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호는 유민(維民)이다. 법무부장관일 때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경향신문을 폐간하였으며, 조봉암을 사형집행하였다. 내무부장관일 때는 4.19 시위에 발포명령을 내려 4.19혁명 이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삼성 이병철회장은 평소 홍진기씨를 존경[1]하였으며 사돈지간이 되었다. 장남이 현 중앙일보, JTBC 사주 홍석현(洪錫炫, 1949~ )이다.[2]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사위이며, 이재용 부회장은 외손자이다. 이병철 회장의 장남과 차남을 제치고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승계한 데에는 그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의 아들 홍석현은 아버지 홍진기를 사형에서 사면내린 박정희대통령의 딸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에 앞장섰으며, 경제적으로 부를 일구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돈 이건희 삼성회장의 아들 이재용을 감방에 보냈다.

생애

제1공화국 시기 행적

  • 이기붕에 대한 과잉충성

[3]

  • 경제담당 검사 회의 ( 제1공화국에서는 검사회의를 법무부장관이 주관하는 게 적절하였는지 알려주십시요.)

  • 국무위원들 풍경

[4]


4.19발포 명령

  • 4.19 발포 명령자 공판.[5],[6]


  • 정.부통령 선거일자 공고[7]


신국가보안법으로 경향신문 폐간

  • 국가보안법 운영 실무자 회의[8]

  • 신국가보안법의 첫 적용으로 경향신문 폐간[9]

  • 정진석 교수, 이승만과 언론 : 질의응답 1 - 경향신문 폐간

  •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 또한 신문윤리위원회 창설로 언론 통제를 시작함.[10]

신국가보안법으로 조봉암 사형

법무부 장관으로서 조봉암 사형집행.[11]

각주

  1. 이건희 에세이
  2. 홍진기 : 위키백과 가계 항목 참조
  3. 이기붕 의장 63회 생신. -이승만 대통령이 보내온 케익을 자르는 이기붕씨와 박 마리아 여사. -항상 젊은 마음으로 더욱 힘써 일하겠다고 평소의 소감을 피력. -이기붕의장 참석인사들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홍진기, 최인규 장관들 참석.
  4. 6.25때 파괴된 여러 시설기관의 복구와 새로운 시설 증축 및 준공식. 새로 신설된 서울 사법보호위원회 준공식.사법 보호회는 형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의 재생의 길을 열어 주는 곳.홍진기 법무부장관
  5. 4.19 당시 학생들에게 총을 쏘게한 발포 명령자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려 현장 검증이 실시됨. -4월 19일 평화적인 학생데모원에게 총을 쏘게 해서 살인죄, 살인교사죄로 기소된 전 법무부장관 홍진기 등 발포 명령자 6명에 대한 첫 공판이 7월 1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림.
  6. https://youtu.be/wztqjwsirHc 내무부장관 홍진기
  7. 정·부통령 선거일자 공고. -정부에서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일자를 3월 15일에 실시 할 것이라고 공고. -국무위원들 회의 모습. -최인규, 홍진기, 송인상, 김정렬, 전성천씨 의견 발표 모습. -모범선거가 될 것을 요망.
  8. 홍진기 법무부장관의 주재로 국가 보안법 운영에 관한 실무자 회의가 이루어짐. -신 국가보안법의 공정한 운영을 위한 전국 검찰청 실무자 회의가 대검찰청 회의실에서 열림. -홍진기 법무부장관의 주재로 열림.
  9. 자유당은 보안법 개정을 추진한다. 보안법상 국가기밀의 범위가 군사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으로 확대되고, 허위사실 유포 처벌 조항과 헌법상의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 조항이 추가됐다. 보안법이 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보성향의 야권언론인 경향신문이 폐간됐다. 정부가 발표한 폐간 사유는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경향신문은 1년 후 복간된다. 얼마 후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는 진보당 사건이 벌어진다. 이유는 조봉암이 주장한 평화통일 방안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평화통일은 북한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이승만의 무력통일과 정면으로 대치됐다. 대법원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조봉암에게는 이중첩자 양명산을 통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미국은 조봉암의 사형을 막기 위해 다울링 특사를 파견한다. 다울링은 이기붕에게 조봉암 사형이 가져올 부정적 결과에 대해 경고했지만 결과를 뒤집진 못했다. 결국 1959년 7월 30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우방도, 민심도 잃어버리고 만다.
  10. 따뜻한 통제
  11. 조봉암의 사형을 전환점으로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차기 정부 수립을 위한 전략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4·19 혁명 때는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