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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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4.05 남북연석회의에 축사를 낭독하는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3년 9월 9일


주석
김두봉 북조선 국가원수
총리
김일성 북조선 총리
개인 정보
출생
출생지
사망
1968년 3월 5일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노환으로 병사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당
경력
소설가 출신 정치가
조선로동당 명예대표고문위원
부모
홍범식(부)
은진 송씨 부인(모)
조경식(계모)
친인척
친조부, 고모부, 사위
홍승목(친조부)
조완구(고모부)
김일성(사위)
배우자
자녀
3남 3녀
장남 홍기문(洪起文)
차남 홍기무(洪起武)
3남 홍기하(洪起夏)
장녀 홍주경(洪姝瓊)
차녀 홍무경(洪茂瓊)
3녀 홍계경(洪季瓊)
종교
없음(무신론)
별명
호(號)는 벽초(碧初)
필명 홍가인(洪假人) 또는 홍가인(洪可人)·백옥석(白玉石)

홍명희(洪命憙,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일제시대에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林巨正)》[1]을 연재하여 유명해졌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부수상 등을 지냈으며, 딸이 김일성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호는 벽초(碧初)이다.

생애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한글 신문 매일신보(每日新報)가 1945년 11월 21일자로 서울신문으로 개제(改題)하여 속간될 때 홍명희는 고문(顧問)을 맡았고, 아들 홍기문(洪起文)은 편집국장이 되었다.[2]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평양행을 설득

홍명희는 1946년 봄부터 북한 공산당에 포섭되었다고 하며, 1946년 3월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의 비밀 방북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둘째 아들 홍기무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3][4]

경교장(京橋莊)에 내왕 빈번(來往 頻繁) 1948.03.18 경향신문 1면
회담제안 작성(會談提案 作成) 명일 발표(明日 發表)할 예정(豫定) 1948.04.18 조선일보 1면

홍명희가 평양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것도 모른채 이처럼 김구김규식은 그와 남북협상에 대해 긴밀히 논의하며 속고 있었다. 자신의 속마음은 숨긴채 양김씨를 설득하던 홍명희의 이런 행동을 보면 이미 북한의 공작원이나 다름없었다. 홍명희는 아마도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몇달 뒤 일약 부수상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해방직후부터 6.25 때 월북하기 전까지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홍명희도 이때 평양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눌러 앉았다.

북한 초대 내각 구성원들 사진 : 앞줄 수상 김일성의 왼편이 부수상 홍명희이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특히 백범은 평양의 조만식으로부터 밀서를 종종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북동포가 전부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이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평양에 간 것도 이같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중요한 배경은 평양의 김일성이 5·10선거를 파탄시켜 이승만 정권을 수립 못 하게 하기 위해 백범이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주면 남조선에서 비록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이북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남로당에서도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백범에게 공작도 했었다. 백범은 황해도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굉장했었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김일성 당ㆍ군ㆍ정 3권 장악/분단책임 미­이승만에 전가… 공산정권 수립
백범은 남북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계의 북조선 민주당계나 기타 북조선 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이북동포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꼭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는데 김일성은 백범이 회의대표들과 충분히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백범의 방북보고서를 보면 (이것은 당외비였는데 남로당 수중에 한 부 들어왔다) 아주 불만에 차 있었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시책을 다 부정적으로 보았고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 학원을 지어 혁명가 유가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백범은 평양행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승만에게만 타격을 주었을뿐 김일성은 오히려 덕을 보았으며 백범 자신은 잃은 것만 있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범과 심산(김창숙)이 믿고 있던 벽초(홍명희)는 평양연석회의에 가서는 김일성에 밀착하여 서울을 버리고 평양에 영주하기 위해 가족을 다 불러갔다.

9월에 김일성정권이 수립되자 벽초는 부수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감격해 쌍둥이딸 둘을 김일성집 가정부로 보냈다. 큰아들 기문은 과학원원사로 한글을 연구하고 둘째아들 기무는 38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평양에서 벽초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역시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란 것이었다.

홍명희는 북한에서 최고 권력층이 되었지만, 서울을 그리워 했다니 북한 생활에 그렇게 만족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홍명희의 월북 배경이 북한의 철저한 친일파 청산이라는 주장

홍명희는 월북하면서 이승만과 남한이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김일성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고 주장했다 한다. 북한의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며 부수상이었던 홍명희와 자주 만나기도 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정상진(鄭尙鎭, 1918~2013)도 홍명희로부터 유사한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5] 홍명희가 월북할 당시인 1948년 4월에는 김일성은 해방직후부터 소련군을 등에 업고 집권자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비해 남한은 정부도 없고 이승만은 집권하기도 전이므로 사리에 맞지도 않는 엉뚱한 주장을 한 것이다. 명분없는 월북을 남쪽 인사들에 대한 비방으로 가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홍명희 본인도 1941년에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6], 1945년에는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7]에 이광수(李光洙, 香山光郞)], 최남선(崔南善) 등과 나란히 참여하여 친일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사람인데,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내며 부수상이었던 홍 선생을 자주 만났다는 고려인 정상진(鄭尙鎭, 1918~2013)씨는 2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홍 선생이 북한의 친일파 완전청산을 높이 사 북한에 남게 됐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정씨는 "어느 날 홍 선생을 찾아가 북한에 남게 된 이유를 묻자 '나에게는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란 잣대보다는 애국자냐 친일분자냐란 잣대가 중요하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친일파를 끌어안고 춤췄다. 하지만 김일성은 친일파를 철저히 제거했다. 이승만은 일본과 싸운 적이 없지만 김일성은 일본과 싸웠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홍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를 모른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친일파 숙청)은 지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홍 선생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지도 않은 채 무소속으로 지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1955년 소련파 숙청 이후 소련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홍 선생이 그 뒤 북한 정권의 변화(김일성 독재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게 됐는지 등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했다.

정씨는 특히 "양반지주 계급 출신인 홍 선생이 월북해 부수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태준, 황철, 문예봉, 최승희, 김순남 등 남한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1948년부터 다음해까지 월북했다"면서 "홍 선생이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남한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홍 선생은 '명예직' 부수상 자리에 있으면서 산하 기관장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으나 나는 홍 선생의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아 정부 청사에 들어갈 적마다 그를 찾아 많은 담소를 나누곤 했다"면서 "홍 선생은 소설 '임꺽정'을 완성하려 무척 애를 썼다"고 말했다.

한편 정씨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때 홍 선생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연 김구 선생이 '북한에 잔류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칭찬할 수 있지만 남한 동포를 버릴 수는 없다"고 밝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가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조만식을 제거하고 내세운 꼭두각시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다면 멍청한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소련과 공산주의에 동조한 것이다. 애국자냐 친일분자냐가 중요했다면 소련의 대리인인 김일성은 애국자고, 소련이 제거한 조만식은 친일분자란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홍명희가 월북할 당시는 김일성이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 외에는 실제로 무슨 항일투쟁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 내용이 거의 알려지기 전이고, 그가 해방 직전 5년간 소련군에 복무하며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를 때이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과 북한만 찬양하고 이승만과 남한에 대한 비방을 일삼은 것으로 보아 그는 북한 체제에 완전히 동화된 사람으로 보이며, 그러기에 딸도 김일성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북한이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한 것으로 믿었다면 너무 순진하거나 선전에 속은 것으로 보인다.

정상진은 이태준(李泰俊, 1904~1970), 최승희(崔承喜, 1911~1969), 김순남(金順男, 1917~1983) 등이 홍명희가 월북해 부수상이 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월북했다고 했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홍명희보다 먼저 월북했다.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고 홍명희가 부수상이 되었을 때는 3.8선을 넘어 월북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므로 증언에 조리도 없다. 게다가 무용가 최승희는 친일로 논란이 많은 사람인데, 홍명희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으로 가서 한때 잘 나가기도 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과 배치되는 월북 후의 행보

홍명희는 일제시대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임꺽정(林巨正)》으로 명성을 얻게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방 후 정치를 하게된 사람이다. 위의 정상진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월북 후에도 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완성을 위해 애를 썼다고 하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정계에 몸담아 소설 나부랑이나 쓸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부수상이라는 고위직을 맡아 권력 최상층부에 있으면서 인민을 수탈하며 노예로 부리는 김일성에게 아부나 하며 사는 처지라 부패한 탐관오리들에 대항해 의적(義賊)이 되었다는 임꺽정의 적(敵)이 된 셈이니 자격지심에서라도 차마 그런 소설을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월북 후의 행보는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임꺽정을 철저히 배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은 북한에서도 한 때 영화로 만들어져서 인기를 끌었는데, 김정일이 상영을 금지시켰다고 한다.[8] 그 영화를 본 주민들이 체제에 대한 저항심을 가지게 될까봐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소설 자체가 북한 체제가 두려워하는 일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은 뻔하다.

홍명희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 지향적이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권력 최상층부에 가까이 있었다. 그의 11대조 홍주원(洪柱元, 1606~1672)선조의 부마였고,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나, 정조 때의 권신 홍국영(洪國榮, 1748~1781)도 집안 방계선조였다. 조부 홍승목(洪承穆, 1847~1925)이나 부친 홍범식(洪範植, 1871~1910)도 조선말 고위 관직에 있었다. 그의 장인 민영만(閔泳晩, 1863~1916)은 고종(高宗, 1852~1919)의 외6촌 동생으로, 고종의 외조부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형 민치대(閔致大)의 손자이다.

조부는 일제의 작위도 받았지만, 부친이 1910년 한일 합방에 반대하여 자결한 때문에 홍명희는 차마 일제시대에 권력에 진출할 생각을 할 수 없었을테니 소설이나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해방이 되니 가문의 전통대로 권력을 추구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했다가 자유경쟁을 해야하는 남한에서는 이렇다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하고,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에게 붙어 원하던 권력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했지만 일찍 죽은 것은 집안 방계 선조 홍국영이 여동생을 정조의 빈으로 들여보냈지만, 원빈 홍씨(元嬪 洪氏, 1766~1779)가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한 것을 연상시킨다.

6.25 전범

홍명희가 6.25 남침의 주범이라 할 수는 없지만, 부수상이라는 직위상 일찍부터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에 대한 승인을 얻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를 수행했으며, 1950년 남침 전쟁 개시 직후인 6월 26일 만들어진 전쟁 최고 지휘부인 7인 군사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으므로 전쟁에 대해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의 생모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는 그가 두 살때인 1890년 세상을 떠나, 계모 조경식(趙璟植, 1876~1950)이 그를 양육했다. 하지만 1948년에 노모만 고향 괴산에 남겨 두고 그의 일가족 전체와 계모 소생의 동생까지 월북하였다. 이어 6.25 남침이 발발하자 괴산의 계모는 우익 인사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이는 그가 북한의 고위직 인물이 된 것과 무관할 수 없으므로, 그는 계모에게 말할 수 없는 불효를 한 것이다. 월북하려면 노모를 모시고 가든가, 아니면 월북하지 말든가, 그도 아니면 기필코 전쟁이라도 막든가 했어야 했다.

(1949년 3월 김일성 방소 당시 수행한 홍명희 등의 영상)

신정균 일기(申鼎均 日記)

신정균 (申鼎均, 1892 ~ 1960)6.25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申翼熙, 1894~1956)의 연상의 조카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같이 성장하여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의 장남 신창현(申昌鉉)은 국회의장 비서였다. 신정균 일기에는 그가 6.25 중에 겪은 일들이 나오는데, 그 중 홍명희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매우 비판적이다.

拾月 初二日 庚戌, 晴. [1950년 10월 초2일 (양력 11월 11일) 경술, 맑음.]
洪命喜者, 故洪錦山範植之子, 舊韓乙巳, 爲之立殣云, 其子命喜以其女, 妻金日成云, 今爲北鮮巨頭, 乃範植之悖子, 而其父之罪人也.

홍명희는 금산(錦山)군수였던 고(故)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의 아들이다. (홍범식은) 구한(舊韓) 을사(乙巳, 1905)년에 절개를 지켜 죽었는데[11], 그 아들 명희는 딸을 지금 북조선의 거두 김일성의 처가 되도록 했다고 하니, 범식의 패륜아들이요, 그 부친의 죄인이다.
홍명희의 딸은 1950년 1월 김일성과 결혼했다. (아래 참고)
陰四月 初九日 甲寅, 晴風. [1951년 음4월 초9일 (양력 5월 14일) 갑인, 맑고 바람.]
毛澤東·周恩來亦一中共之怪星也, 今次越境侵韓, 實是蘇聯前驅, 而爲之嗾使, 犧牲其自國同胞, 以獻忠共産主義, 且欲狐媚蘇聯, 何其愚哉. 至再至三, 而執迷不悟, 至如北韓之民, 爲倀爲鬼, 傀儡登場, 而爲金日成·洪命喜輩之愚矣. 殘虐同族, 國幾爲墟而迷不知返, 中州之毛賊, 北韓之金凶, 是乃作俑者之一類之人也, 其腸肚之相連可知也. 噫, 其痛矣, 人耶天耶, 愚所以未知者也.
八月 初五日 壬申, 晴. [1952년 8월 초5일 (양력 09월 23일) 임신, 맑음]
洪命憙·李康國, 赤色之巨頭也. 現帶要任於北地, 有所流動云, 哀哉.

홍명희, 이강국(李康國, 1906~1957 ?)은 공산주의자의 거두(巨頭)이다. 현재 북한의 요직에 있는데 자리를 이동했다고 하니 슬픈 일이다.

아들과 제자를 간첩으로 남파

홍명희는 둘째아들 홍기무(洪起武, 1910~?)와 제자 이구영(李九榮, 1920~2006)을 간첩(間諜)으로 내려 보냈다. 이구영은 1958년 7월 남파되었다가 부산에서 검거되어 그해 12월 2일에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징역형을 살다 1980년 석방되었다. 이후 남한에서 거주하다 사망했다.

간첩(間諜) 이구영(李九榮, 1920~2006)에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1958년 12월 3일자 국제신보(위)와 부산일보(아래) 2면 기사.

김일성과 홍명희의 딸들

홍명희의 자녀로는 아들 홍기문(洪起文, 1903~1992), 홍기무(洪起武, 1910~?)와 쌍둥이 딸 홍주경(洪姝瓊, 1921~?), 홍무경(洪茂瓊, 1921~?) 및 셋째 딸 홍계경(洪季瓊, 1926~?)이 있었다고 한다.[12][13][14]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

위에서 본 대로 박갑동은 홍명희가 부수상이 되자 감격해서 쌍둥이 딸을 김일성 집에 가정부로 들여보냈다고 한다.[15] 6.25 때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1916~1956)[16] 대령의 구술(口述) 회고록에도 유사한 진술이 나온다.[17][18]

김정숙이 사망한 4개월 후인 1950년 1월 15일에 김일성이 부수상 홍명희(洪命憙)의 딸 홍영숙(洪永淑)과 결혼했다고 남한의 다수 신문들이 보도 했다.[19][20][21][22] 미군의 기록에도 그런 말이 나오며[23][24], 6.25 때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도 같은 증언을 했고,[25] 6.25 때 포로가 된 인민군 소좌 출신 주영복(朱榮福)도 같은 말을 했으니[26] 이는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딸들이 김일성 집의 가사 일을 돌보다가 둘 중 한 명이 결혼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조옥희는 김일성의 부인이 된 홍명희의 딸이 심장이 약하다고 했으므로 아마 결혼 초에 일찍 사망하여 김일성과의 결혼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쌍둥이 딸 홍주경(洪姝瓊, 1921~?), 홍무경(洪茂瓊, 1921~?) 중 한명일 것이나, 신문에 보도된 이름과는 왜 다른지 이유는 미상이다.

월북한 문인들이 대부분 숙청 당해 처형되거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지만 홍명희와 그 일가가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도 그가 한때 김일성의 장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명희의 딸과 관련한 루머

홍명희의 일가족이 모두 월북한 후 그의 딸들과 김일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남한에서는 여러 가지 루머들이 돌았다. 그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아 나온 풍문들로 보이며, 홍명희를 연구하는 한국의 학자들도 대부분 오늘날까지도 결혼 사실은 모르고 있다.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에 남한의 우익들은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소실이었다느니 김일성의 집안 식모였다느니 별 험한 소리를 다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낳은 아픈 가족사의 단면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형태로든 엄마를 잃은 김정일을 보살핀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내가 평양에 갔을 적에 김일성대학에서 홍명희를 연구한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다.
전문학자라는 사람이 김일성의 홍명희 딸과 결혼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조금만 맘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엄혹하던 반공국가의 시절" 타령하는 것도 병이다. 반공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이나 간첩들이 마음대로 활동하게 해서 한국도 공산화되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반공 하려고 우익들이 일부러 그런 말을 지어내 퍼뜨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항간에는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의 첩'이었다든가 , 홍명희가 '김일성의 장인'이었던 관계로 그의 정치 생명이 오래 지속 되었다는 풍문이 있었으며 , 일부 학술서적도 이를 사실로 간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정원, 분단한국사, 동녘 1985, 366면). 그러나 인척으로서 당시 북한에서도 홍명희 일가와 내왕이 있던 이구영(李九榮, 1920~2006) 선생은 이것이 전혀 사실무근한 일이라고 증언하였다. (1996.9.6. 면담). 스칼라피노와 이정식 교수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는 “일설에 의하면 그의 딸은 김일성의 첫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자 1945년 이후 김일성의 가사를 돌보아주었다고 한다”(제3권, 한홍구 옮김, 돌베게 1987, 600면)고 했는데, ‘김일성의 첩’ 운운은 이것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김창룡(金昌龍) 회고록의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

6.25 때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1916~1956)[27] 대령의 口述 회고록에는 조옥희의 진술 내용이 당시 신문 기사[25][28]보다 자세히 나오는데, 신문 기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김일성과 홍명희 딸의 부적절한 관계

홍명희(洪命喜)는 임꺽정(林巨正)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월북하였다. 홍명희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딸들은 쌍둥이로 모두 숙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을 나왔다.

김창룡의 원고에는 해방 이후부터 김일성의 전속(專屬) 간호원을 지낸 조옥희(趙玉姬)가 6·25전쟁 이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김창룡의 특무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 중 홍명희의 딸과 김일성의 관계가 구술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조옥희는 홍명희 딸 중 한 명과 김일성은 깊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부수상이 된 홍명희는 미모의 딸을 데리고 김일성이 있는 수상관저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 당시 홍명희 딸은 처녀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관저 내의 고용인들은 그녀를 ‘미스 홍’으로 김일성은 ‘홍 동무’로 호칭했다고 한다. 홍명희의 딸은 빨간 튤립처럼 요염하게 생겼으며 김일성 앞에서는 갖은 아양을 떨었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이 관저에 없을 때에는 혼자 찾아와 김일성과 단둘이 방 안에서 교성(嬌聲)을 지르며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김정숙에게 들키게 되자 그 후 홍명희 딸의 수상관저 출입이 금지되었다.


김일성 아내 김정숙의 死因은?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김일성의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49년 봄에 김일성의 일곱 살 난 어린 아들이 수상관저의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溺死)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임신 5~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산 도중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아들의 익사사고와 김정숙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는데 이 두 사건에 홍명희 딸의 보이지 않은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조옥희의 증언은 시사하고 있다. 특히 김정숙의 갑작스런 사망 사건에 대해 조옥희는 죽기 전날 김정숙은 권총사격을 하고 자기와 같이 쾌활하게 정원에 앉아서 잡담까지 나누었는데 잠자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북한의 공식 발표내용이 출산 중 사망이라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간호원인 조옥희가 볼 때 당시 김정숙은 임신 5~6개월로 낙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산사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김정숙의 장례식 날 김일성은 상여 앞에 섰고 그 뒤에 각료들과 각계 대표들이 뒤따랐는데, 부인의 장례임에도 김일성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홍명희의 딸이 수상관저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홍명희 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호칭이 ‘수상 부인’ 또는 ‘장군 부인’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조옥희는 해방 이후 김일성에 관한 비화들을 진술하고 있다.
Ⅳ.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 조옥희
1.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이 되기까지 … 371
2. 김성주와 김일성 … 380
3. 장군 부인의 질투 … 388
4. 관저 내의 죄악상 … 392
5. 한국동란 발발의 진상 … 397
6. 자유로운 질서의 위력 … 400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홍명희 딸 관련 새로운 루머

1997년 황장엽(黃長燁, 1923~2010)과 함께 한국으로 귀순한 김덕홍(金德弘, 1938~ )은 그의 저서에서 홍명희의 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홍명희선생에게는 홍귀원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1956년경에 김일성의 처 김성애의 개인비서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홍귀원은 김성애가 김일성의 막내아들을 임신하고 있는 기간에 김일성과 관계해서 그의 아이를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홍귀원은 과거에는 뼈대 있는 충청양반가문의 후손이었고, 당시는 북한사회학계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아버지 홍명희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임신해 있은 전 기간 심한 괴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를 볼 낯이 없다며 출산하는 날까지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던 홍귀원은 결국 김일성의 자식을 낳던 도중에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홍기문은 연신 손등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으면서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고는 다음과 같은 한탄의 말을 내뱉었다.

“그 애도 불쌍하고……, 슬픔이 크면 빨리 늙는다고 했던가? 아버지도 그 일을 겪은 뒤부터는 폭삭 늙더라.”

위에서 본대로 홍명희의 딸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일이 또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에게 직접 들은 말이라니 믿지 않기도 어렵고....

김정일 처 홍일천과 홍명희의 관계는?

김정일은 첫 아내로 알려진 홍일천(洪一茜, 1942~ )과 1966년에 연애결혼 했다가 3년만에 이혼했다고 하는데,[29] 둘 사이에 장녀 혜경(惠敬, 1968~ )을 두었다고 한다.[30]

그런데 이 홍일천을 두고 홍명희의 딸이라는 설, 손녀라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다. 그녀가 1942년생이라면 홍명희의 딸이 될 수는 없고, 손녀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사실 확인은 어려운 것 같다.

김정일의 첫 여성은 해방 전 민족주의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홍명희 선생의 딸 홍일천이었습니다. 그를 만나 1966년에 첫 자식인 김혜경을 보았고 ...
우리의 국회의원 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이기도 한 洪은 소설 『林巨正(임꺽정)』의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의 손녀라는 설도 있다.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成蕙琳, 1937~2002)의 조카로 탈북하여 남한으로 귀순했다 간첩에 의해 살해 당한 이한영(李韓永, 1960~1997, 북한서의 본명은 리일남)은 홍명희의 딸로 홍일천이 있지만 법의감정원 원장을 했던 박모와 결혼하여 박영주라는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문화인 아빠트에는 북조선으로 넘어간 후 고위직을 지낸 소설가 홍명희의 딸이 살고 있었다. 문화인 아빠트에 살던 홍명희의 딸이 홍일천, 나는 그 분을 영주 엄마라고 불렀다. 아들이 나와 인민학교 동창인 박영주였기 때문이다. 영주의 아버지, 그러니까 홍명희의 사위는 법의감정원 원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화인 아빠트에는 영주네뿐만 아니라 홍명희 가족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 사회과학원 원장을 한 맏아들 홍기문도 거기에 살았고, 홍기문의 아들 홍석태도 그 아빠트에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문화인 아빠트는 국장급 아빠트는 됐던 것 같다.
― 리일남 수기 제27부 나의 어린 시절

홍일천과 홍명희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와같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어느 것도 사실 확인은 어려운 것같다.

통일부가 2011년 및 2015년 간행한 북한의 주요인물 책자에는 홍일천(洪一天, 1942~ )의 경력과 사진이 나오는데 함경남도 출신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맞다면 홍명희 집안은 함경도와는 아무 연고도 없으므로 홍일천은 홍명희와는 관계없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p.580 홍석형(洪錫亨, 1936 ~ )[31] : 당 중앙위 비서, 당 계획재정부 부장 -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의 아들
p.587 홍일천(洪一天, 女, 1942 ~ ) : 김형직사범대학 학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중앙위원
p.580 홍석형(洪錫亨, 1936 ~ ) : 현직 당 중앙위 위원, 2011. 6 당 중앙위 비서 해임.
p.614 홍일천(洪一天, 女, 1939 ~ ) : 현직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중앙위원, 1939년생 함남. (생년이 바뀌었음)
  • 홍석형과 홍일천 모두 2017년 이후 북한 인명록에서 제외되어, 중요 직책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32][33][34]

시인 김소월이 홍명희의 사위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이 홍명희의 사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으나[35][36][37][38][39]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소월의 부인 홍단실(洪丹實)은 홍시옥(洪時玉)의 딸이며, 처가는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에 있었다.[40][41] 홍명희의 경우 맏딸도 1921년생으로 1934년 김소월이 작고할 당시에 10대 초반의 나이에 불과하여 결혼할 상대가 되지도 않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 '소월의 문학정신'을 읽다
이 이사장은 소월이 우리나라 대표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관이 없는 현실을 서글프게 생각하며 문학관 건립을 결심하고, 전국 30여곳을 돌아다니다 증평 도안면의 현부지를 보고 한눈에 반해 10분 만에 이 곳을 선택했다.

자신과 김소월의 처갓집이 증평이라는 공통점이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김소월은 괴산 출신인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사위이기도 하다. 지금은 증평군이 독립했지만 과거에는 괴산군 증평읍이었다.
40억원의 사재를 털어 소월 문학관을 세운 이철호 이사장이 김소월을 홍명희의 사위로 잘못 알고 있은 듯하다.

참고 자료

각주

  1. 임꺽정 (소설) 위키백과
  2. 每日新報續刊 서울신문と改題 경성일보(京城日報) 1945년 11월 23일 2면 10단
  3.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출판사, 2010.11.10.) 제4장 홍명희의 월북
  4. 서울의 좌파 끌어들여라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4) 중앙일보 1991.12.12
  5. "北 친일파 청산 높이 평가 '임꺽정' 작가 홍명희 월북" 한국일보 2008.07.04
  6. 本社主催 大座談會 臨戰對策協議會, 百二十人士가 府民館서에 會合 삼천리 제13권 제11호 1941년 11월 1일
    戰時奉公 强化運動 三千里社 主催로 臨戰對策協議會 每日申報 1941년 8월 23일 면수 : 02 단수 : 16
    二千萬이 愛國戰士로 銃後奉公을 義勇化 - 臨戰對策協議會서 實踐決議 每日申報 1941-08-26 면수 : 04 단수 : 16
  7. 總力戰에 先驅된 思想戰士 必勝의 陣 昨日, 言論報國會 感激의 發會式 - 역원(役員) 명단 2면 4단 매일신보 1945-06-09
  8. 김정은 체제 비밀처형 늘어나나 RFA 2020.08.07
  9.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10. Regarding the organization of the military committee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자료센터)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11. 홍범식은 을사(1905)년 아닌 경술(1910)년 한일 합방 때 이에 항의하여 자살했다.
  12.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p.32
  13. 신복룡,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홍명희가 북한에 남은 이유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주간조선 2373호] 2015.09.07
  14. 벽초 홍명희의 자녀들 : 김홍숙<문화해설사 · 소설가> 충청타임스 2017.06.2
  15.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10 중앙일보 1990.05.28 종합 5면
  16. 김창룡(金昌龍, 1916~195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김창룡 지음, 남정옥(南廷屋, 1958~ ) 엮음, 『숙명의 하이라루(海拉爾) :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청미디어, 2022년 03월 17일
  18. 남정옥(南廷屋, 1958~ ), 戰史家가 보는 ‘김창룡 口述 회고록’의 의미 : 해방 후 대한민국 초기 對共수사실록이자 反共建軍史 월간조선 2022년 5월호
  19.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20.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21.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22.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23.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24. Who's Who Reports, 1954 - 1955 [Entry NM3 85G]사료계열 AUS009_03 : 930040-1954 (R200-299) [319-5911-22-6] 두번째 인물 :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25. 25.0 25.1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26. 6.25 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27. 김창룡(金昌龍, 1916~195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8.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 국제신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29. 金正日(김정일) 외아들 3대 後継(후계)구상 1991.03.31 조선일보 2면
  30. 80年(연) 實權(실권) 인수"후계 수업" 1994.07.10 경향신문 2면
  31. 홍석형은 김정일 사망 직전 숙청되었다 : 홍명희 손자 홍석형 北경제비서 숙청 - 머니투데이 2011. 10. 6.
  32. 2017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 - 통일부 2017-01-25
  33. 2019년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 주요기관 단체 인명록, 북한주요행사 예정표, 권력기구도 - 통일부 2019-07-17
  34. 2020 북한 주요 인물정보 - 통일부 2020-05-14
  35.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⑥ 김소월의 손녀 김은숙 : “어떤 분은 素月을 만난 것 같다며 손잡고 울어” 월간조선 2015년 5월호
  36.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恨이 서려 있는 김소월 시, 록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다 한국경제 2020.03.13
  37. 홍명희 나무위키
  38. 김일성이 건드린 여자들 왕조시대의 부활? 김일성 장인될 뻔했던 홍명희 4부 완결 통일되면 가장 중요한 인물‼️ 고작가의 휴먼레코드
  39. 고향 뒷동산 약샘에서 다시 나갈 길을 봅니다 충북인뉴스 2006.12.11
  40. 평생 가장 좋았던 시인 김소월 특급뉴스 2012.06.30]
  41. [이정 장편소설] 김소월 전기-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_2장 거미줄과 잠자리(3) 현대경제신문 202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