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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935년 2월 ~ 1935년 6월)
: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935년 2월 ~ 1935년 6월)
: 1. 사나운 회오리
: 1. 사나운 회오리
{{인용문|'''[pp.7~10]'''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인용문|'''[pp.7~10]'''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br>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도 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韓興權)도 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2023년 5월 26일 (금) 12:29 판

한성희(韓聖姫)는 만주 동북항일연군 시기 북한 김일성의 첫 아내였다. 한성희의 아명은 옥봉이었고, 한영숙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 회고록의 한성희 관련 기록

  • 세기와 더불어 제4권(항일 혁명 4편, 1993년 출간): 1935년 2월 ~ 1936년 5월
제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 (1935년 2월 ~ 1935년 6월)
1. 사나운 회오리
[pp.7~10] 한성희의 일가는 모두가 동정심이 강하고 인간미가 풍부한 혁명가들이였다. 그의 아버지 한창섭은 리광, 김철, 김은식 등의 투사들과 함께 일찍부터 북하마탕일대에서 항일혁명에 참가한 선각자의 한사람이였다. 대방자반일회조직을 책임지고 리광별동대의 군량미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1932년 봄에 일본군《토벌대》의 군도에 찔려 참살되였다. 언니 한옥선도 적들에게 화형을 당하였다. 오빠 한송우는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유격근거지가 해산되기전까지는 왕청에서 우리와 함께 적구활동을 많이 했고 후에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지대장으로 이름을 날린 나의 전우 한흥권(韓興權)도 바로 한성희의 4촌오빠이다. 한흥권이네 5형제는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렬사들이였다.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김일성의 전처들 중에 한국에 가장 먼저 알려진 사람은 위의 김혜순인데, 그녀와 관련된 조선일보 기사와 증언을 이명영이 발굴해 내었으며, 이것은 그녀의 남편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북한에 거주하다 소련 유학을 가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 본명 허웅배, 1928~1997)[1][2]은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김일성의 처음 처는 한성희(韓聖姫)이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혜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대었다고 주장했다[3][4].

김(金)의 최초 처(妻)는 한성희(韓聖姫)
김일성(金日成)의 최초의 처(妻)는 한성희(韓聖姫)라는 여성이었다. 빨치산부대의 부녀부장 또는 여자청년부장이었다. 이 여자는 40년 일본(日本) 토벌대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어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해방후 귀국한 뒤 곧 한성희(韓聖姫)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47년경 도여맹(道女盟) 부위원장으로 있는 한영숙(韓英淑)이라는 여자가 한성희(韓聖姫)임을 알아냈다. 한(韓)은 체포 뒤 복역중 반일(反日) 활동중지, 개명(改名), 출가의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녀는 석방 뒤 경찰의 감시가 심해 반일(反日) 투쟁을 계속할 수가 없어 농민에게 개가해 2남 2녀의 어머니로 해방을 맞았다. 개선장군 김일성(金日成)은 지도자가 됐는데 그는 빨치산 당시 그녀의 부하였던 김정숙(金貞淑)과 결혼, 「유라」「슈라」라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韓)은 해방 후 로동당원이 되어 도(道) 여맹부위원장이 됐는데 남편이 천도교청우당(天道教青友黨)에 입당하는 바람에 이 가정은 정치폭풍의 와중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때 김일성(金日成)은 한(韓)을 찾았는데 김일성(金日成)은 그녀의 행불행이 자신에게 관계가 있는데에 고민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한(韓)을 지구대표로 선발,파견하도록 지시하여「전부부」가 재회했고 한(韓)은 군인민위원회(郡人民委員會) 위원장으로 승격됐다. 김일성(金日成)과 한(韓)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김(金)의 처(妻) 김정숙(金貞淑)이 죽고난 뒤 김(金)이 자기의 비서였던 김성애(金聖愛)와 결혼한 때 부터였다. 이들의 결혼이 자신과 김정숙(金貞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전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계기가 된다.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의 일본어판에는 한영숙(한성희)의 사진이 실려있는데,[5][6] 김혜순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 10월 한소 수교 직후 방한한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俞成哲)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7][8]

내가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은 한성희란 여인으로, 그녀는 30년대 만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다 김일성과 진중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성희는 1939년 일본 토벌대에 체포돼 그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온 뒤 곧 한성희의 행방부터 수소문했고, 그녀 고향인 강원도에 빨치산 출신 부하를 보내 찾아보도록 했다. 마침내 1947년 김일성은 한영숙(韓英淑)이란 새 이름으로 강원도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성희를 찾아냈다. 한성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더 이상 항일투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강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에서 개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귀국을 알고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일본군에 체포된 김혜순의 이름은 본명이지 한성희가 둘러댄 가짜 이름이 아니다. 또 2000년 이후 중국 쪽에서 쏟아져 나온 동북항일연군 출신자 또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김혜순과 달리 한성희에 관한 당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9]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 5월 30일 자에 이름은 거명하지 않고, 김정숙 이전의 김일성의 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10]

과연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소련」으로부터 그 아내와 두 어린애를 데려내다가, 그가 북한의 괴뢰 괴수가 되었을 때는 일제시의 지사관사(知事官舍) 자리에다 호강스러운 살림을 차려놓았던 것이다. 김정숙(金貞淑)이라는 그 부인은 사실은 김일성(金日成)의 둘째번인가 세째번인가의 아내로 첫번째 아내는 일제 때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어 하필이면 담당 취조경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해방 후 어떤 심정으로서인지 북한 독재자가 된 김일성(金日成)을 면회하려다 혼살이나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문이었다.

한재덕이 말하는 사람은 김혜순보다는 한성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성희가 토벌대장의 첩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1]

​==함께 보기==


각주

  1. 북한체제 환멸 망명한 의병 후손 - 중앙일보 1989. 9. 26.
  2.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3. 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1982.03.26 동아일보 4면
  4. 임은(林隱) 著,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서울 : 옥촌문화사, 1989년) p.53
  5.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 :金日成正傳』, (東京:自由社, 昭和57[1982]) p.56
  6.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지음, 『김일성 전기』 (한울아카데미, 2022년 06월 23일) p.44.
  7. 증언(證言)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
  8.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9.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1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6)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手記(수기)〉 1962.05.30 동아일보 2면
  11. [청설TV]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1) 청설TV 2020. 1. 29.
    [청설TV]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2) 청설TV 2020. 1. 31.
    체포된 후 어쩔 수 없이 귀순하고 토벌대장의 첩이 된 슬픈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