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사건(惠山事件)은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 등이 이끄는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 마을을 습격한 소위 보천보 사건(普天堡 事件) 직후, 관련된 지하조직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등이 적발되어 1937~8년간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혜산경찰서가(惠山警察署) 작성한 혜산사건 조서(惠山事件 調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7권 (계승본)에 실린 사진. 논란이 많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의 정확한 신원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은 전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기 때문에 공개하지 못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함흥지법의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김일성의 신원은 나오지 않는다.

사건의 경과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1]

검거자

제1차 1937년 10월 10일 수회
제2차 1938년 7월 수회
검거인원 합계 739명
제1차 송국자 130명 중 103명 기소

제2차 송국자 156명중 85명 기소


당시 일본인들이 붙인 혜산사건(惠山事件)의 공식 명칭은 "중국 공산당의 조선내 항일인민전선 결성 및 지나사변 후방교란 사건(中國 共産黨の 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 竝 支那事變 後方攪亂 事件)"이다.[1] 지나사변(支那事變)은 일지사변(日支事變)이라고도 하며,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 전쟁(中日戰爭)을 말한다.

일본인들은 보천보사건이나 혜산사건을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일본의 중국침략을 방해하려고 후방인 조선 국경을 교란하기 위해 꾸민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동북항일연군에는 비록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코민테른과 중공당 만주성위가 지도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이 이런 일을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행동결정’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서기였던 위증민(魏拯民, Wei Zhengmin, 1909 ~ 1941)이 1936년 2월 9일 북만을 떠나서 안도현 미혼진(安圖縣 迷昏陣)으로 와서 3월 8일경 미혼진 회의를 주재하면서 조국광복회 건립을 논의하고 5월의 동강회의(東崗會議)에서 확정·발표하였다.[2][3] 보천보 사건도 역시 위증민이 받아 온 코민테른의 신방침에 따라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撫松縣 西崗)의 양목정자(楊木頂子) 회의에서 ‘조선국내진공작전’을 논의하는 중에 구상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4][5][6]


재판 기록

혜산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은 1941.08.28, 2심 판결은 1943.12.28, 3심 판결은 1944.10.23 에 있었다. 마동희 (馬東熙, 1912-1938)는 수사 도중에 죽었으며, 권영벽(權永壁, 1909∼1945), 이제순(李悌淳, 1908~1945) 등은 사형 당하고, 박달(朴達, 1910~1960)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고, 박금철(朴金喆, 1911~1967 ?)은 무기형을 받았다. 박달과 박금철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해방과 함께 석방된 후 북한으로 갔다. 박달은 고문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별다른 활동을 못 했으나, 박금철은 북한의 고위직에 올랐다가 1967년 갑산파 숙청 때 쫓겨났는데,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 6권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0) pp.543~840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투데이 2015. 03. 16 :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이미지가 나옴.
박금철(朴金喆)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이런 사람들도 창씨 개명한 이름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의 정치부 기자였던 박갑동(朴甲東, 1919~ )은 감옥에서 풀려난 박달과 박금철에게 평양에 나타난 북한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니,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고 하였다.[7][8][9] 박갑동(朴甲東, 1919~ )은 1973년에 중앙일보에 연재한 박헌영에 관한 글에서 북으로 간 박금철은 김일성과 서로 모르는 사이라서 강계로 내려가 강계시당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그를 발탁해 올린 사람은 박헌영이라고 하였다.[10]

[6.25 전쟁 중]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안에 총 정치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 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뒤에 박금철이 당 중앙간부부장 시대에「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이 발생되었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가는 남로 당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당부의원장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나 드디어 김일성의 손에 의하여 이효순과 같이 숙청 당하고 말았다. 일반 사람들은 박금철을 김일성의 직계로 알고 있었으나(보천보 사건 관계로) 사실은 평양의 김일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며 박헌영의 덕을 입은 사람이다.

1973년 9월 3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박갑동(朴甲東, 1919~ )의 이 글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기록을 재발견하여 공개한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글은 이듬해 1974년 중앙일보에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11][12][13][14]

또 해방 당시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15][16]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언급은 아무 것도 없으나, 다른 일본 기록과 달리 이름을 김일성 아닌 본명 김성주(金成柱)로 적고 있는데,[17]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것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론과 증거도 있으므로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자세한 사항은 "김일성 가짜설"을 참고하라.

갑산파(甲山派)

혜산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살아남아 해방 후 북한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을 갑산파(甲山派)라 부른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협력한 전력 때문에 빨치산파와 상당히 가까운 사람들이었지만, 김일성 유일체제와 김정일 후계구도 확립 과정에서 1967년 모두 숙청 당했다. 갑산파 요인 이효순(李孝淳, 1907~?)은 사형당한 이제순(李悌淳, 1908~1945)의 형이다.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 美윌슨센터 공개 외교문서…`장성택 처형'과 유사점 연합뉴스 2013/12/17
북한 부수상 박금철의 숙청(2) RFA 2018-07-24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북한의 역사 날조

당시 일본 기록에 나오는 혜산사건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정식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이며,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吳成崙, 1900~1947 ?)·이상준(李相俊, 李東光, 1904~1937)·엄수명(嚴洙明)[18] 등이 주도한 단체이다.[19][20] 혜산사건 판결서 등 관련 기록에 의하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도 단체의 조직에 상당히 간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단체 이름을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고 하면서, 김동명, 이동백(리동백), 여운형(려운형)이 주도했는데, 김동명은 김일성(金日成)의 가명이라고 주장한다.[21][22] 하지만 북한이 말하는 이런 단체는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실존한 적이 없다. 혜산사건과 관련한 일본측 기록에도 대부분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로 나오며, 줄여서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 한 경우도 있지만,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그런 단체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북한이 조국광복회가 결성된 날이라 주장하는 1936년 5월 5일에 여운형은 서울에서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바쁜 사람이 언제 만주로 가서 김일성과 조국광복회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인데, 어떻게 항일연군 인물도 중국공산당원도 아닌 여운형이 주도할 수 있겠으며, 그 조직에 여운형 측근 인물들이 단 한명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혜산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 중에 여운형 본인이나 측근은 물론, 당시 그가 알았을만한 인물도 없다.

여운형과 같은 저명 인물이 만주로 가서 동북항일연군이나 김일성 같은 인물을 접촉했다면 일제에 포착되지 않았을 리도 없고 어딘가 기록에 나와야 한다. 여운형이 해방전 북한 김일성을 알았다는 증거는 없고, 해방 후에 처음 알게된 것이 틀림없다. 조국광복회와 관련이 있는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일 뿐더러, 그 이름이 국내 신문에 처음 보도되는 것도 1936년 9월 이후의 일이다.[23] 서울의 여운형이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었다는 1936년 5월에 6사장 김일성이나 북한 김일성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것은 명백하다.

북한의 영화 중에는 해방 후 김일성이 여운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일성이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고 한다.[24] 스스로 날조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조국광복회는 보천보 사건 이후 연루자들을 검거 수사하는 혜산사건의 와중에서 드러났다고 말하지만, 보천보 사건 직전에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행사기사(偕行社記事)』 1937년 6월호 (5월 25일 간행)에 보인다.

혜산사건 관련 일제 기록

조국광복회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1차문헌이다. 창립선언문, 10대 강령, 발기인 등이 나옴.
《제5절 혜산 사건(중국 공산당 지도의 항일 인민 전선 결성과 지나 사변의 후방 교란)의 상황》, 『日帝植民統治秘史: 일제하 조선의 치안상황』 조선총독부경무국편, 김봉우 역 (서울 : 청아출판사, 1989) pp.339 ~ 355.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8/31
  2.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5장 중기(1919~1931)의 독립운동 - 3. 재만독립전쟁의 전개와 특징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기념관
  3.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81
  4. [광복60년 특집④] '北 정통성' 부여, 보천보 전투는 과장됐다 : 보천보엔 경찰 5명뿐, '무혈전투' DailyNK - 2005.08.12
  5. “보천보전투, 조작된 항일무장투쟁 신화” RFA 2017-06-07
  6.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52
  7.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50)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5 종합 5면
  8. 박갑동(朴甲東, 1919~ ),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
  9. 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 : 박갑동 <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1974.03.28 종합 3면 :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前代)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자이며 ....
  10.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1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7) - 6사장 김일성의 성분 중앙일보 1974.07.05 종합 3면
  1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8) -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1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9) 6사장 김일성의 죽음(하) 중앙일보 1974.07.10 종합 3면
  1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261~292.
  15.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16.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 앞의 이기건의 증언이 나옴.
  17.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투데이 2015. 03. 16 :혜산사건 판결서 일부 이미지가 나옴.
    보천보 사건 총사령 김일성의 죽음 아시아 투데이 2015. 03. 19 : 6사장이 김성주(金成柱)로 적힌 판결문 이미지가 나옴.
  18. 엄수명(嚴洙明)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수처장이었던 엄필순(嚴弼順, ? ~ 1936)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사상휘보 제14호 1938-03-01
  20. ≪中國 共産黨の 朝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および日支事變 後方攪亂 事件≫ :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 : 朝鮮 6』(東京, みすず書房, 1976) p.265
  2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 제12장 광복의 새 봄을 앞당겨 (1936년 3월 ~ 1936년 5월) / 5. 조국광복회』
  2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 제18장 중일 전쟁의 불길 속에서 (1937년 7월 ~ 1937년 11월) / 6. 《혜산 사건》을 겪으면서』
  23. 對岸襲來(대안습래)한 共軍(공군) 極度(극도)의 食糧難(식량난) 1936.09.14 조선일보 2면
  24. 수령의 역사는 모두 왜곡된 역사 : 조국광복회 날조 RFA 2013-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