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개요

조약 전문(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아래는 1910년 8월 22일 조인된 한일병합조약의 현대어 번역문이다[1]. 8월 29일자로 공포[2]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순종실록> 1910년(순종 3) 8월 22일 기사에 실린, 병합조약 전문.[1]
〈병합 조약(倂合條約)〉[1]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약 원문

조약의 원문은 1910년 8월 2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에 일본어로 실렸다. 관보에 실린 우리 말 번역문에는 위 내용은 누락되어 있다.


1910년 8월 3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1면에 관보의 우리 말 번역문이 실렸는데, 여기에는 조약의 내용도 나온다.

관보: 호외, 일본천황폐하조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10년 8월 30일 1면
관보: 호외, [한국통치권 양여 조칙] 매일신보[每日申報] 1910년 8월 30일 1면


1934년에 편찬 완료된 순종실록에도 실렸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이 주관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고종실록》은 《순종실록》과 함께 이왕직(李王職)의 주관으로 1927년 4월 1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7년이 경과한 1934년 6월에 완성되었고, 이듬해 3월 31일에 간행이 완료되었다.[3]

조약의 공포가 1주일 늦어진 이유

일본외교문서 43권1책 582, 583 한일병합조약 관련 문서. 조약은 8월 26일 공포하는 것으로 예정되었으나, 조선 측의 요청으로 27일 황제의 즉위 기념일을 지난 후인 29일 공포하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 ~ 1929)가 쓴 글에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지만 곧바로 공포하지 않고 1주일 늦추어진 이유는 8월 27일 순종의 황제 즉위 4주년 기념일 연회를 베풀고 난 후 공포하도록 조선측이 일본에 요청했기 때문이라 나온다. 연회에 참석한 군신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먹고, 마시고 즐겼다고 했다. 량치차오는 이들의 달관한 듯한 행동에 전율을 느낀다고 했다. 병합조약은 체결 후 1주일 미루어진 8월 29일 월요일에 공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외교문서에서도 확인된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지 않았고, 조선 국왕과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들은 매국의 댓가로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과 지위를 받았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