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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희'''(韓聖姫, 1914<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7/2009082700103.html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정일·정운, 사랑받는 법 알아"]  조선일보 2009.08.27</ref> ~ ?)는 만주 [[동북항일연군]] 시기 북한 [[김일성]]의 첫 아내였다. 한성희의 아명은 옥봉이었고, 한영숙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한성희'''(韓聖姫, 1914<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7/2009082700103.html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정일·정운, 사랑받는 법 알아"]  조선일보 2009.08.27</ref> ~ ?)는 만주 [[동북항일연군]] 시기 북한 [[김일성]]의 첫 아내였다. 한성희의 아명은 옥봉이었고, 한영숙(韓英淑)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김혜순]],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보다 앞선 시기의 아내이다. 임은(林隱)의 『김일성 정전(金日成正傳)』에는 한성희(한영숙)의 사진이 실려있는데,<ref name="lim">임은(林隱),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58575 『김일성 정전(金日成正傳)』], (沃村文化社, 1989) p.64</ref><ref name="buk">林隱, [https://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1593418-00 『北朝鮮王朝成立秘史 :金日成正傳』], (東京:自由社, 昭和57[1982]) p.56</ref><ref>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지음,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46073791&orderClick= 『김일성 전기』] (한울아카데미, 2022년 06월 23일) p.44.</ref> 믿을만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파일:임은-북조선왕조성립비사-한성희.png|193픽셀|섬네일|오른쪽|[[김일성]]의 첫번째 처 한성희(한영숙)의 사진.<ref name="lim"/><ref name="buk"/>]]
==김일성 회고록의 한성희 관련 기록==
==김일성 회고록의 한성희 관련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pp.7~10 에 한성희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자세히 나온다. 자신의 아내라고 명기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을 보면 부부간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항일 혁명 4편, 1993년 출간): 1935년 2월 ~ 1936년 5월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항일 혁명 4편, 1993년 출간): 1935년 2월 ~ 1936년 5월
: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935년 2월 ~ 1935년 6월)
: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935년 2월 ~ 1935년 6월)
: 1. 사나운 회오리
: 1. 사나운 회오리
{{인용문|'''[pp.7~10]'''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br>
{{인용문|'''[pp.7~10]''' 어느날 나는 오한을 무릅쓰고 송갑룡의 부축을 받으며 병상에 누워있는 대원들을 찾아갔다. 그때 내 눈을 제일 아프게 자극한것은 원정에 참가했던 전우들의 볼품없는 옷차림이였다. 초연에 그슬리고 총탄에 찢겨진 그들의 군복마다에는 전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br>
온 겨울 혹한속에서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br>
나는 재봉대에 전령병을 파견하였다. 그전해 가을 북만으로 원정을 떠날 때 전문진에게 다음해에 입을 부대의 여름옷을 미리 지어놓으라는 과업을 맡기고 갔었는데 그 과제가 수행되였다면 원정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입힐수 있는것으로 먼저 스무벌쯤 골라서 가져오라고 하였다.<br>
그 당시 재봉대는 다홍왜에서 멀리 떨어진 솔밭골의 밀림속에 자리잡고있었다. 성원이라고 해야 전문진과 한성희를 비롯한 몇사람밖에 없었다. 전문진이 동녕현에서 양재기술을 조금 배우다가 나온 구대원이라면 한성희는 요영구에서 아동단사업을 하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신대원이였다.<br>
전령병과 함께 군복을 지고 요영구로 달려온것은 전문진이 아니라 몇달째 북만에 간 원정대를 기다리며 외진 섬이나 다름없는 솔밭골의 수림속에서 임신중에 있는 그를 정성껏 간호하고있던 한성희였다. 한성희는 앓아누워있는 나를 보자 눈물부터 쭈르르 흘리였다.<br>
그가 지고 온 군복들을 원정대원들에게 갈아입힌 다음 나는 한성희를 재봉대로 돌려보냈다.<br>
그런데 솔밭골로 돌아간줄로만 알았던 한성희가 다음날 아침 잣죽이 얹혀있는 밥상을 들고 내앞에 다시금 천연스레 나타났다.<br>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옥봉동무, 어떻게 또 여기에 나타났소? 무슨 일이 생겼소?》<br>
옥봉이란 한성희의 아명이였다. 그는 한영숙이라는 별명도 가지고있었다. 한성희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였다.
:《장군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어제 솔밭골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br>
나는 한성희의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아동단시절이나 입대후나 그는 상급의 명령지시에 불복한적이 단 한번도 없는 충실하고 순박하고 고지식한 녀성이였다. 그가 나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변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몸져누워계시는데 제가 돌아간들 문진언니가 좋아하겠습니까.》<br>
나를 걱정하는 한성희의 그 웅심깊은 마음은 물론 고마운것이였다. 나는 좁쌀과 미역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한성희의 배낭속에 넣어주며 그를 달래였다.
:《여기에 나를 돌봐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동무는 내걱정을 말고 오늘중으로 당장 솔밭골에 돌아가야 하오. 동무가 가지 않으면 전문진이는 어떻게 하오? 지금이 바로 막달이라고 하는데 혼자서야 해산을 할수 없지 않소.》<br>《장군님, 다른 명령만은 다 집행하겠지만 이 명령만은… 간호를 해드리지 못하고 재봉대로 돌아가면 문진언니가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장군님, 저의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장군님께서 제일 급한 대목을 넘기고계시는 때에 녀대원들이 한명도 없다니 말이 됩니까.》<br>
한성희는 오히려 나를 설복하느라고 열을 올리였다.
:《성희동무, 부탁이니 어서 돌아가서 문진동무를 간호해주오.》<br>
그때 리효석중대장이 한성희를 곤경에서 구원해주었다.
:《대장동지, 한성희가 가도 산파구실은 하지 못합니다. 아이도 못낳아 본 처녀가 어떻게 해산방조를 합니까.》<br>
경험있는 녀자를 물색하여 보내겠다는 중대장의 말에 나는 그만 굽어들고말았다.<br>
한성희는 그날부터 주야로 나를 간호하여주었다. 그는 끼니마다 밥상에 잣죽을 놓아주군하였다. 아마 그의 주문을 받고 4중대 대원들이 요영구의 수림속에 들어가 눈속에 파묻힌 잣송이들을 주어온 모양이였다. 중대장자신도 막대기를 들고 아침마다 잣사냥을 떠나군하였다.<br>
한성희는 자기가 간호를 잘못해서 장군님의 몸을 추세우지 못한다면 조선사람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밤잠도 자지 않고 극성스레 나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언제였던지 그가 자기의 머리태를 잘라 나의 신발바닥에 깔아준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하나의 사실을 보고 한성희가 정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살마저도 서슴없이 떼주는 그런 형의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br>
피줄이란 역시 속일수 없는것이였다.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 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 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br>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韓興權, 1912~1938)<ref>[http://www.cybernk.net/infoText/InfoHumanDetail.aspx?mc=EJ1005&hid=EJ100500230216&rightType=3&direct=1 한흥권(韓興權, 1912~1938)]</ref>도 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br>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韓興權, 1912~1938)<ref>[http://www.cybernk.net/infoText/InfoHumanDetail.aspx?mc=EJ1005&hid=EJ100500230216&rightType=3&direct=1 한흥권(韓興權, 1912~1938)]</ref>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
한성희네 두 자매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기 위하여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결심하였다.<br>
그런데 두 딸이 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는 누가 모시고 가정은 누가 돌보느냐 하는 문제가 불쑥 튀여나오는 바람에 자매간에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한성희는 입대적격자가 못된다는데로부터 매번 수세에 몰리군하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날 숙보면 안돼. 언니가 하는 일은 나두 다하지 않니. 키두 언니만치는 크단 말이야.》<br>
한성희가 이런 말로 맵짜게 공격을 들이대면 언니는 언니대로 여유작작하게 반공격을 가해오군하였다.
:《키는 커두 젖비린내야 어디 가겠니.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구 했다. 너는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동단생활이나 잘하여라.》<br>
그 어느쪽도 상대방에게 참군의 영예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br>
딸들이 이불밑에서 자신들의 장래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론의를 하고있을 때 그 대화의 한토막을 우연히 엿듣게 된 한성희의 어머니는 자기가 입고 다니던 단벌무명치마를 뜯어 밤을 새워가며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두개의 배낭을 만들었다. 다음날에는 그 배낭들에 미시가루를 듬뿍듬뿍 닦아넣었다. 그 두 배낭이 자기들이 지고 가게 될 행장이며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꾸려줄수 있는 지참품과 같은 물건이라는것을 한성희네 자매가 알게 된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였다.<br>
그날 한성희의 어머니는 두 딸을 앉혀놓고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봉양을 바라지 않는다. 나라도 찾지 못한 주제에 효도가 다 무어냐. 너희들이 이 에미를 돌보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둘 다 이달음으로 유격대에 들어가거라!》<br>《어머니!》<br>
두 자매는 울음을 터치며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그들은 가슴을 치는 맹약과 눈물로써 어머니를 하직하였다. 1934년 봄에 우리는 한성희를 지휘부직속 재봉대로 소환하였다.<br>
그는 전도가 촉망되는 녀대원이였다.<br>
성격상 약점이 있다면 만사를 너무 태평스럽게 대하는것이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녀성으로서는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군인으로서는 놀랍다고 할만치 량순하고 무경각하였다. <u>이 무경각성때문에 한성희는 결국 적들에게 붙잡혀 혁명을 중도반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br>
본대로 찾아오라는 나의 지령을 받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던 그는 녕안현 이도하자의 수림속에서 적들의 포위속에 들었다. 수십명의 위만군병사들이 총대를 꼬나들고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줄도 모르고 어린 녀대원은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에서 머리를 감고있었다. 우리가 무송지구에 진출하여 새 사단을 조직하고있을 때 체포된 그는 라자구에서 적들의 문초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br>
수인들을 지키고있던 보초들중에는 한성희를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정한 량심적인 조선인 보초도 있었다. 그는 혁명을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귀순문서장에 도장을 찍고 매일매일을 치욕스럽게 살아가던 사람이였다. 교형리들이 한성희를 죽이려한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보초는 그 녀자에게 탈출을 건의하였다. 자기도 총을 벗어던지겠으니 함께 도주하여 조선으로 나가든가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초막이나 치고 생활하는것이 어떤가고 하였다. 한성희는 그에 동의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적의 소굴을 감쪽같이 탈출하였다. 그 조선인보초는 후날 그의 남편이 되였다.</u><br>
한성희가 적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것을 다같이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어떤 녀대원들은 너무 분해서 밥도 먹지 않았다. 친동생처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던 전우를 잃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한성희의 금새를 잘 알고있는 왕청시절의 투사들은 지금도 그를 아름답게 추억하고있다.<br>
한성희의 자식들이 어머니의 경력을 두고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도 다른 투사어머니들처럼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빨찌산대오에 서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br>
물론 한성희가 적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더라면 더 좋았을것이다.<br>
하지만 혁명이란 탄탄대로가 아니다. 출발신호만 울리면 누구나 쾌속으로 뛰여가 쉽사리 결승선에 도달할수 있는 100메터경기 같은것은 더욱 아니다.<br>
성공과 실패, 전진과 후퇴, 앙양과 좌절의 부단한 교차와 반복속에서 승리를 향해 달리는 끝없는 행로가 바로 혁명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 장구한 행로에 무슨 곡절인들 없겠는가.<br>
자식들이 부모들을 원망할 때마다 한성희는 이런 말로 그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의 경력가운데 오점이 좀 있다고 너희들까지 고민할것은 없다. 조선로동당은 부모의 잘못을 가지고 자식들을 허물하지 않는다. 부모가 지은 죄를 자식들이 책임질수 없다는것이 바로 우리 수령님의 정치이다. 문제는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수령님께 충성을 다하거라.》<br>
나는 한성희가 자식들을 옳게 교양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당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간직한 성실하고 결백한 녀성이였다.<br>
​한성희가 쑤어준 그 잣죽과 사슴고기를 넣은 좁쌀죽의 덕으로 나는 사흘만에 병석에서 겨우 일어날수 있었다.}}
위에 나온대로 김일성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성희는 녕안현 이도하자(寧安縣 二道河子)에서 만주군(滿洲軍, 僞滿軍)에 포위되어 체포되었으며, 정확한 연대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1935년 경의 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1940년 4월 일본군 노조에(野副) 토벌대에 체포된 [[김혜순]]이 한성희이며, 체포되자 김혜순이라는 이름을 둘러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처로 알려진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김일성의 전처들 중에 한국에 가장 먼저 알려진 사람은 위의 [[김혜순]]인데, 그녀와 관련된 [[:파일: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조선일보 기사]]와 증언을 이명영이 발굴해 내었으며, 이것은 그녀의 남편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김일성의 전처들 중에 한국에 가장 먼저 알려진 사람은 [[김혜순]]인데, 그녀와 관련된 [[:파일:김일성 처 김혜순 체포 기사.jpg|조선일보 기사]]와 증언을 이명영이 발굴해 내었으며, 이것은 그녀의 남편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북한에 거주하다 소련 유학을 가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 본명 허웅배, 1928~1997)<ref>[https://news.joins.com/article/2362994 북한체제 환멸 망명한 의병 후손] - 중앙일보 1989. 9. 26.</ref><ref>[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72016092043.html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ref>은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김일성의 처음 처는 한성희(韓聖姫)이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혜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대었다고 주장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3260020920401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3-26&officeId=00020&pageNo=4&printNo=18608&publishType=00020 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1982.03.26 동아일보 4면</ref><ref>임은(林隱) 著,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58575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서울 : 옥촌문화사, 1989년) p.53</ref>.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북한에 거주하다 소련 유학을 가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 본명 허웅배, 1928~1997)<ref>[https://news.joins.com/article/2362994 북한체제 환멸 망명한 의병 후손] - 중앙일보 1989. 9. 26.</ref><ref>[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72016092043.html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ref>은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김일성의 처음 처는 한성희(韓聖姫)이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혜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대었다고 주장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3260020920401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3-26&officeId=00020&pageNo=4&printNo=18608&publishType=00020 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1982.03.26 동아일보 4면</ref><ref>임은(林隱) 著,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58575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서울 : 옥촌문화사, 1989년) pp.63~67.</ref>  
{{인용문|'''김(金)의 최초 처(妻)는 한성희(韓聖姫)'''<br>김일성(金日成)의 최초의 처(妻)는 한성희(韓聖姫)라는 여성이었다. 빨치산부대의 부녀부장 또는 여자청년부장이었다. 이 여자는 40년 일본(日本) 토벌대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어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해방후 귀국한 뒤 곧 한성희(韓聖姫)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47년경 도여맹(道女盟) 부위원장으로 있는 한영숙(韓英淑)이라는 여자가 한성희(韓聖姫)임을 알아냈다. 한(韓)은 체포 뒤 복역중 반일(反日) 활동중지, 개명(改名), 출가의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녀는 석방 뒤 경찰의 감시가 심해 반일(反日) 투쟁을 계속할 수가 없어 농민에게 개가해 2남 2녀의 어머니로 해방을 맞았다. 개선장군 김일성(金日成)은 지도자가 됐는데 그는 빨치산 당시 그녀의 부하였던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과 결혼, [[김정일|「유라」]]와 [[김슈라|「슈라」]]라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韓)은 해방 후 로동당원이 되어 도(道) 여맹부위원장이 됐는데 남편이 천도교청우당(天道教青友黨)에 입당하는 바람에 이 가정은 정치폭풍의 와중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때 김일성(金日成)은 한(韓)을 찾았는데 김일성(金日成)은 그녀의 행불행이 자신에게 관계가 있는데에 고민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한(韓)을 지구대표로 선발,파견하도록 지시하여「전부부」가 재회했고 한(韓)은 군인민위원회(郡人民委員會) 위원장으로 승격됐다. 김일성(金日成)과 한(韓)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김(金)의 처(妻)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이 죽고난 뒤 김(金)이 자기의 비서였던 김성애(金聖愛)와 결혼한 때 부터였다. 이들의 결혼이 자신과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용문|'''김(金)의 최초 처(妻)는 한성희(韓聖姫)'''<br>김일성(金日成)의 최초의 처(妻)는 한성희(韓聖姫)라는 여성이었다. 빨치산부대의 부녀부장 또는 여자청년부장이었다. 이 여자는 40년 일본(日本) 토벌대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어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해방후 귀국한 뒤 곧 한성희(韓聖姫)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47년경 도여맹(道女盟) 부위원장으로 있는 한영숙(韓英淑)이라는 여자가 한성희(韓聖姫)임을 알아냈다. 한(韓)은 체포 뒤 복역중 반일(反日) 활동중지, 개명(改名), 출가의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녀는 석방 뒤 경찰의 감시가 심해 반일(反日) 투쟁을 계속할 수가 없어 농민에게 개가해 2남 2녀의 어머니로 해방을 맞았다. 개선장군 김일성(金日成)은 지도자가 됐는데 그는 빨치산 당시 그녀의 부하였던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과 결혼, [[김정일|「유라」]]와 [[김슈라|「슈라」]]라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韓)은 해방 후 로동당원이 되어 도(道) 여맹부위원장이 됐는데 남편이 천도교청우당(天道教青友黨)에 입당하는 바람에 이 가정은 정치폭풍의 와중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때 김일성(金日成)은 한(韓)을 찾았는데 김일성(金日成)은 그녀의 행불행이 자신에게 관계가 있는데에 고민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한(韓)을 지구대표로 선발,파견하도록 지시하여「전부부」가 재회했고 한(韓)은 군인민위원회(郡人民委員會) 위원장으로 승격됐다. 김일성(金日成)과 한(韓)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김(金)의 처(妻)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이 죽고난 뒤 김(金)이 자기의 비서였던 김성애(金聖愛)와 결혼한 때 부터였다. 이들의 결혼이 자신과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동아일보 1982년 3월 26일 4면}}


이것이 김일성의 전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계기가 된다.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의 일본어판에는 한영숙(한성희)의 사진이 실려있는데,<ref>林隱, [https://iss.ndl.go.jp/books/R100000002-I000001593418-00 『北朝鮮王朝成立秘史 :金日成正傳』], (東京:自由社, 昭和57[1982]) p.56</ref><ref>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지음,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46073791&orderClick= 『김일성 전기』] (한울아카데미, 2022년 06월 23일) p.44.</ref> 김혜순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전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한성희는 1935년경 만주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김혜순]]은 1940년 4월 일본군 노조에(野副) 토벌대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으며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는 한영숙(한성희)의 사진이 실려있는데,<ref name="lim"/><ref name="buk"/> [[김혜순]]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 10월 한소 수교 직후 방한한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유성철(俞成哲)]]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ref>증언(證言)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ref><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1080057393135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ref>
1990년 10월 한소 수교 직후 방한한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유성철(俞成哲)]]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ref>증언(證言)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ref><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1080057393135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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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일본군에 체포된 김혜순의 이름은 본명이지 한성희가 둘러댄 가짜 이름이 아니다. 또 2000년 이후 중국 쪽에서 쏟아져 나온 [[동북항일연군]] 출신자 또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김혜순과 달리 한성희에 관한 당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일본군에 체포된 김혜순의 이름은 본명이지 한성희가 둘러댄 가짜 이름이 아니다. 또 2000년 이후 중국 쪽에서 나온 [[동북항일연군]] 출신자 또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김혜순과 달리 한성희에 관한 당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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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과연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소련」으로부터 그 아내와 두 어린애를 데려내다가, 그가 북한의 괴뢰 괴수가 되었을 때는 일제시의 지사관사(知事官舍) 자리에다 호강스러운 살림을 차려놓았던 것이다.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이라는 그 부인은 사실은 김일성(金日成)의 둘째번인가 세째번인가의 아내로 첫번째 아내는 일제 때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어 하필이면 담당 취조경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해방 후 어떤 심정으로서인지 북한 독재자가 된 김일성(金日成)을 면회하려다 혼살이나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문이었다.}}
{{인용문|과연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소련」으로부터 그 아내와 두 어린애를 데려내다가, 그가 북한의 괴뢰 괴수가 되었을 때는 일제시의 지사관사(知事官舍) 자리에다 호강스러운 살림을 차려놓았던 것이다.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金貞淑)]]이라는 그 부인은 사실은 김일성(金日成)의 둘째번인가 세째번인가의 아내로 첫번째 아내는 일제 때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어 하필이면 담당 취조경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해방 후 어떤 심정으로서인지 북한 독재자가 된 김일성(金日成)을 면회하려다 혼살이나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문이었다.}}


한재덕이 말하는 사람은 김혜순보다는 한성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성희가 토벌대장의 첩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hans">[https://www.youtube.com/watch?v=o_zDcV2p7RQ <nowiki>[청설TV]</nowiki>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1)] 청설TV 2020. 1. 29.<br>[https://www.youtube.com/watch?v=1mWh1v72w4k <nowiki>[청설TV]</nowiki>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2)] 청설TV 2020. 1. 31.<br>체포된 후 어쩔 수 없이 귀순하고 토벌대장의 첩이 된 슬픈 여자</ref>
한재덕이 말하는 사람은 [[김혜순]]보다는 한성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성희가 토벌대장의 첩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hans">[https://www.youtube.com/watch?v=o_zDcV2p7RQ <nowiki>[청설TV]</nowiki>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1)] 청설TV 2020. 1. 29.<br>[https://www.youtube.com/watch?v=1mWh1v72w4k <nowiki>[청설TV]</nowiki>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2)] 청설TV 2020. 1. 31.<br>체포된 후 어쩔 수 없이 귀순하고 토벌대장의 첩이 된 슬픈 여자</ref>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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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9일 (금) 03:45 기준 최신판

한성희(韓聖姫, 1914[1] ~ ?)는 만주 동북항일연군 시기 북한 김일성의 첫 아내였다. 한성희의 아명은 옥봉이었고, 한영숙(韓英淑)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김혜순, 김정숙보다 앞선 시기의 아내이다. 임은(林隱)의 『김일성 정전(金日成正傳)』에는 한성희(한영숙)의 사진이 실려있는데,[2][3][4] 믿을만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김일성의 첫번째 처 한성희(한영숙)의 사진.[2][3]

김일성 회고록의 한성희 관련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pp.7~10 에 한성희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자세히 나온다. 자신의 아내라고 명기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을 보면 부부간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항일 혁명 4편, 1993년 출간): 1935년 2월 ~ 1936년 5월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935년 2월 ~ 1935년 6월)
1. 사나운 회오리
[pp.7~10] 어느날 나는 오한을 무릅쓰고 송갑룡의 부축을 받으며 병상에 누워있는 대원들을 찾아갔다. 그때 내 눈을 제일 아프게 자극한것은 원정에 참가했던 전우들의 볼품없는 옷차림이였다. 초연에 그슬리고 총탄에 찢겨진 그들의 군복마다에는 전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온 겨울 혹한속에서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 나는 재봉대에 전령병을 파견하였다. 그전해 가을 북만으로 원정을 떠날 때 전문진에게 다음해에 입을 부대의 여름옷을 미리 지어놓으라는 과업을 맡기고 갔었는데 그 과제가 수행되였다면 원정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입힐수 있는것으로 먼저 스무벌쯤 골라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 그 당시 재봉대는 다홍왜에서 멀리 떨어진 솔밭골의 밀림속에 자리잡고있었다. 성원이라고 해야 전문진과 한성희를 비롯한 몇사람밖에 없었다. 전문진이 동녕현에서 양재기술을 조금 배우다가 나온 구대원이라면 한성희는 요영구에서 아동단사업을 하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신대원이였다.
​ 전령병과 함께 군복을 지고 요영구로 달려온것은 전문진이 아니라 몇달째 북만에 간 원정대를 기다리며 외진 섬이나 다름없는 솔밭골의 수림속에서 임신중에 있는 그를 정성껏 간호하고있던 한성희였다. 한성희는 앓아누워있는 나를 보자 눈물부터 쭈르르 흘리였다.
​ 그가 지고 온 군복들을 원정대원들에게 갈아입힌 다음 나는 한성희를 재봉대로 돌려보냈다.
​ 그런데 솔밭골로 돌아간줄로만 알았던 한성희가 다음날 아침 잣죽이 얹혀있는 밥상을 들고 내앞에 다시금 천연스레 나타났다.
​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

《옥봉동무, 어떻게 또 여기에 나타났소? 무슨 일이 생겼소?》

​ 옥봉이란 한성희의 아명이였다. 그는 한영숙이라는 별명도 가지고있었다. 한성희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였다. ​

《장군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어제 솔밭골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 나는 한성희의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아동단시절이나 입대후나 그는 상급의 명령지시에 불복한적이 단 한번도 없는 충실하고 순박하고 고지식한 녀성이였다. 그가 나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변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렇게 몸져누워계시는데 제가 돌아간들 문진언니가 좋아하겠습니까.》

​ 나를 걱정하는 한성희의 그 웅심깊은 마음은 물론 고마운것이였다. 나는 좁쌀과 미역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한성희의 배낭속에 넣어주며 그를 달래였다. ​

《여기에 나를 돌봐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동무는 내걱정을 말고 오늘중으로 당장 솔밭골에 돌아가야 하오. 동무가 가지 않으면 전문진이는 어떻게 하오? 지금이 바로 막달이라고 하는데 혼자서야 해산을 할수 없지 않소.》
《장군님, 다른 명령만은 다 집행하겠지만 이 명령만은… 간호를 해드리지 못하고 재봉대로 돌아가면 문진언니가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장군님, 저의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장군님께서 제일 급한 대목을 넘기고계시는 때에 녀대원들이 한명도 없다니 말이 됩니까.》

​ 한성희는 오히려 나를 설복하느라고 열을 올리였다. ​

《성희동무, 부탁이니 어서 돌아가서 문진동무를 간호해주오.》

​ 그때 리효석중대장이 한성희를 곤경에서 구원해주었다. ​

《대장동지, 한성희가 가도 산파구실은 하지 못합니다. 아이도 못낳아 본 처녀가 어떻게 해산방조를 합니까.》

​ 경험있는 녀자를 물색하여 보내겠다는 중대장의 말에 나는 그만 굽어들고말았다.
​ 한성희는 그날부터 주야로 나를 간호하여주었다. 그는 끼니마다 밥상에 잣죽을 놓아주군하였다. 아마 그의 주문을 받고 4중대 대원들이 요영구의 수림속에 들어가 눈속에 파묻힌 잣송이들을 주어온 모양이였다. 중대장자신도 막대기를 들고 아침마다 잣사냥을 떠나군하였다.
​ 한성희는 자기가 간호를 잘못해서 장군님의 몸을 추세우지 못한다면 조선사람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밤잠도 자지 않고 극성스레 나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언제였던지 그가 자기의 머리태를 잘라 나의 신발바닥에 깔아준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하나의 사실을 보고 한성희가 정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살마저도 서슴없이 떼주는 그런 형의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 피줄이란 역시 속일수 없는것이였다.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 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 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韓興權, 1912~1938)[5]도 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

한성희네 두 자매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기 위하여 유격대에 입대하려고 결심하였다.
​ 그런데 두 딸이 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는 누가 모시고 가정은 누가 돌보느냐 하는 문제가 불쑥 튀여나오는 바람에 자매간에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한성희는 입대적격자가 못된다는데로부터 매번 수세에 몰리군하였다. ​

《나이가 어리다고 날 숙보면 안돼. 언니가 하는 일은 나두 다하지 않니. 키두 언니만치는 크단 말이야.》

​ 한성희가 이런 말로 맵짜게 공격을 들이대면 언니는 언니대로 여유작작하게 반공격을 가해오군하였다. ​

《키는 커두 젖비린내야 어디 가겠니.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구 했다. 너는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동단생활이나 잘하여라.》

​ 그 어느쪽도 상대방에게 참군의 영예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 딸들이 이불밑에서 자신들의 장래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론의를 하고있을 때 그 대화의 한토막을 우연히 엿듣게 된 한성희의 어머니는 자기가 입고 다니던 단벌무명치마를 뜯어 밤을 새워가며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두개의 배낭을 만들었다. 다음날에는 그 배낭들에 미시가루를 듬뿍듬뿍 닦아넣었다. 그 두 배낭이 자기들이 지고 가게 될 행장이며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꾸려줄수 있는 지참품과 같은 물건이라는것을 한성희네 자매가 알게 된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였다.
​ 그날 한성희의 어머니는 두 딸을 앉혀놓고 이렇게 선언하였다. ​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봉양을 바라지 않는다. 나라도 찾지 못한 주제에 효도가 다 무어냐. 너희들이 이 에미를 돌보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둘 다 이달음으로 유격대에 들어가거라!》
《어머니!》

​ 두 자매는 울음을 터치며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그들은 가슴을 치는 맹약과 눈물로써 어머니를 하직하였다. 1934년 봄에 우리는 한성희를 지휘부직속 재봉대로 소환하였다.
​ 그는 전도가 촉망되는 녀대원이였다.
​ 성격상 약점이 있다면 만사를 너무 태평스럽게 대하는것이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녀성으로서는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군인으로서는 놀랍다고 할만치 량순하고 무경각하였다. 이 무경각성때문에 한성희는 결국 적들에게 붙잡혀 혁명을 중도반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 본대로 찾아오라는 나의 지령을 받고 다른 대원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던 그는 녕안현 이도하자의 수림속에서 적들의 포위속에 들었다. 수십명의 위만군병사들이 총대를 꼬나들고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줄도 모르고 어린 녀대원은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에서 머리를 감고있었다. 우리가 무송지구에 진출하여 새 사단을 조직하고있을 때 체포된 그는 라자구에서 적들의 문초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 수인들을 지키고있던 보초들중에는 한성희를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정한 량심적인 조선인 보초도 있었다. 그는 혁명을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귀순문서장에 도장을 찍고 매일매일을 치욕스럽게 살아가던 사람이였다. 교형리들이 한성희를 죽이려한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보초는 그 녀자에게 탈출을 건의하였다. 자기도 총을 벗어던지겠으니 함께 도주하여 조선으로 나가든가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초막이나 치고 생활하는것이 어떤가고 하였다. 한성희는 그에 동의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적의 소굴을 감쪽같이 탈출하였다. 그 조선인보초는 후날 그의 남편이 되였다.

​ 한성희가 적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것을 다같이 원통하게 생각하였다. 어떤 녀대원들은 너무 분해서 밥도 먹지 않았다. 친동생처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던 전우를 잃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한성희의 금새를 잘 알고있는 왕청시절의 투사들은 지금도 그를 아름답게 추억하고있다.
​ 한성희의 자식들이 어머니의 경력을 두고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도 다른 투사어머니들처럼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빨찌산대오에 서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 물론 한성희가 적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더라면 더 좋았을것이다.
​ 하지만 혁명이란 탄탄대로가 아니다. 출발신호만 울리면 누구나 쾌속으로 뛰여가 쉽사리 결승선에 도달할수 있는 100메터경기 같은것은 더욱 아니다.
​ 성공과 실패, 전진과 후퇴, 앙양과 좌절의 부단한 교차와 반복속에서 승리를 향해 달리는 끝없는 행로가 바로 혁명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 장구한 행로에 무슨 곡절인들 없겠는가.
​ 자식들이 부모들을 원망할 때마다 한성희는 이런 말로 그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

《아버지, 어머니의 경력가운데 오점이 좀 있다고 너희들까지 고민할것은 없다. 조선로동당은 부모의 잘못을 가지고 자식들을 허물하지 않는다. 부모가 지은 죄를 자식들이 책임질수 없다는것이 바로 우리 수령님의 정치이다. 문제는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수령님께 충성을 다하거라.》

​ 나는 한성희가 자식들을 옳게 교양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당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간직한 성실하고 결백한 녀성이였다.

​한성희가 쑤어준 그 잣죽과 사슴고기를 넣은 좁쌀죽의 덕으로 나는 사흘만에 병석에서 겨우 일어날수 있었다.

위에 나온대로 김일성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성희는 녕안현 이도하자(寧安縣 二道河子)에서 만주군(滿洲軍, 僞滿軍)에 포위되어 체포되었으며, 정확한 연대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1935년 경의 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1940년 4월 일본군 노조에(野副) 토벌대에 체포된 김혜순이 한성희이며, 체포되자 김혜순이라는 이름을 둘러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처로 알려진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김일성의 전처들 중에 한국에 가장 먼저 알려진 사람은 김혜순인데, 그녀와 관련된 조선일보 기사와 증언을 이명영이 발굴해 내었으며, 이것은 그녀의 남편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북한에 거주하다 소련 유학을 가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 본명 허웅배, 1928~1997)[6][7]은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김일성의 처음 처는 한성희(韓聖姫)이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혜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대었다고 주장했다.[8][9]

김(金)의 최초 처(妻)는 한성희(韓聖姫)
김일성(金日成)의 최초의 처(妻)는 한성희(韓聖姫)라는 여성이었다. 빨치산부대의 부녀부장 또는 여자청년부장이었다. 이 여자는 40년 일본(日本) 토벌대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어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해방후 귀국한 뒤 곧 한성희(韓聖姫)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47년경 도여맹(道女盟) 부위원장으로 있는 한영숙(韓英淑)이라는 여자가 한성희(韓聖姫)임을 알아냈다. 한(韓)은 체포 뒤 복역중 반일(反日) 활동중지, 개명(改名), 출가의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녀는 석방 뒤 경찰의 감시가 심해 반일(反日) 투쟁을 계속할 수가 없어 농민에게 개가해 2남 2녀의 어머니로 해방을 맞았다. 개선장군 김일성(金日成)은 지도자가 됐는데 그는 빨치산 당시 그녀의 부하였던 김정숙(金貞淑)과 결혼, 「유라」「슈라」라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韓)은 해방 후 로동당원이 되어 도(道) 여맹부위원장이 됐는데 남편이 천도교청우당(天道教青友黨)에 입당하는 바람에 이 가정은 정치폭풍의 와중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때 김일성(金日成)은 한(韓)을 찾았는데 김일성(金日成)은 그녀의 행불행이 자신에게 관계가 있는데에 고민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한(韓)을 지구대표로 선발,파견하도록 지시하여「전부부」가 재회했고 한(韓)은 군인민위원회(郡人民委員會) 위원장으로 승격됐다. 김일성(金日成)과 한(韓)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김(金)의 처(妻) 김정숙(金貞淑)이 죽고난 뒤 김(金)이 자기의 비서였던 김성애(金聖愛)와 결혼한 때 부터였다. 이들의 결혼이 자신과 김정숙(金貞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동아일보 1982년 3월 26일 4면

이것이 김일성의 전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한성희는 1935년경 만주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김혜순은 1940년 4월 일본군 노조에(野副) 토벌대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으며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는 한영숙(한성희)의 사진이 실려있는데,[2][3] 김혜순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 10월 한소 수교 직후 방한한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俞成哲)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10][11]

내가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은 한성희란 여인으로, 그녀는 30년대 만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다 김일성과 진중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성희는 1939년 일본 토벌대에 체포돼 그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온 뒤 곧 한성희의 행방부터 수소문했고, 그녀 고향인 강원도에 빨치산 출신 부하를 보내 찾아보도록 했다. 마침내 1947년 김일성은 한영숙(韓英淑)이란 새 이름으로 강원도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성희를 찾아냈다. 한성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더 이상 항일투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강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에서 개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귀국을 알고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에 체포된 김혜순의 이름은 본명이지 한성희가 둘러댄 가짜 이름이 아니다. 또 2000년 이후 중국 쪽에서 나온 동북항일연군 출신자 또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김혜순과 달리 한성희에 관한 당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12]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 5월 30일 자에 이름은 거명하지 않고, 김정숙 이전의 김일성의 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과연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소련」으로부터 그 아내와 두 어린애를 데려내다가, 그가 북한의 괴뢰 괴수가 되었을 때는 일제시의 지사관사(知事官舍) 자리에다 호강스러운 살림을 차려놓았던 것이다. 김정숙(金貞淑)이라는 그 부인은 사실은 김일성(金日成)의 둘째번인가 세째번인가의 아내로 첫번째 아내는 일제 때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어 하필이면 담당 취조경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해방 후 어떤 심정으로서인지 북한 독재자가 된 김일성(金日成)을 면회하려다 혼살이나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문이었다.

한재덕이 말하는 사람은 김혜순보다는 한성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성희가 토벌대장의 첩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4]

함께 보기

각주

  1.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정일·정운, 사랑받는 법 알아" 조선일보 2009.08.27
  2. 2.0 2.1 2.2 임은(林隱), 『김일성 정전(金日成正傳)』, (沃村文化社, 1989) p.64
  3. 3.0 3.1 3.2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 :金日成正傳』, (東京:自由社, 昭和57[1982]) p.56
  4.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지음, 『김일성 전기』 (한울아카데미, 2022년 06월 23일) p.44.
  5. 한흥권(韓興權, 1912~1938)
  6. 북한체제 환멸 망명한 의병 후손 - 중앙일보 1989. 9. 26.
  7.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8. 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1982.03.26 동아일보 4면
  9. 임은(林隱) 著,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서울 : 옥촌문화사, 1989년) pp.63~67.
  10. 증언(證言)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
  11.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12.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13.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6)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手記(수기)〉 1962.05.30 동아일보 2면
  14. [청설TV]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1) 청설TV 2020. 1. 29.
    [청설TV]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2) 청설TV 2020. 1. 31.
    체포된 후 어쩔 수 없이 귀순하고 토벌대장의 첩이 된 슬픈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