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 45권, 고종 41년(1904년) 2월 23일 기사(국사편찬위원회 번역)

러일전쟁 발발 2주 뒤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한일의정서>가 실린, <고종실록>의 해당 부분.

한일 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광무(光武) 4년 북청 사변(北靑事變)후 러시아〔俄國〕는 만주(滿洲)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日本)·영국(英國) 양국이 동맹으로 그에 대응하고 미국(美國)도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응하지 않다가 7년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우리나라 용암포(龍巖浦)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반도(半島)의 존망이 그 안위(安危)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증수(增修)하자, 올해 2월 6일에 이르러서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함을 공격하여 인천(仁川)에서 2척을 격파하자 러시아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仁川港)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일 러시아 공사(公使) 파블로프〔巴禹路厚 : A. Pavloff〕가 서울을 떠나 귀국하였다. 이에 이르러 국면은 일변하였고 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의정서(議定書)〉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外部大臣臨時署理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과 대일본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는 각각 상당한 위임을 받고 다음의 조목을 협정한다.

제1조

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東洋)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

제2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선과 우의로 안전하고 편하게 한다.

제3조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제5조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 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 대신 간에 정황에 따라 협정한다.



광무(光武) 8년 2월 23일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 이지용(李址鎔)

명치(明治) 37년 2월 23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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