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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인간의 행위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됨을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행위 심판에 대한 구절들이 가득하다. (겔 18:27-27,30 겔 33:12, 18-20 마 5:20 마7:21-23 막 9:43-47 요 5:28-29 히 10:26-27 약 1:14-15 약 2:14 요일 3:7-10 계 21:6-8)
바울은 인간의 행위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됨을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행위 심판에 대한 구절들이 가득하다. (겔 18:27-27,30 겔 33:12, 18-20 마 5:20 마7:21-23 막 9:43-47 요 5:28-29 히 10:26-27 약 1:14-15 약 2:14 요일 3:7-10 계 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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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거듭난 자는 예외 없이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세상을 뜻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사람에게 약속이 있으며(계2:7,11)천국은 이기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계21:1-5)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거듭난 자는 예외 없이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세상을 뜻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사람에게 약속이 있으며(계2:7,11)천국은 이기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계21:1-5)  
지금은 많은 메시지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그대로 들여다본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자 공의를 나타내는 십자가 앞에 사랑의 감격뿐만 아니라 경외함도 갖게 될 것이다. 균형 잡힌 구원관을 가질 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올바른 구원관을 가질 수 있다.
지금은 많은 메시지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그대로 들여다본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자 공의를 나타내는 십자가 앞에 사랑의 감격뿐만 아니라 경외함도 갖게 될 것이다. 균형 잡힌 구원관을 가질 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올바른 구원관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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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5일 (금) 00:43 판

KakaoTalk 20190314 182152689.jpg 바울은 인간의 행위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됨을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행위 심판에 대한 구절들이 가득하다. (겔 18:27-27,30 겔 33:12, 18-20 마 5:20 마7:21-23 막 9:43-47 요 5:28-29 히 10:26-27 약 1:14-15 약 2:14 요일 3:7-10 계 21:6-8)

'행위 구원'과 '행위 심판'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행위 구원'이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비성경적인 이단 사설이다. 반면에 '행위 심판'은 모든 믿는 자가 아니라 침 믿음을 가진 사람만 구원 받음을 나타낸다.[1] ​ 성경은 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루터식의 구원론[2]처럼 과연 믿기만 하면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일까? ​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보응하신다. 심판은 오직 '진리대로'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결코 이길 수 없다. 복음의 능력만이 죄와 속박의 지배에서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다. 인간은 단지 죄 사함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참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청교도들을 위시해서 19세기 이전의 유명한 신학자와 설교자와 전도자들은 ‘자기 점검’을 중시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자기 점검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강대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지금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관은 성경의 논지와 다르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동시에 매일 세상과 죄를 이겨야 한다고 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거듭난 자는 예외 없이 모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요일 5:4-5)세상을 뜻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사람에게 약속이 있으며(계2:7,11)천국은 이기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계21:1-5) 지금은 많은 메시지가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그대로 들여다본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자 공의를 나타내는 십자가 앞에 사랑의 감격뿐만 아니라 경외함도 갖게 될 것이다. 균형 잡힌 구원관을 가질 때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올바른 구원관을 가질 수 있다.

  1. 존 스토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심판받음 신약성경 전체는 이것을 가르친다. 곧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지만'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순된 말이 아니다. 사라으이 선한 행위만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개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것이다.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선행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날 것이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약 2:18, 20)이다. 심판 날은 공개적인 날이 될 것이므로 공개적인 증거, 즉 동정심을 보이는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의 결과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여러 번에 걸쳐 이것을 가르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꼐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우리의 행위대로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심판이다.
  2. 루터의 오직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에 대해 오직 믿음을 얘기하고 있으며 회개나 믿음에 따르는 순종에 대해 오직믿음을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확장하여 율법뿐만 아니라 회개나 행함이 있는 산 믿음에 대해서도 오직 믿음을 외쳐 신자들 안에 도덕적 방종을 불러왔으며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또한 현대 교회가 무율법주의로 가는데 크게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