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휴전협정 서명.jpeg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의미한다.

정식명칭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영문으로는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이고, 중국어로는 "朝鮮人民軍最高司令官及中國人民志願軍司令員一方與聯合國軍總司令另一方關於朝鮮軍事停戰的協定"이다.

협정의 서명자

  • 유엔국제연합군 총사령관 : 미국 육군 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 People's Liberation Army 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 펑더화이
  • 유엔국제연합군 대표단 수석대표 : 미국 육군 중장 윌리엄 K.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Jr.)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협정문에 사령관이 아닌 남일과 윌리엄 해리스가 추가된 이유는, 협정문 서명시 기자들의 방문을 제한하고 남한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자는 북한측의 요구가 있었고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북한의 남일과 연합군의 해리슨이 서명하고 이것을 각각 사령부로 보내 서명을 하였다. 그러므로 김일성, 팽덕회 마크 클라크 장군이 서로 한 테이블에서 서명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총 18부에 대해서 서명을 실시했다. 마크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문산에서 서명을 실시했다. 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장군의 사진이 남아있게 되었다.

남한 측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은 없다.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는 대신 본인이 서명하지 않기로 했다.

휴전협정의 지연

휴전협정이 지연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크게 2가지 였다.

하나는 휴전협정후에 중공군이 북한에 남아있게 되는 상황에서 남한의 유엔군만 철수하면 사실상 전쟁이 재발할 것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우려때문이었고, 이 우려는 마크 클라크 장군도 동의했으며, 이로 인하여 휴전협정후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두번째는 포로의 송환에 대한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제3국으로 보내 약 6개월 동안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를 구분한 다음에 송환하는 것은 요구했다. 이 요청은 언듯보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6개월이면 충분하게 반공포로를 협박해서 친공포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으며, 이 때문에 유엔사령관인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문제 삼았다. 또한 처음에 북한이 주장한 중립국은 사실상 대부분이 친공국가였으며, 최종적으로 합의된 인도 역시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때문에 친공국가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공포로를 북한에 보내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우려했다.

포로에 관한 협정내용이 남한에 불리하게 되자, 휴전협정 바로 직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전쟁을 중단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지라고 표현하는 좌파들이 많으나, 엄밀히 말하면 반공포로를 포호하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방법이었다. 반공포로의 석방은 이미 1952년 마크 클라크 장군이 가지고 있던 계획이고 워싱턴에 이를 요청했으나, 워싱턴은 이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반공포로를 석방했으면 휴전협정은 상대적으로 매우 쉽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휴전협정 직전에는 중공군이 대규모로 공격을 개시하여 한국군을 공격했다. 이것은 불필요한 전투였음에도 대한민국의 전투의지를 시험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 전투로 약 1만명 이상의 한국군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