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후보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과는 부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공개 투표를 계획한다(예: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가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그들에게 "자유당인 거 잊지 마라" 등의 말을 하는 것). 완장 부대를 활용한다(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누구 찍어야 하는 지 알지" 따위의 말로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지라고 협박하는 것).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진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는다. 야당 참관인은 투표하는 장소에서 추방시킨다.

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데모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다. 하야 후 한달 간 사저인 이화장에서 머물다 병환 치료차 하와이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