더 낼 여력이 없는 일반평민들을 대신하여 막대한 국가채무를 상환해야 할 계층이기도 했다.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

중세 흑사병 대유행때 급격히 줄었던 프랑스 인구는 그 이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크게 증가하였고 이때쯤이면 3000만 명에 육박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실질임금은 하락을 면치 못했다. 18세기 내내 물가 상승률이 임금상승률을 한참 앞질렀다.[1] 농촌이든 도시던 간에 일할 사람은 넘쳐났고 임금은 정말 낮았던 것이다.

사상적 배경

계몽주의

혁명의 사상적 기반에는 계몽주의가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적 사고를 기반으로 불합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철학 사조로 볼테르, 루소 등이 이를 주장했다.

특히 계몽주의 중에서도 사회계약설이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혁명 이전의 절대왕정시기에는 왕의 직책과 권한은 신이 내린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이 있었으나, 홉스가 이를 부정하고 왕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했고 이를 로크루소가 발전시켰다.

영국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대략 100여년 전인 1688년 이웃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있었다. 전제왕권이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명예혁명은 이웃 프랑스에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이후 영국에 입헌군주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정치적 자유가 보장됨과 동시에 경제적 번영까지 누리는 모습을 보자 프랑스에서도 혁명에 대한 열망과 막연한 기대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는 당시 영국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인간이 노예적 공포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고상한 사상을 누리는 한 국가가 있다.[2]

미국

영국명예혁명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독립혁명 또한 프랑스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혁명의 진행

재정위기, 삼부회 소집

앞서 언급했던 막대한 정부부채로 인해 프랑스 정부는 세금을 인상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1789년 5월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전통적으로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모든 신분의 의견을 듣고 합의하는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평민 세 신분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의회였다. 그런데 기존의 삼부회와 달리 이번에 평민 대표로 참석한 부르주아들은 순순히 왕과 귀족, 성직자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부르주아들은 정부채무로 인한 추가적인 과세부담을 평민들만 지는 것은 부당하다며 귀족과 성직자들의 봉건적 권리와 면세혜택을 폐지하여 정부채무를 상환하고 이에 더하여 영국미국에서 시행되던 것과 같이 헌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의회 성립

<테니스코트의 서약>, 자크 루이 다비드 작, 1791년 작

삼부회에 참석한 부르주아들의 주장이 지나치게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적대적으로 흐르자, 귀족과 성직자들은 루이 16세를 설득하여 삼부회를 해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부르주아들은 이러한 조치에 격렬히 반대하며 삼부회 회의장 주변에 있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자신들이 국민들의 진정한 대표라고 주장하며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때쯤 파리에도 삼부회가 결렬되고 국민의회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와 함께 "(왕과 귀족들 편인) 군대가 부르주아파리 시민을 학살할 것"이라는 유언비어 등이 나돌았다.[3] 아마도 이는 부르주아 측에서 퍼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소문에 파리 시민들은 격노하여 앵발리드 병기고에서 소총 2만 8,000정과 대포 5문을 약탈[4]하고, 1789년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로 혁명은 한츰 더 과격해졌다. 파리 시민들은 국무장관 풀롱 등 각료를 거리에서 죽이고[5] 루이 16세와 귀족들이 있던 베르사유로 진격하여 그곳의 군인들을 학살했다. 또한 이때쯤에 국민의회는 왕과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국민의회는 헌법제정의회로 개편되었으며 봉건제 폐지선언을 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완전히 회수한다고 발표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재산도 완전히 몰수하였다.

다만 이렇게 과격한 혁명도중에 긍정적인 조치가 있었는데, 바로 1789년 8월 26일에는 시에예스가 주도하여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이름의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 기존의 체제에서는 경시되던 개인적 자유와 재산권 그리고 정치적 권리 등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에 있어 중요한 선언이었다.

국민공회

국민의회에서 시작된 헌법제정의회는 해산하고, 1792년 9월 20일 '국민공회'라는 명칭의 새로운 의회를 선출하였다. 바로 이때부터가 프랑스 제1공화국의 시작이다.

루이16세 처형

루이16세의 처형, 1794년 작

기존에 자신의 권한과 지위를 잃어버린 루이 16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하였다. 1791년 6월 21일 왕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 등 가족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도달하기 전에 프랑스의 국경지방인 바렌에서 시민군에 발각되어 파리로 압송되었다.

국민공회는 이 루이 16세내외의 국외 탈출 미수사건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 의원의 대다수는 그래도 지금까지 모시던 왕인데다 루이 16세는 특별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폭정을 휘두르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형으로 처리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때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국민공회 의사당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만약 루이 16세가 용서되거나, 만약 무죄라면 혁명은 어찌 되는 겁니까?

만약 루이 16세가 무죄라면 모든 자유의 수호자들은 중상모략꾼들이 되고 맙니다.

국가가 살기 위해선 왕(루이 16세)이 죽어야 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로 분위기가 급 반전되었지만 개표를 해보니 표결 결과는 막상막하였다. 사형반대표와 사형찬성표가 엇비슷한 가운데 결국 사형찬성표가 근소하게 많아 루이 16세의 사형이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루이 16세는 추운 겨울 파리 한복판의 콩도르셰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793년 1월 21일의 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6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샤를은 평민 가정에 강제 입양시켰는데, 각종 학대를 받은 루이 샤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이 국민공회의 세력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당파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당이었다. 곧 이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는 권력을 장악하고, 각종 정책을 시행했는데,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 많았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우유가격제한정책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일반 국민이 우유를 싸게 먹게 해주겠다는 명목 아래 우유 가격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지정한 우유 가격으로는 사료 값도 건질 수 없게 되자, 낙농업자들이 젖소 사육을 포기하고 젖소를 도축하여 고기로 내다팔았고, 그에 따라 우유 생산량이 감소하며 우유 가격이 더 높아져 버렸다. [6] 자신이 의도했던대로 우유 가격이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올라버리자 로베스피에르는 낙농업자들을 불러 사태의 이유를 물었고, 낙농업자들은 사료 값 너무 비싸기에 우유 생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이야기를 들은 로베스피에르는 당시 젖소 사료로 쓰이던 건초 가격 또한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건초를 생산하던 사람들 역시 이윤이 남지 않는 건초생산을 포기하고 건초를 불태웠다. [7] 그러자 건초 값 또한 로베스피에르의 의도와는 달리 폭등하였으며, 결국에 우유 가격은 처음보다 10배 비싸졌으며[8], 서민들이 우유를 마시기 힘들어졌다. 아이들 먹일 우유마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의 경제정책이 계속되어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해서 하락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하고 '공안위원회'를 조직하여 시민들을 억압했다. 억압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혁명의 결과로 생긴 정부가 이전보다 더 국민을 억압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포정치에도 민심 이반을 막을 수는 없었고, 이런 추세가 지속되며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핵심 인물중의 하나인 마라까지 암살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점차 악화되는 여론을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공회 의원들은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여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로베스피에르 정권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여러 인사들도 함께 처형하였다. 이를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한다. 테르미도르 반동의 결과 5명의 총재가 국가를 운영하는 총재정부가 구성되었다. 나폴레옹, 시에예스 등등의 명망있는 사람들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5명의 총재가 이끄는 총재정부는 정책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했으며 최고통치자가 난립하여 국가 운영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총재 중의 하나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새로운 정부는 통령을 국가 수반으로 했으며 나폴레옹이 통령이었다. 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10년 간 지속된 혁명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안정을 갈망하는 여론이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수많은 피를 흘린 프랑스 혁명은 이렇게 10년만에 끝이 났으며, 5년후인 1804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프랑스 제1제정이 시작되었다.

혁명의 결과 및 평가

프랑스 혁명의 의의는 봉건 질서 타파로 요약할 수 있다. 왕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왕이 되고 귀족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귀족이 되어 온갖 특혜를 누리던 봉건사회가 타파되고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근대사회가 발생했다는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의의이다. 또한 기존에 무시되었던 각종 인권이 보장되기 시작하였으며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계기 또한 프랑스 혁명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미국 독립혁명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희생을 가져왔다. 수많은 귀족들이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었으며, 그 중에는 어린아이도 적지 않았다. 또한 로베스피에르 집권 시기에 특히 국가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이 제2차 세계대전시에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전체주의 학살에 끼친 영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국의 명예혁명입헌군주제를 만들어내고 미국 독립혁명대통령제를 이룩해 안정적 체제를 발생시키고 번영의 토대가 되었던 것과 달리 프랑스 혁명은 그 이후에 안정적인 체제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각종 혼란을 가중시킨 후에 나폴레옹프랑스 제1제국이라는 황제국을 만들어내고 끝났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에드먼드 버크의 평가

에드먼드 버크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이자 정치인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과격한 변혁은 기존 질서의 파괴와 혼란만을 초래할 뿐 실익이 전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계몽주의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체제를 이상적으로 만드려는 시도는 인간 지성의 파괴적 행위의 전형적 예이며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한 미국의 독립혁명이나 영국의 명예혁명과 달리 프랑스 혁명은 폭정과 혼란, 경제체제의 파괴만을 불렀다고 평가했다.

알베르 카뮈의 평가

무신론자이자, 프랑스 공산당등에 가입하여 좌익활동을 하기도 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 또한 프랑스혁명과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하였다. 특히 루이 16세 처형을 찬양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확실히, 약하고 선량한 한 인간의 공공연한 살해를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한 순간으로 치부했던 것은 혐오할 만한 추문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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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존재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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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존재의 제전은 로베스피에르 집권 시기 기존의 카톨릭을 폐기하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던 것을 뜻한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칼럼이다.

 * 프랑스 혁명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상당부분 ‘자유민주혁명’으로 미화되어 잘못 인식되어져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사실 혁명정부선동정치로 인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군중광기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추앙하고 프랑스 사회에서 기독교를 완전히 청산하려고 시도했던 자코뱅 좌익세력의 반(反)기독교적 혁명이었다. 왕정귀족결탁부패의 온상이 되었던 로마카톨릭 교회성직자들에 대한 반감이 프랑스 시민들의 분노로 표출된 것도 사실이지만 프랑스혁명의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 정책은 단순한 반부패 운동을 한참 넘어선 기독교 말살 수순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은 달력에서 기독교 명절들을 지우고 혁명의 날자유, 이성 및 ‘최고존재’의 축전일을 제정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프랑스 전역의 교회를 국유화하고 인간이성숭배하는 신전(Temple of Reason)으로 둔갑시켰다. 급기야 카톨릭을 대체하는 ‘이성숭배’(Cult of Reason)를 공식 국교로 채택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이 또다른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혁명가들은 곧이어 이성숭배를 ‘최고존재의 제전’(Cult of the Supreme Being)으로 다시 탈바꿈했다. 무신론(Atheism)이 이신론(Deism)으로 순화된 듯했지만 사실 신의 존재를 인간이성과 철학에 가둬버려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형상화해 숭배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공포정치독재자 로베스피에르는 이 제전의 대제사장으로 군림했다.
 그렇게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자주 인용했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볼테르의 말을 실제로 프랑스혁명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그 어떤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그 절대적 왕좌인간이성을 올려놓아 새로운 사람중심의 종교를 ‘발명’한 것이다. 같은 시기 페인도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와의 논쟁을 거치며 인간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론화 한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라는 마지막 책을 내놓았다. 페인은 이 책에서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과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사고와 ‘신앙의 이성화’를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훗날 니체가 “신은 죽었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10]


혁명의 폭력성과 수정주의

프랑스 혁명의 폭력성과 공포정치로 인한 살육에 대한 수정주의를 소개하는 김응종 교수[11]

=François Furet

프랑수아 퓌레 (François Furet)[12][13][14] 프랑스혁명 연구가인 퓌레는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로, 68년 바르샤바조약군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 항쟁을 유린한 이후 지성인들의 사상적 전향에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이다. 레몽 아롱을 사상적 스승으로 삼은 그는 지성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 해방되어 민주적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퓌레도 원래는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56년 헝가리 국민의 항쟁이 소련군 개입으로 유린되는 것을 보고 환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유럽의 지성인들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공산주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혔으며 왜 빨리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던가를 규명하는 연구를 해왔다.[15]~중략~문제의 핵심은 지성인들이 공산주의라는 환상을 믿고 싶어하는 의지 때문에, 사리를 따지고 회의(懷疑)를 품어보는 이성의 활동이 마비된데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그것을 구현하려던 제국에 종지부를 찍는데그치지 않고 2백여년전 프랑스혁명으로 형성되었던 혁명에 대한 신화까지도 완전히 허물어버렸다."[16]-『환상의 역사』(Le passe d'une illusion.Robert Laffont/Calmann-Levy. 사상 유례없는 인간성 파괴를 불렀던 1차 세계대전은 또다시 혁명의 필요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이와 때를 같이해 나온 것이 레닌볼셰비키혁명이었다.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 혁명에서 애써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아 낌없는 동조를보냈다.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허상을 지적하긴 했지만 히틀러 등장.경제 대공황.2차 세계대전등 일련의 굵직한 사건이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내부에서 무자비하게 진행되던 피의 숙청에 눈이 멀었다.러시아내부의 실상이 서구 지식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였다.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 옹호가 더 어렵게 되자 서구 지식인들이 공산체제에 보다 냉정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17]저자는 또 레닌무솔리니,스탈린히틀러간에 이데올로기적 유사성과 상호보완성을 파헤치고 파시즘체제와 공산체제의 기원을 다같이 1차 세계대전에서 찾는 독창성을 보인다.레닌이 1917년,무솔리니가 1922년에 각각 권력을 장악하고 히틀러가 1923년에 실패했다가 1934년에 총통으로 취임하는 연대를 보면이들의 역사를 인과관계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다.퓌레는 또 역사를 단순한 인과관계로만 해석할 경우 나치체제도 볼셰 비키혁명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체제에 어느정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퓌레는 구체제 사회경제 구조에 내포된 봉건적 성격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봉건적 반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사회경제적인 구조를 바꾼 사회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시킨 정치혁명으로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된다.그러나 르페브르소불 등 정통파 학자들은 프랑스 구체제가 여전히 귀족들을 끌어안은 채, 그들의 특권과 이익을 보장하면서, 여전히 그 봉건적인 성격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한다.이러한 봉건제의 잔재는 농민과 도시 대중의 협조 속에서 사태 전개를 주도해 간 혁명지도부에 의해서 완전히 철폐될 수 있었으며, 또한 이에 입각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질서가 수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프랑스혁명은 본질적인 개념상 부르주아적인 사회혁명이며, 그것은 혁명의 진행에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집단의 사회적 소속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18]

- 일원적 통합원리에 대한 비판[19] 좀은 퓌레의 담론분석 방법에 의거하면서, 대혁명에서 비롯되는 프랑스의 ‘정치문화’의 특징을 탐구한다. 『자코뱅파의 담론과 민주주의』(1989)에서는 혁명기의 클럽과 의회에서의 자코뱅파의 담론을 검토하고, 당(parti)에 의한 도덕적 혁명운동이 대표하는 자·대표되는 자의 일체성을 산출하며, 주권을 구성한다는 독특한 정치관의 성립을 지적했다. 이런 정치관은 나폴레옹 제정기의 집권론, 7월 왕정기의 [[[독트리네르]]의 이성주권론으로 계승된다. 그는 이어서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의 사조들을 검토하고, 거기서 일관된 특징을 삭제된 개인’(individu effacé)라고 평했다. 대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세 개의 사조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코뱅주의적 정치인식에 대항하고 개인의 내면적 자유의 불가침성과 입헌주의에 의한 권력억제를 주창한 스탈 부인, 콩스탕, 프레보스트-파라돌(Prevost-Paradol) 등의 사조이다. 둘째는 개인보다 ‘사회’를 권력정당성원천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의지[의사]를 대표하는 공적 기관으로의 집권화에 의해 더 고차적인 자유가 실현된다고 파악한 르와이에-코라르, 레뮈제, 기조 등 독트리네르의 사조이다. 셋째는 개인적 자유에 대해 종교적 ‘진리’를 우위에 두고 신적 권위에의 복종에 의해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라므네, 몽타랑베르, 세기말의 자유주의 가톨릭 등의 사조이다. 이 중 둘째와 셋째 사조가 프랑스 자유주의의 주류를 두고 다투며, 두 번째 사조가 1875년 이후에 체제원리가 되며, 자유주의와 양립하는 공화체제를 이끌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간략 보기



  •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20]
  • 근대 세계의 창조 - 영국 계몽주의의 숨겨진 이야기[21]

각주

  1. 콜린존스,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p212~213
  2.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p376
  3.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p424
  4.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p425
  5.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p427
  6. 정성우,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극, 자유기업원, 2020년 4월 10일 https://www.cfe.org/20200410_22548
  7. 정성우,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극, 자유기업원, 2020년 4월 10일 https://www.cfe.org/20200410_22548
  8. 정성우,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극, 자유기업원, 2020년 4월 10일 https://www.cfe.org/20200410_22548
  9. 신동아, 루소 민주주의 스승인가 전체주의 창시자인가, 2003년 6월 25일,
  10.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35&replyAll=&reply_sc_order_by=I [조평세 칼럼] 1776의 자유와 1789의 자유
  11.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74400309&orderClick=LAG&Kc=#N 프랑스혁명사
  12.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74400309&orderClick=LAG&Kc=# 프랑스 혁명사
  13.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8%98%EC%95%84_%ED%93%8C%EB%A0%88 프랑수아 퓌레,한국 위키
  14. https://en.wikipedia.org/wiki/Fran%C3%A7ois_Furet 프랑수아 퓌레 영문 위키
  15.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7277000701 유럽 知性들의 마르크스 결별史
  16. https://news.joins.com/article/3026067 "환상의 역사" 프랑수아 퓌레著
  17. https://news.joins.com/article/3026067
  18. http://egloos.zum.com/ajdajfjd2/v/1037966 이혜령 외 6인 공저(담당 집필자:윤혜령),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1), 373~375페이지
  19. https://multitude.co.kr/m/604 자코뱅주의와 시민사회: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20.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8511342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
  2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6730429 근대 세계의 창조 - 영국 계몽주의의 숨겨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