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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의 귀족들은 농민들을 착취하는 ‘특권지배계급’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의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은 지휘를 맡아달라는 농민들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내 복수를 해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지켰지만 목숨은 지키지 않았다. 이들 귀족들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볼 수 있다. 농민들은 비록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방데인 도망자들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도서

회고록 - 한 프랑스 귀족부인이 겪은 프랑스혁명

마리 루이즈 드 라로슈자클랭 (지은이),김응종 (옮긴이), 한국문화사, 2018-12-10[1][2]

역자 : 김응종

 1955년 대전 출생.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랑쉬콩테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장과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아날학파』(민음사),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푸른역사),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살림), 『서양사개념어 사전』(살림), 『관용의 역사』(푸른역사), 『오늘의 역사학』(공저. 한겨레신문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프랑스혁명사』(일월서각),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민음사), 『고대도시』(아카넷), 『랑그도크의 농민들』(공역. 한길사),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푸른역사) 등이 있다. 현재 『다시 생각하는 프랑스혁명-혁명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연구서를 준비 중이다.[3]

출판사 제공 책소개

IV. 『회고록』에 비친 프랑스혁명

우리나라의 교과서에 나오는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의 위대한 시민혁명이지만, 『회고록』에 나오는 프랑스혁명은 광적인 폭력이다. 1792년 8월 10일의 사건은 교과서에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연 위대한 사건이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후작부인에게는 특권계급에 대한 증오심에 취한 (그리고 실제로 술에 취한) 파리 민중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소위 정통해석을 대표하는 알베르 소불은 8월 10일의 사건을 “1792년 8월 10일의 혁명”이라고 환호하지만, 후작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해 9월 초에 벌어진 ‘9월 학살’과 그 후에 진행된 공포정치의 전주곡이었다. 9월에 파리의 그 민중들은 파리의 여러 감옥을 공격하여 선서거부신부 270여 명을 포함하여 수인(囚人) 1,000여 명을 즉결 처형했다. 그 후 공포정치가 자행되어 시민 5만여 명이 약식 처형당한다.

1793년 3월부터 1793년 12월 말까지 계속된 방데 전쟁에서는 후일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인의 인종 학살(제노사이드)”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광적인 폭력이 자행되었다. 누가 폭력을 행사했는가? ‘가톨릭 근왕군’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구체제의 야만적인 농민들이 폭력을 행사했는가? 아니면 ‘자유, 평등, 형제애’를 내세운 공화국 병사들이 폭력을 행사했는가? 혁명군은 방데군의 학살에 대한 보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보복은 혁명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지나쳤으며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병사들은 물론이고 무장하지 않은 여자, 어린이, 노인들을 포함하여 20만 명이 넘는 방데인을 학살했고, 방데 지방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들어버렸다. 방데라는 이름도 아예 ‘방제’(복수라는 뜻)로 바꾸어버렸다.

물론 방데인들이 학살을 자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793년 3월 마슈쿨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애국파 160여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초기의 농민반란이 지휘체계를 갖추어가면서 이러한 학살은 사라졌다.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방데군은 마슈쿨의 불행한 학살 이후에는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회고록』에서는 방데군 장군들이 학살과 약탈을 금지하고 만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봉샹 장군이 공화파 포로 5,000여 명을 석방한 것은 방데인들의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이 놀라운 사건은 공화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후일 포로로 수감되어 있던 봉샹 장군의 부인은 이때 풀려난 공화파 병사들의 증언으로 목숨을 구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정부군의 보복이 자행되면서 방데군도 보복학살의 유혹을 받았으나, 그들은 대체로 폭력을 자제했다. 방데군 장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약탈을 허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그 때문에 신의 징벌을 받았다며 그것을 후회했다. 방데 전쟁에서는 혁명군이 방데군보다 더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무기와 불을 함께 들고 다녔다. 공화주의 역사가인 미슐레는 방데군이 가톨릭교회의 광신주의에 젖어 있어서 마치 중세의 종교전쟁에서처럼 잔인했으며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고 강조하지만 아무래도 미슐레의 주장은 그의 반교권주의에서 비롯된 편견이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은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으로 공포정치의 주도자인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부터 누그러진다. 우리의 후작부인이 공화파의 수색에서 자유로워지고 드디어 사면을 받게 된 것도 열월 정변 덕분이었다. 우리의 교과서는 이 사건을 열월 ‘반동’이라고 규정하여 혁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반동적인 사건인 것처럼 평가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방데 전쟁 희생자들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공포정치가들은 혁명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전진하던 혁명가들이라기보다는, 프랑수아 퓌레[4][5]가 말하듯이, “독재와 신화라는 미지의 세계로 대책 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장 클레망 마르탱 같은 역사가들이 변호하듯이 상퀼로트들의 무정부주의적인 폭력을 제어하려고 애쓴 사람이 아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봄에 과격한 에베르파와 온건한 당통파를 제거하고, 전쟁 승리로 상황이 호전되어 공포정치를 계속할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1794년 6월에 목월의 법을 제정하여 오히려 “대공포정치”를 자행한 것은 로베스피에르를 평가할 때 결정적인 대목이 아닐까 싶다. 로베스피에르는 ‘덕의 공화국’이라는 명분과 ‘자유의 독재’라는 미명 하에 독재정치를 자행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은 바로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고 혁명의 이탈을 바로잡은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열월 정변의 뒤를 이어 혁명을 종식시킨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1799년 11월 9일(혁명력 8년 안개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방데 전쟁에 대해서 “부당한 법이 제정되었고 집행되었으며 자의적인 행동들이 시민들의 안전과 양심의 자유를 위협했다”고 인정한 후,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했으며 전쟁으로 파괴된 방데 지역에 대한 복구 사업을 벌였다. 『회고록』에서, 보르도 지역을 방문한 나폴레옹은 방데군 사령관이었던 레스퀴르 후작과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군대를 격파한 군대를 격파한” 기적적인 부대의 장군들이었던 것이다.

『회고록』에서는 혁명의 허상이 깨어지고, ‘구체제’는 오랜 왜곡에서 벗어나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부의 귀족들은 교과서에 나타나듯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특권지배계급’이 아니었다. 프랑스혁명기에 귀족들이 망명을 떠난 것은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반혁명군에 가담하여 혁명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레스퀴르 후작처럼 부득이하게 프랑스에 남아 반혁명전쟁에 가담한 귀족들은 무질서한 농민군의 선두에 서서 그들을 지휘했다. 나이 스물한 살의 앙리 라로슈자클랭은 농민들의 지휘를 맡으면서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내 복수를 해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지켰지만 목숨은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귀족으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보여준 인물이 레스퀴르 후작과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이다. 역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은 귀족들의 명예심과 거기에서 나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감동을 받았다.

농민들도 순수했다. 그들은 귀족들에게서 착취당하지 않았기에 귀족들을 따랐으며, 혁명이 강요한 성직자민사기본법에 선서하지 않은 신부들을 존경했다. 농민들이 ‘가톨릭 근왕군’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농민-귀족-성직자 사이에 맺어진 신뢰 때문이었다. 브르타뉴의 농민들이 방데 학살을 피해 도망친 후작부인과 어머니를 보호하는 데에서는 어떠한 계급적인 적대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혁명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착취하는 귀족, 무위도식하는 성직자의 이미지는 혁명이 혁명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한 귀족과 성직자는 『회고록』의 무대였던 프랑스 서부지역에서는 다수가 아니었다.

『회고록』을 읽으면, 프랑스혁명은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는지, 과연 혁명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1789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는 방데의 농민들도 혁명을 환영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기대는 1792년 왕정의 붕괴,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 등을 겪으며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농민들의 분노와 반감은 1793년 3월에 실시된 30만 명 징집에 대한 거부로 분출했다. 전쟁 승리를 위해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혁명은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혁명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외면당한 소수의 혁명가들과 상퀼로트들이 짊어지고 나아가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프랑스 국민의 다수가 염원한 혁명은 헌법이 제정되고 입헌군주정이 수립되는 것이었다. 입헌군주정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제시한 개혁이었다. 바르나브가 말했듯이, 이 지점에서 혁명을 끝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제정을 없애는 방법은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지 왕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후작부인이 체험한 1792년 8월 이후의 프랑스혁명무정부주의독재정치였다.

우리나라의 프랑스혁명 이해는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혁명은 선(善)이고 반(反)혁명은 악(惡)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단순 도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방데 전쟁이 반혁명전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고 폄하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회고록』은 방데 전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혁명 그 자체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준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인식을 갖는 것인데, 『회고록』은 그러한 인식을 갖게 하는 데 역할을 잘 해낼 것으로 기대한다. [6]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