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일본군) 위안부

햇살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8월 21일 (수) 17:03 판 (개념)

개념

위안부의 개념과 역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연관검색어를 참고하도록 한다.

현재 분류 항목과 표제어에 각각 ‘위안부’가 설정되어 있으며, 그 안에 관련 표제어와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연관검색어의 내용을 참고하면, 위안부는 다음을 나타낸다.

=== 위안부 (사죄와 배상 요구)

특수위안대(한국군 위안부)

민간 위안부

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이에 대해서는 본 문서에서 설명.

일러두기

작성 기초 자료들

함께 보기 1: 이승만 TV, “일본군 위안부” 강연.


함께 보기 2: 이승만 TV,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강연.

함께 보기 3: 이승만 TV,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강연.


(1) 이 문서는 이영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00~339쪽; 주익종,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같은 책, 340~351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위안부 (사죄와 배상 문제), 한일 청구권 협정, 대일 민간 청구권, 대일 피해 배상 요구 (역사와 쟁점),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친일파 청산론,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김태규 판사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소신 발언, 정대협, 정의기억연대

1937년 이전: 조선 매춘업의 역외 진출

신분 세습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 요충지를 중심으로 장교와 사졸의 성적 위안을 제공하기 위하여 배치한 기생 및 기생제는 1916년 조선총독부가 공창제를 실시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독특한 성 윤리나 성 문화가 이루어지는 역사적 토대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를 참조한다.

일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공창(집창, 유곽)은, 처음에는 일본인 유객이 주를 이루었다가 조선인 유객들의 비율이 높아지는 형태를 보인다.1930년대가 되면 여성을 유곽으로 이끄는 인신매매가 활발해지는데, 식민지적인 개발에 따라 매춘업의 대중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후 조선의 매춘업은 일찍부터 만주, 중국 관내, 대만, 나아가 일본으로 진출했다. 당시조선의 가난한 아버지가 인신매매 업자(또는 주선업자)로부터 전차금(前借金)을 받고 딸의 공창 취업을 승낙하는 인신매매는 조선 매춘업의 역외 진출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만주로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의 실태: 매춘업 종사 여성 10명 중 1명은 조선인

《매일신보》 1937년 3월 28일, "돈에 눈 어둔 부모"라는 제하의 기사에는 인신매매업자에게 딸을 팔려는 부모와 그 부모에게 반발하여 경찰서에 가 읍소하는 김초향이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선업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전차금을 받고 딸을 파는 부모의 이야기는 당시 조선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 특유의 신분제와 처첩제가 식민지의 호주제와 만나 왜곡된 성 문화와 성 윤리를 낳은 불행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저항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만주로 건너갔던 조선인들의 수는, 1910년대 초중반에는 연간 평균 1만여 명, 1910년대 후반에는 6만 명 전후였다.

그 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의 만주 이민을 장려하자, 이민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는 약 30만 명이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또한 중일전쟁 본격화된 1937년부터는 조선인들의 이민을 일본이 적극 유치하게 되는데, 그리하여 1938년~1940년 사이 36만 명 이상이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1940년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은 102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리하여 1931년 이후 만주사변과 더불어 조선인 사회가 만주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주에서 100만 명 이상의 조선인 사회가 형성됨과 더불어 조선인의 매춘업도 발생했다.

이영훈의 분석에 따르면 1940년을 기준으로 만주국에는 매춘업소가 총 6,716곳이었다. 이중 조선인 업소는 총 599곳으로, 요리점이 488곳, 카페가 111곳이었다. 이에 비하여 중국인 업소는 4,569곳(요리점:4470, 요정:3, 카페:96), 일본인 업소는 1,522곳(요리점:749, 요정:132, 카페:641)이었다.

이해(1940년) 만주국에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총 3만 8,607명으로, 노래와 춤을 제공하는 예기가 5,556명, 술 시중을 드는 작부 2만 5,259명, 카페 등에서 일하는 여급 7,459명, 댄서 323명이었다. 이들 중 11.6%인 4,476명이 조선인이었는데, 예기 126명, 작부 3,586명, 여급 736명, 댄서 28명이었다. 이에 비하여 중국인은 2만 55명(예기 662명, 작부 1만 9,059명, 여급 331명, 댄서 3명), 일본인은 1만 3,649명(예기 4,778명, 작부 2,264명, 여급 6,336명, 댄서 271명)이었다.

이로 추론해 보면 만주에서 시행된 공창제는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창기 대신, 요리점의 작부들이 사실상 창기의 역할을 대체했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영위한 사업은 농업, 무역, 일반 상업, 음식점, 요리점, 여관, 전당포 등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 가장 번창해서 조선인 사회의 경제를 지배한 것은 작부를 둔 요리점이었다.

조선인의 요리점에서 이루어지는 매춘은 그 소비층이 다른 영업에 비하여 초민족적이었다. 다른 영업은 조선인만을 상대로 하였지만, 조선의 요리점들은 하층 일본인이 주요 고객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 매춘 여성이 화대가 싼데다가 일본어가 가능했고, 중국 여성보다 깔끔하다는 이유로 주 고객이 되었다.

그리하여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은 만주 매춘시장 전체에서 제2급의 시장을 형성했다. 최상급 시장은 만주의 일본인 사회를 무대로 한 일본인 매춘업이었고, 그 다음이 조선인과 하층 일본인을 고객으로 한 조선인 매춘업, 그 다음이 중국인 매춘업이었다.

만주국의 민족별 매춘업소 관련 통계. 이승만 TV 캡처.

이영훈이 소개한, 춘원 이광수의 발언을 보면 만주에서 이루어진 조선인 매춘업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인육시장’이란 ‘인신매매’, 또는 ‘몸으로 먹고사는’ 시장 정도로 보면 된다.

도회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업은 대부분이 인육시장과 밀수업자이고... 참 나는 이번 걸음에서 조선인의 인육시장에 참으로 놀랐습니다. 봉천, 길림, 하얼빈, 신경 등 곳곳에 조선인 요리업자가 없는 곳이 없어요. 요리업을 개시만 한다면 성공한다니까. 그것은 중국 여자는 더럽고, 그래서 모두 조선여자를 환영한다는데 그런 까닭에 어떤 여자는 하루 서른 다섯 명의 남자를 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돈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봉천서는 인육장사를 하여 이십만원 돈을 모은 부자도 있고 다른 곳에서도 수삼만원, 십 여만원씩 모은 성공자들이 있다고 해요”

- 이광수, 1933년 재만동포문제좌담회(在滿同胞問題座談會)에서의 발언 -

대만으로의 진출: 대만으로 간 조선인 여성의 90%가 매춘업 종사

이영훈의 설명에 따르면, 대만총독부의 국세 조사에 근거해 볼 때 대만에 체류한 조선인 여성은 1920년에 1명이었다가 1930년에는 458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들의 90% 이상은 매춘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1921년 대만에서 주요 금광지대가 활발하게 개발되면서 조선루(朝鮮樓, 조선인 매춘업)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이르면 대만 각지에서 조선루가 우후죽순 생겼다. 1935년에는 창기와 작부가 각각 200명, 카페에 종사하는 여급이 400명, 총 800명이었고, 1941년에는 (조선인 매춘녀가) 총 940명에 달했다. 앞서 살펴본 만주의 경우, 1941년에는 창기가 없었지만, 대만에서는 조선인 창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 1정도였다.

또한 1930년에 일본에서는 공창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일본인 창기들이 대만으로 가는 일이 억제되었다. 그러자 그 틈새 시장으로 조선인 창기들을 중심으로 한 매춘업이 생겨나 성업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 공창제 폐지 운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세력이 크지 않았고, 또 국제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창제 폐지 운동의 목소리는 잘 들릴 수가 없었다.

이때 대만에서 일하던 창기들 역시 대만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1927년의 경우 조선루를 찾은 유객의 7분의 6은 일본인이었다. 조선루 업자들은 처음엔 대만인과 일본인을 상대로 아리랑을 부르는 등 이국적 풍정을 호소하는 영업 전략을 취했는데, 점차 일본풍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일본인을 주 고객으로 삼았기 때문에 작부들은 기모노 차림에 일본어를 하고, 일본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들은 말도 통하고 먼 이국에서 일본옷을 입고 노래하는 조선루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중국 관내의 조선인 매춘업: 일본군을 따라 자리 잡으며 위안소도 직접 경영

1931년부터 중국 관내에서 조선인 매춘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이 중국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하는데, 일본군의 뒤를 따라 조선인 매춘녀들도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매춘업과 군 위안소 간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해에 일본군의 뒤를 따라 중국 상해로 들어간 조선 여성은 139명이었다. 그 수는 1936년이 되면 913명으로 늘어난다. 이 중 90% 이상이 매춘업 종사자였다. 특히 상해에서 매춘업이 번성한 것은, 일본군의 상해 점령 이후 일본군 부대 주변에서 군인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매춘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1941년 중국 화북 지역의 조선인 현황과 관련한 통계 자료. 이승만 TV 캡처.

만주사변이 발생한 1931년, 일본군이 중국 깊숙이 진격하면서 매춘시장이 열렸다. 그러자 많은 조선인들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중국 관내로 진출했다.

이영훈이 제시한, 1941년도 조선총독부북경출장소의 보고를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조선인의 직업은 관공리, 회사영업원, 점원 등 봉급 생활자가 가장 많고, 노태(蘆台)모범농촌의 농민이 다음이고, 군 위안소, 사진관, 양복점, 잡화상, 곡물판매업, 토목건축정부업 등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에 비해 훨씬 적은 자본으로 상당한 업적을 이루며, 특히 득의의 어학과 강인한 생활력으로써 군의 진격과 더불어 군을 뒤따라 혹은 군보다 빨리 진출하여 군대가 필요로 하는 잡화를 운반하고, 혹 특수부녀자(特殊婦女子)의 일단을 이끌고 군의 위안소를 개업하고, 혹은 시계점, 사진점으로 군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등, 치안이 불안정한 지방에서 거대한 이익을 노리고 전선으로 진출한다.

- 1941년 조선총독부북경출장소 ‘재북지조선인개황(在北支朝鮮槪況, 북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의 전반적인 상황)’

이 자료를 보면, 아주 재빠르고 영리하게 일본군의 뒤를 따라서 중국으로 진출하는 조선인의 모습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군이 진출하면 그 뒤를 따라서, 또는 군보다 더 빨리 앞서가서 위안소, 시계점, 사진점, 음식점을 개설했던 것이다.

이영훈이 제시하는 1941년 화북 지역 일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직업 현황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화북 지역으로 건너간 5만 2,072명 조선인의 40% 가량인 약 2만 1,000명은 직업이 없었다. 이들은 아편장사 또는 국제 건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를 농업(4,613명), 식료품잡화상(3,080명), 은행원(1,730명), 점원(2,196명), 요리옥(1,573명)이 이었다.

여기서 매춘업 종사자들의 수에 주목할 수 있다. 당시 매춘업 관련 종사자들은 총 2,944명이었는데, 요리옥 1,573명, 군위안소 38명, 카페 41명, 창기 219명, 작부 513명, 예기 373명, 여급 187명이었다. 이는 전체 조선인 5만 2,072명의 약 5.6%를 차지했다. 이중에는 요리옥을 직접 경영한 조선인 224명과 군 위안소를 경영한 조선인 11명도 있었다.

일본으로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의 주요 도시 주변에서 조선인 사회가 형성된다. 이 조선인 사회에도 매춘업이 성장하는데, 1935년 일본에 거주한 조선인 성매매 종사자 여성의 수는 1,735명이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인 사회가 크게 팽창했다. 바로 이 때 조선인 남성들도 모집관알선 등을 통해 일본의 주요 공업도시나 탄광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조선인 매춘업도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탄광 등에서 받은 급여를 사창가에서 탕진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다. 모집과 관알선의 실태에 대해서는 ‘노무동원’을 확인한다.

군사적으로 편성된 공창제, ‘위안소’와 ‘위안부’

창기가 ‘위안부’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과 흐름에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군의 부속시설로서 위안소를 설치한다. 장병의 성욕 해소와 성병 통제, 군사기밀의 누설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즉 공창제 자체가 처음부터 군 위안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제는 민간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1930년대 초반부터 일본군의 주둔 지역을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인 매춘업이 들어가 영업을 한 것이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단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위안부’라는 이름 자체가 1937년 이후 위안소를 공식 설치하면서 생겨났던 것이다.

위안부는 대부분 병사 150명당 1명의 비율로 충당되었고, 위안소는 28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주둔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설치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함경북도 나남에는 1912년에 세워진 ‘덕천루(德天樓)’라는 요리옥은 1937년이 되면 일본군 전용 위안소로 지정된다. 동시에 이 곳에서 일하던 여성의 신분이 창기에서 위안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는 여러 가지 다른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안소의 운영 상황

위안소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군이 직접 설치, 운영한 위안소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민간 업소가 군 전용의 위안소로 지정, 관리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군의 세밀한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 ‘다카모리 부대(高森部隊) 위안소 업무 규정(1940년)’을 들 수 있다. 이 자료를 보면 ‘위안부 성노예설’의 논리적 허점이 드러난다.

일본 다카모리(高林) 부대의 지방 상인 영업 구역이 보여주는, 위안소를 포함한 전형적인 영업 공간의 구분과 배치 자료. 이승만 TV 캡처.
  • 위안소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생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 위안소 내에서는 음식을 들 수 없다.
  •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 이용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 영업자 기타 위안부 여급 등에 대한 일체의 대차 관계를 엄금한다.
  • 이용시간과 요금

- 병은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원, 1시간에 2원.

-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원 20전, 1시간에 2원 40전

-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 3원, 24시 이후는 10원.

- 사쿠(사크, 콘돔)는 영업자가 부담한다.

- 황군(皇軍) 이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 상황을 보고한다.

위 자료에서처럼, 위안소는 군의 철저한 통제 하에서 영업이 이루어진 공창업이었다. 위안부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했으며, 영업주는 매월 1회 위안부별로 영업 현황을 보고해야했다. 대부분의 위안소 운영규칙은 이와 대동소이하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사실 위안소 운영규칙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대좌부취체규칙’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규칙은 유곽을 운영하기 위한 세 가지의 행정적 요건을 전제로 한다.

즉 성매매 종사자의 신분과 계약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의무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하면, 영업 구역은 한 곳으로 모은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성매매 종사자의 인신매매나 부당한 금전상의 계약을 감시하기 위한 등록제는, 이 업종이 계약에 의한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여러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이영훈의 경우 중국 흠주(欽州, 진처우)에 위치해 있던 위안소 자료를 대표적으로 소개한다.) 위안부들은 계약기간이 만료되거나 합당한 사유가 발생하면 위안소 밖으로 전출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다른 위안소로 가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위안부 일인당 하루 평균 수익은 18원 정도였다. 이 금액은 당시 소학교 출신의 공장 여공이 두 달을 일해야 받는 월급이었다. 여기에 식비, 생활비, 포주에 대한 전차금은 200원 수준이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전차금은 여인들을 얽어맬 굴레는 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위안소 운영의 위험도 역시 커질 수밖에는 없다. 위안부의 노동 강도는 격렬하여,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나 만주에서 발달한 조선인 매춘업에서 하루에 30명의 손님을 받는 여성도 있을 정도였다. 즉 민간의 공창에 비하여 군 위안부제는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병사 150명당 위안부 1명이 충당되었으므로, 만약 한 병사가 위안소를 한 달에 한 번 찾는다고 가정하였을 때 위안부의 노동 강도는 하루 5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1937년 일본 오사카 유곽 구역의 창기 한명이 하루 2.5명의 유객을 받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노동 강도가 센 편이었다.

그러나 군 위안부는 그만큼 고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병사들의 화대는 민간 유곽보다는 쌌지만, 하사관과 장교의 화대는 비슷했다. 특히 군의 관리가 엄격하여 업주의 중간 착취는 통제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위안부는 적지 않은 금액을 저축하고 또 본가에 송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위험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위에서 든 예들은 후방 지역의 위안소라 다소 안전한 환경에서 영업이 가능했지만, 남태평양과 버마와 같이 2차대전 말기 연합군과 일본군의 격전지에서 일본군이 붕괴할 때 위안부들의 처지는 처참했다. 적기의 공습에 노출되고, 소속 부대에서 버려지기도 하고, 일본군과 함께 죽기를 강요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장에서 이렇게 소멸한 위안부의 수보다, 대다수의 위안부가 전쟁이 끝난 뒤에 무사히 귀환하였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더욱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주선업자의 꾐에 빠지거나 가난 때문에 부모가 주선업자에게 팔아서 창기나 위안부가 된 여성들 역시, 계약을 기반으로 군의 엄격한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수가 계약이 끝나면 위안소를 떠났다. 주선업자를 따라 위안소를 옮기며 이동하는 위안부도 분명히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들을 참고하도록 한다.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내용들 자체의 사실 관계를 따져보면 주선업자와 함께 군부대의 이동 경로를 따라 함께 옮겨가는 이야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1941년에 국내에서 활동한 창기와 예기, 작부는 그 수가 9,500명이었다. 만주, 대만, 일본, 중국에서 활동한 창기의 수도 그 정도였다. 이를 모두 합하면 1만 9,000명이었다. 그 가운데 위안부의 총수는 대략 3,600명 정도였다.

민간의 창기가 위안부로 신분의 명칭이 바뀌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3,600명의 위안부와 1만 9천 명의 창기는 그 본질이 같다. 일본군 위안부는 공창제라는 개념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동남아 위안소의 실태

지난 2019년 2월 19일 《동아일보》에서, 서울시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공개될 것이라며 보도한 사진. 이 사진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위안부 관련 기록으로서, 1944년 8월, 미얀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는 한국인 위안부 포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의 원본을 발굴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서울대 정진성 명예교수 등은 위안부 학살 또는 강제연행설 등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이영훈, 이우연, 박유하 등의 연구자와 미디어워치 등의 극소수 언론에서 이 사진을 둘러싼 역사적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로 내려가 베트남과 싱가포르를 점령, 버마(현 미얀마)까지 진출하였다. 이 곳에서도 일본군은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곳까지 창기가 건너가기는 무리였다. 창기가 부족할 뿐 아니라 경찰의 단속이 심해져 창기가 아닌 여성을 위안부로 모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42년 5월 즈음 동남아 주둔 일본군은 조선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에 위안소에 여성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선군사령부는 조선의 주선업자와 접촉하였다. 앞서 설명대로 매춘업은 주선업자를 통해야 했고, 조선의 매춘 시장은 소매 – 도매 – 중앙시장의 위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군사령부의 위탁을 받은 주선업자들은 전국적인 망을 통하여 모은 약 800명 정도의 여성을 동남아로 송출하였다. 이 여성들은 1942년 7월을 전후하여 네 차례로 나뉘어 부산항을 출발했다. 위안부로 일하는 여성들은 총독부 경찰의 협조 아래 신분증명서와 여행 허가를 발급받아 수송함을 탔다.

그 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은 1944년 8월경 20여 명의 위안부가 미군 포로로 잡혀 심문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 제49호’의 일부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42년에 일본군은 위안부 703명 정도를 버마로 데려왔다고 한다.


1944년 8월, 버마 지역을 접수한 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심문한 뒤 같은 해 10월 1일자로 작성한 보고서. 이 보고서 내용의 일부만 발췌하여 의도성 짙게 편향된 번역을 내보낸 뉴시스의 보도로 인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심문 자료는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조선인 위안부의 실상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자세히 전달하고 있음이 분명하여, 1차 연구 자료로서의 높은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일본군의 의뢰인이 위안 서비스를 할 여인을 모집하기 위하여 조선에 도착하였다. 서비스의 내용은 부상병 위문이나 간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일로 소개되었다. (...중략...) 많은 여성이 그 허위의 설명을 믿고 전차금을 받고 응모하였다. (......) 그들은 받은 전차금의 크기에 따라 6개월 또는 1년간의 군의 규칙과 위안소 업주에 묶였다.

동남아 위안소를 개설하는 데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일본군과 총독부의 개입이 컸다. 일본인이나 조선이 사회가 형성된 곳이 않은 곳이었고, 민간업자가 여성을 이끌고 군대 뒤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거나 교통편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민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주선업자에 위안부 모집을 의뢰했고, 그들의 주선을 통해 위안소를 경영하는 업주가 선발되었다. 이렇게 선발된 업주가 위안부를 모집하였던 것이고, 이들은 가난하고 무지한 집의 딸들을 전차금을 주고 모집하였다.

하지만 보고서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군에 의해서 편성된 공창제라는 본질은 동남아에서도 그대로였다. 또한 위안소의 운영수칙에 대해서도 이 보고서는 남기고 있는데, 위안부의 여성들이 병사들과는 다르게 음식과 물품이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고, 또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구매할 만큼 많은 돈이 있어서 잘 살았다고 전한다. 건강 상태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특히 군에서는 병사들이 위안소를 찾을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에 일반병들의 불만이 꽤 있을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43년 후반에 일본군은 위안소 업자에게 빚을 다 갚은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고, 위안부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점은 조선인 조바(창기들을 데리고 다니며 업소를 관리하고 사무를 보는 사람)였던 박치근의 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박치근의 일기는 안병직의 번역을 통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 2013)라는 제목 아래 출간된 바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각들의 문제점

성노예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2판 서문. 박유하는 2015년 2월 17일 서울동부지법의 판결을 받은 뒤 삭제 표시를 그대로 둔 채로 재판본을 냈다. 그는 소송 과정과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렸으며, 2판 전체를 pdf로 공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권리 등을 고려하여 2판 서문만 게재한다. 여기에는 초판이 나온 뒤 10개월이 지나서야 예기치 못한 소송에 휘말리며 겪은 심적 고통이나 깨달음이 냉정하게 술회되어 있다.


일본의 센다 가코(千田夏光),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송연옥(宋連玉) 등은 이른바 위안부의 ‘성노예설’을 선구적으로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의 위안부들은 행동의 자유가 없었고, 사실상의 감금 상태에서 억지로 성교를 강요 당했고, 일본군의 폭력적인 대우와 업주와 얽힌 금전적인 관계 때문에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송연옥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공창제 하의 창기나 작부 역시 성노예이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창기와 작부가 자유의지로 폐업할 수도 없었고, 폭력배가 감시하는 상황에서 사실상의 감금을 당한 채로 불어나는 전차금 이자 때문에 예속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공창제의 속성이 일본군 위안부제에서 노골적으로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 당국이 ‘강제연행’을 지시하는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은 구 일본군이 자료를 소각처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공개 자료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 관방장관도 2007년 3월 “종군위안부 징집명령에 관한 구 일본군의 자료는 처분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1993년 담화문 발표 후, 그는 “실제로 청취조사 증언을 읽으면 피해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당한 강압이 있었다는 인상이 강하다”라고 말하였다. (‘고노 담화 (전문)’ 참고)

일본변호사연합회의 해외조사특별위원인 도츠카 에츠로(戸塚悦朗) 변호사를 중심으로 1992년 즈음부터는, ‘위안부(comfort girl, 이 용어는 미군 심문 기록에도 등장한다)’가 아니라 ‘성노예(Sex Slaves)’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시민 단체들이 유엔에서 로비활동을 계속하여, 1993년 이후 유엔에서도 ‘성노예’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힐러리 클린턴도 공식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위안부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나 그 폭이 제한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위안부라는 직업의 특성에 부대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듯 민간의 주선업자나포주와 창기의 관계는 경제적 계약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1937년 창기의 명칭이 바뀌어 위안부가 되었을 때에도 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니, 군 위안부의 계약 관계나 관리 수칙은 오히려 민간에서보다 더 세심한 통제를 받았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이다.

포로 위안부에 대한 미군 심문 기록에서 지적하듯, 1943년 동남아의 일본은 전차금을 갚거나 계약 기간을 다 채운 위안부의 귀향을 허락하였다. 안병직이 번역한 조선인 조바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한해에 일한 20여 명의 위안 부 중에 15명이 폐업을 하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그 중의 일부가 다시 귀국을 포기하고 위안소로 돌아오기도 하였고,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귀국선을 기다리고 있는 위안부들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전차금와 그 이자를 갚지 못해 예속상태로 있었다는 주장 역시, 오히려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증언하는 이들의 회고록 등에서 모순점을 찾을 수 있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무지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송금하였다는 기록 역시 지금도 확인 가능하다. 포주들은 이들을 대신해 일본 우체국(요즘으로 치면 우체국 예금 형식 등과 비슷) 등으로 이들의 저축금을 보냈다. 예외적으로 채무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 숫자가 미미하고 예외적이므로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노예설을 민간의 공창제로 확대하는 것도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1924년에 도우케 시이치로(道家齊一郞)이라는 이가 평안북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에 분포한 창기와 예기, 작부의 이동을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1924년 한해에 창기 등으로 진입한 여성은 모두 3,494명이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통계 연보에 따르면 그 전해인 1923년 말 전국의 창기 등의 수는 7,257명이었다. 1924년에 폐업한 창기 등은 그의 45%이다. 도우케의 조사에서는 평안북도가 제외되었으므로 실제 폐업률은 이보다 높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추산되는 창기 등의 평균 근속 기간은 2년 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노예 상태라고 보기에는 업계 진입과 폐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진, 계약에 의거한 영업 시장이었던 것이다.

강제연행설: 거짓으로 판명된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

요시다 세이지의 등장

1992년 8월 12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 증언. 이 당시 이념 성향에 관계 없이, 거의 모든 언론에서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강제연행설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검색이 가능하지만, 검색 결과 제시 속도라든가 일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는 바로, 어린 소녀나 처녀들이 일본 관헌에 의해서 끌려갔다는 설이다.

1983년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일본에서 발표한 《나의 전쟁 범죄》에는, 그가 1943년에 부하 여섯 명과 더불어 제주도 성산포에 들어가 단추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16명을 끌고 갔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주도에서 무려 205명의 여인을 납치했다고 주장을 하였다. 남편이나 가족이 막으면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칼로 위협해서 물리쳤다고 한다. 이를 아사히(朝日) 신문이 1982~1997년에 약 16회에 걸쳐 보도하며 한국과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요시다의 책에 근거하여 1984년에는 MBC의 TV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고, 1989년에는 《나는 조선 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의심을 샀다. 무엇보다도 제주도 현지에서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제주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요시다가 말한 문제의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을 전하고 있는데, 작은 마을에서 소녀를 열 명 넘게 잡아갔다면 그 자체로 큰 사건이고 충격일 텐데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민들은 요시다의 책에 대하여 일본인들의 얄팍한 상술이 빚어낸 일이라며 분개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996년 5월 일본의 《주간신조(슈칸신쵸, 週刊新潮)》와의 인터뷰에서, 요시다 세이지는 자신의 증언이 픽션임을 고백했다. 그 뒤 2000년에 요시다 세이지는 사망했는데, 그 후에 그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책이 모두 거짓이라고 밝혔다.

또한 2014년 8월 초 아사히신문은, 과거 요시다의 발언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32년 만에 관련 기사를 공식 취소했다. 심지어 아사히신문 구독자 등 482명은 “증언을 검증하지 않고 보도를 지속해 독자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했다”며 아사히신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이 소송에서 아사히 신문이 승소했다. 당시 일본 법원은 “특정 사람의 명예 및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또한 앞서 살핀 대로 위안부 성노예설을 주장하며 강제연행 문제를 추궁해온, 요시미 요시아키도 교수도 조선에서 관헌에 의한 노예사냥이 있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1997년에 밝힌 바 있다.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 증언을 역이용하는 언론과 시민단체들

지난 2017년 4월 13일, 천안에 있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요시다 세이지의 이름으로 세워진 '위안부 피해자 사죄비'가 그의 아들의 주문을 받은 한 일본인이 무단으로 '위령비'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연합뉴스 보도 사진. 요시다 세이지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은 알려진 것과 다르며, 그 증언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의 주문을 받고 사죄비를 훼손한 일본인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요시다 세이지는 생전에 자신의 증언이 거짓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였고, 그의 인터뷰를 대서특필한 아사히 신문 역시 2014년 기사 내용을 철회했다. 2018년, 여성가족부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허위로 판명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사건을 과장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움직임도 여전하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이후 한국의 영화나 소설 등과 같은 문화 영역에서 ‘위안부’에 대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이미지가 굳건히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1960~70년대는 일제 시대의 당사자들의 삶이 자유 대한민국의 틀 안에서 또 다른 생명력을 뻗치고 있을 때다. 이 당시의 영화나 소설에서도 간혹 위안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이미지는 미군 위안부의 이미지, 즉 당대에 매우 익숙한 현실상의 인물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덧씌워진 것이었다.

여기에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하는 영화도 있었다. 또한 당대를 풍미하던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의 일종으로 위안부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여러 일본군을 상대하던 조선인 위안부가 조선인 병사와 만나 순수한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 정도이다.

그러다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이후 문화 영역에서 위안부를 그리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를 들어 윤정모의 소설 《에미는 조센삐였다》는, 말 그대로 ‘조선인 창녀’라는 당대적 인식을 거의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서 ‘삐’란 ‘prostitute’의 일본식 표현인데, 생활고로 인해 사창가로 몰린 여성이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남편이나 가족의 냉대와 학대에 시달리며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1982~1997년에 출판사를 바꾸어 가면서 세 번출간되었는데, 세 번째 출간 때에는 어린 소녀가 총칼을 든 일본 관헌에게 끌려가는 그림이 표지에 실린다. 약 15년간 이루어진 위안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16년 개봉된 《귀향》이라는 영화는 이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웹툰과 같은 최신의 매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 현상이다.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신이 ‘소녀 사냥꾼’이었음을 떠들고 다닌 요시다 세이지로 인해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는 이렇게 바뀌어 갔다.

그런 가운데 1990년 11월에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이 만들어졌고, 첫 번째로 위안부 증언이 나오게 된다. 이들의 주도로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2019년 현재 이 집회는 세계 최장기 집회 기록을 세우며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체의 이름은 지금 ‘정의기억연대’로 바뀌었고, 그 단체 운영자의 면면이라든가 이념 성향으로 인해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의 첫 명칭이었던 ‘정신대’라는 개념 자체가 위안부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나 방향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신빙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는 없다.

여자정신근로대와의 혼동: 위안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2019년 8월 현재, 여성가족부에서 운영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뮤지엄'에 소개된 위안부의 개념. 정신대와 혼동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나, 그 뒤에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사실과 다른 부분이 눈에 띈다. 이 설명을 잘못 읽으면 소수라고 해도 정신대가 위안부로 끌려 갔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특히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강제 연행설을 주장하는 쪽의 입장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여자정신근로대(女子挺身勤勞隊, 이하 ‘정신대’)에 대한 오해는 지금도 위안부 문제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정신(挺身)’이란 어떤 일에 앞장서서 나아간다는 뜻이다.

정신대는 노무동원의 예와 비슷하게,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이야기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여성을 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포되었다. 그 대상은 12~40세의 미혼여성이었고, 이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그 전해에 정신대를 조직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도 적고 민간의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동원령을 발포한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조선에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뮤지엄에 소개된 위안부들의 위안소 생활에 대한 설명.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띈다. 병사 한 명이 2~3분씩 이용하며, 그 뒤에 20~3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식의 설명이다. 설명 자체가 오히려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부추길 소지가 많다.

하지만 알선이라든가 관의 권유 등을 통하여 접객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여학생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평양에 있는 군수공장이나 인천의 조병창에서 두어 달 근로한 사례는 있었다. 그 중의 일부가 일본 군수공장으로 간 사례도 있었는데, 총수는 약 2,000명 정도로 짐작된다.

이렇게 소수의 여성이 정신대로 조직되어 공장에 투입되자, 민간에서는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지고 혼란이 확산되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 노년층 가운데에는, 혼란과 두려움의 빠진 부모들이 강제로 딸들을 학교에서 중퇴시키거나 결혼을 시켰다는 사실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민간의 혼란에 대하여 일본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1944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가 ‘국민징용의 해설(国民徴用の解説)’에서 여자정신근로령을 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런 인식은 1990년대 정대협이 결성되고 요시다 세이지의 발언이 날로 강도가 세지는 가운데,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도 점차 굳어진 경향이 있다. 그 당시 언론에서도 위안부와 정신대를 뒤섞어 사용하였던 것이다. 언론의 보도로 인하여 한국 국민 인식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 일제가 여성을 동원하여 전선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은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보고된 바가 없다.

참고 자료

  • 이영훈,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300~339쪽
  • 주익종, “해방 40여 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같은 책, 340~351쪽
  • “돈에 눈 어둔 부모”, 《매일신보》1937년 3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1]
  • 김동호 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위 원문에 대한 번역), 《미디어워치》2016. 6. 30 [2]
  • "일제시대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지휘자 요시다 세이지씨 증언", MBC 뉴스데스크, 1992. 8. 12.[3]

아래 자료는 위안부의 개념과 해석에 대한 자료 가운데 극히 일부만 소개한 것이다. 선별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반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판단 근거가 될 만한 기초 자료이다. 둘째, 이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관련 논쟁을 가리키는 다수의 링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 “아사히 신문의 패배로 본 희망”, SNUAC(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NEWS, 2015.11. [4]
  • 여성가족부 인터넷 박물관 [5]
  •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미디어워치》, 2018.4.14. [6]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위안부)” [7]

이 기사가 미국의 버마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 49호 왜곡 번역 논란을 불러온 문제의 그 기사다.


  •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일본 위키피디아 번역 (1) ~ (4), 《미디어워치》2018.5.7.~5.17 [8]
  • 일본 위키피디아 문서 원문 [9]

각주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