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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제주心3정립 연구•유족회 공동대표 이동해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가 제주4.3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첫 시도로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11월 7일 창립식을 가진 이후 두 달여 만에 발간되는 제주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우리 유족회의 땀과 눈물의 결실입니다. 간난의 산고 끝에 발간하여 여러분들에게 드리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주 ‘4.3의 진정한 희생자!’에는 제주4.3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책은 제주4.3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나 제주4.3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하나의 등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곡된 제주4.3을 보면서 4.3을 바로 잡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분들에게는 시원한 낭보가_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4.3의 진정한 희생자!’에서는 4.3정부보고서의 왜곡 부분을 하나씩 짚어 나갈 것이며,4.3평화재단과 4.3평화공원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지적해 나갈 것입니다. 4.3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한 증언을 기록하여 그 동안 감 추어졌던 4.3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나갈 것입니다. 4.3유족 분들이나 4.3을 체험하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떠 한 이야기도 좋고 어떠한 목격담도 괜찮습니다,여러분들의 증언과 제보가 왜곡된 제주4.3을 바로잡는 씨알이 될 것이며,역사를 바로 세우는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정기적으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는 제주4.3의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할 것이며,대한민국의 정통 역사를 세우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밝아오는 갑오년은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가 우 뚝 서는 원년의 해가 될 것입니다. 계속 지도 편달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3년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발간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창립 선언문

제주4.3은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역사이다. 제주4.3은 일부 정파의 전유물도 아니며 4*3유족회의 소유물도 아니다. 제주4.3에는 우리가 상기하여야 할 진실과 교훈이 들어있다. 제주4.3은 왜곡해서도 안 되고 정치적 정파의 이익에 따라 흔들려서도 안 된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좌경화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거짓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 되었다. 제주4*3평화공원에는 주념 받아서는 안 될 위패들이 모셔져 있고,제주4.3평화재단은 편향 인사들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제주4.3정부보고서는 4.3의 핵심이자 본질인 성격규정이 안 된 반쪽짜리 보고서일 뿐만 아니라 왜곡과 날조로 점철되어 있다.

이에 우리는 역주행하는 제주4.3의 행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기에 이 자리에 모였다. 4.3의 피해자가 어찌 그들뿐이며 4.3의 주인이 어찌 그들뿐이던가. 4.3을 이용하는 자 그 누구이며 4.3을 왜곡하는 자 그 누구이던가. 우리는 왜곡된 제주4.3의 역사를 바로 잡아 대한민국에게는 정당한 역사를 돌려주고,진정한 피해자들에게는 진정한 추념일을 돌려주기 위해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이다.

우리는 국민 앞에 다음과 같이 기약하고자 한다. - 진실한 4.3의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과 유족들을 규합하여 대한민국의 정 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해 나아가겠다. -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긍정의 역사로 규정하고 제주4.3의 민중항쟁 주장을 강력히 비판한다. - 대한민국 건국 희생자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추념하며,진압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선량한 도민에 대한 신원과 추념 및 보상에 적극 노력한다. - 왜곡된 令3정부보고서를 수정할 것이며,대한민국 건국 반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용3주동자들의 희생자 결정에 반대한다. - 牟3희생자에 대한 국가추념일은 舍3에 대한 성격을 먼저 규명한 후에 지정 할 것을 촉구한다. -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한 수3사건의 개시일인 4월3일 을 국가추념일 날짜로 지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 제주4*3평화재단의 독선적, 편향적 인사 정책을 반대한다. - 제주도 최대 비극인 4.3을 개인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규탄하며 4-3관련단체들의 정치세력화에 반대한다. - 우리는 화해와 상생을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 과잉진압과 인권침해에 대한 통렬한 반성 위에 출발하면서,제주小3에 대한 좌익의 과오도 인정할 것 을 촉구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성장과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대 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제주牟3을 바로잡을 사명감을 가지고 대한민 국 헌법의 수호세력으로서 이 단체를 창립하는 바이다.

자유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 ! 제주도민 만세! 2013. 11. 7

역사의 진실을 왜곡한 4.3진상조사보고서는 폐기, 새로 작성해야 한다

정부보고서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정치권력과 이념 의 편중으로 역사의 진실을 왜곡했다. 이 왜곡된 보고서를 정사正史)로 고착個着)화 하여 세계에 알리고 후세를 위한 교육자 료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때문에 역사의 진실은 바로잡아야 한 다. 令3의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미래 세대를 위한 시대적 소명 (石 命)이다.

제주 4 • 3사건 인명피해 재검토

김영중 전 제주경찰서장

서언

제주4.3사건은 제주도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참극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4_3사건이 발발한 이후 국회에서 또는 제주도의회나 관련단체에서 인명피해에 대한 신고를 접수하거나 조사한 일이 있었지만 정치적 또는 기타 사정으로 인하여 부분적이고 일회성에 그쳤었다. 그 후 민주화가 이뤄지고 지방자치제가 부활되면서 자연적으로 小3인명피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특히 2000년 1월 12일 법률 제6117호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이하 수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본 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 경험세대 거의가 사망했거나 연고자가 없는 경우, 그리고 4-19, 5-16, 6-10 등 정치적 변혁기와 특히 6*25남침전쟁은 재판기록을 비롯해서 많은 자료를 사라지게 했다. 그 결과 4.3인명피해 내용을 두고 사람마다 다른 주장을 하는가 하면 학계나 언론계에서도 기존 추정치를 자기 입맛에 맞게 골라,검증 없이 반복 인용함으로써 확대과장 된 것이 정설화 되는 등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정리해야 할 책임 있는 정부 발행「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정 부보고서)마저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역사자료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필자는 이제 제5차 신고까지 마친 마당에 이르렀으니 각자의 주장을 정리하고 객관적 자료에 의해 인명피해 규모를 확정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이를 재검토하기로 한다.

4.3인명 피해에 대한 주장들

4-3인명피해는 처음부터 정확한 신고와 검중을 거쳐 결정하여야 함에도 불구 하고 그렇지 못하였다. 부정확한 인구 통계 등을 인용하여 추정치를 산출하는가 하면 심지어 이재민 수를 사망자 수로 잘못 인용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정 부보고서마저도 피해를 너무 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소와 최대 간의 편차를 5천 명이나 두는 등 막연한 추정치를 제시한 상태이다.

오라리 사건의 진실

오라리 사전의 창조

제주4.3에서 ‘오라리 사건’이라는 이름은 애초에 없었다. 오라리 사건은 4.3이 발발한지 한 달 여 후인 1948년 5월 1일 오라리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 날의 오라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중요할 만한 것도 별로 없다. 4.3의 와중에서 여기저기서 벌어졌던 쌍방의 보복전으로,4.3의 치열한 기간에 벌어졌던 일상적인 사건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라리 사건은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이하 4.3정부보고서)에서 ‘4.28 평화협상’을 깨뜨 리는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며 특급 대우를 받게 된다. 애초에 없었던 오라리 사건을 특별하게 만들게 되었던 시초는 존 메릴의 논문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 메릴의 4-3 논문 ‘제주 도 반 란 (The Chejudo Rebellion, 1975년 하버 드대학)’이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은 1988년이었다. 존 메릴은 논문에서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in Korea : Cheju- do)'라는 무성영화의 존재를 언급했다. 그러자 이 영화가 찍혔던 5월 1일의 사건에 주목하는 일단의 인사들이 있었다. 5월 1일의 사건은 여러 면에서 쓸모가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인사들은 ’오라리 사건‘이라는 용어를 창조해 내 었다. ’오라리 사건‘이라는 이름은 특수한 목적의식을 가진 집단에 의해 80년대 말에 창조된 신조어이다. 오라리 사건에 최초로 큰 의미를 부여했던 집단은 제민일보에서 ‘4.3은 말한 다’를 집필하던 집필진이었다. ‘4.3은 말한다’ 2편에서 오라리 사건은 ‘오라리사 건의 진상’이라는 단락 하나로 30페이지에 걸쳐 집요할 정도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민일보의 집필진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기존의 4.3진 상에 의심과 증오를 품고 있는 집단이었다. 그래서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는 제주4.3의 진상에 새 지평을 열기도 했지만 또한 제주4.3에서 왜곡의 출발점 이 되기도 하는 문제의 자품이기도 하다. ‘4.3은 말한다’에서 오라리 사건은 시종일관 이런 취급을 받는다. 미군이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한 계획적인 사건으로 보이며,4.28평화협상을 깨뜨리기 위한 의도적 인 사건이며,무장대에게 책임을 떠넘긴 왜곡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제민일보의 이 주장은 4.3정부보고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제민일보의 ‘4.3은 말한 다’의 주 필진이 그대로 제주4.3사건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제주4. 究진상조사팀과 4.3정부보고서의 작성기획단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4.3정부보고서가 ‘4.3은 말한다’의 표절판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오라리 사건에는 80년대에 유행했던 ‘반미주의가 스며있다. 오라리 사건은 낡 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 낡은 깃발은 그 신봉자들에 의해서 2003년의 4.3정부보고서에도 들어서 있다. 그러나 제민일보나 4.3정부보고서가 오라리 사건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오라리 사건은 만들어지고 키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4.28평화회담’이었다. 제주4.3의 ‘없는’ 역사를 ‘창조’해낸 사람들은 ‘4.28평화회담’이라는 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오라리 사건이라는 지렛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4.28평화회담과 오라리 사건은 제주4.3정부보고서의 왜곡과 날조의 양대 축이라고 할 만 하다. 오라리 사건이 없을 것이라면 4.28평화회담의 존재 의미도 없어진다. 그래서 두 사건을 형제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어야만 효과를 낼 수 있는 사건이다. 두 사건의 왜곡을 통해 제민일보와 4.3정부보고서는 이렇게 주장하려는 것이다. 진압군과 무장대 간에 4.28평화협상을 맺고 화평을 선언했는데,경찰과 미군 측에서 오라리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화평을 깨었고, 그래서 4.3은 유혈로 치달았다. 이렇게 주장하여 4.3의 책임을 경찰과 우익 측에 전 가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4.3정부보고서의 4.28평회담은 심각하게 왜곡된 허상이었다. 그리고 오라리 사건도 선동과 왜곡으로 가득 찬 신기루였다. 오라리 사건은 4.28평화 회담,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부인 등과 함께 4.3정부보고서에서 중요한 왜곡들 중의 하나이다.

오라리 사건의 발단

오라리 사건의 주 무대는 오라리 연미마을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제주 시 오라삼동에 속하며,연미마을은 현재 오라초등학교가 있는 일대의 마을이다. 지금은 제주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지만 당시는 제주음의 남쪽에 자리 잡아 중산간에 해당되는 마을이었다. 오라리에는 5개의 자연마을이 있었고,6 백여 가호에 주민은 3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4.3당시 중산간 마을은 좌익 무장세력의 근거지 역할을 하거나,좌익 성향이 득세하는 ‘민주마을’이 대부분이었다. 오라리도 그런 대세에서 벗어나지 못해 좌익세가 강한 좌익마을이었다. 1947년 3.1사건 때 발생했던 사망자 6명 중 2 명이 오라리 출신이었으며,오라리 사람들 중에는 3.1사건으로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5.10 제헌선거 때에는 마을사람 대부분 이 선거에 불참하며 오름 등지로 피신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좌익성향이 강한 마을을 배경으로 오라리 사건은 발생했다. 오라리 사건에는 살인과 납치,방화와 총성이 난무하며 여러 가지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 중에 ‘방화사건’은 오라리 사건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중 가 장 중요하게 대접받는 사건이다. 제민일보는 오라리 사건에서 ‘방화사건’ 하나만을 강조하며, ‘대낮 방화’로 인하여 평화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라리 사건의 출발이 방화로 인하여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제민일보의 전형적인 선동이다. 오라리 사건에는 방화사건 하나만 발생했던 것도 아니고, 방화사건이 제일 먼저 발생한 사건도 아니었다. 제민일보의 주장을 이어받은 4.3정부보고서는 제민일보보다 더욱 비양심적으로 진화한다. 4.3정부보고서에는 ‘오라리 사건’이 아니라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제목에는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달아놓고서 내용에서는 오라리 사건 전체를 논하고 있다, 전형적인 양두구육,침소봉대의 수법이다. 5월 1 일 오라리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에서 ‘방화사건’만을 끄집어내어 우익 측의 소행이라는 주장하는 것은 팩트이다. 그러나 오라리 사건을 우익 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이다. 그리고 ‘오라리 방화사건’이라는 제목을 달고 내용은 오라리 사건 전체로 확대하면서 우익 측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것은 날조이다. 오라리의 방화는 5월 1일 낮 12시에 시작되었다. 방화의 주인공은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의 단원들이었다. 대동청년단 30여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을 돌며 5가구 12채의 초가집에 불을 질렀다. 이들은 마을을 돌며 마구잡이 방화를 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목표를 설정한 상태에서 5가구를 골라 불을 질렀다. 이들 의 방화에는 목표가 있었고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청년들은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장례식을 치루고 온 터였다. 이날 아침 9시 연미마을 근처 ‘동산물’에서는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모여 한 여인의 장례를 치루 고 있었다. 죽은 여인은 ‘강공부(23)’로 대청단원의 부인이었다. 강공부와 임갑생 (23)은 동서 간으로 남편들은 대청단원이었다. 연미마을에 살던 이들은 4.3폭동이 악화되면서 좌익세가 강한 오라리에서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주읍으로 급히 피신한 상태였다. 장례식이 있던 하루 전 4월 30일 아침에 두 여인은 살림살이를 챙겨가려고 마차꾼과 함께 오라리에 들렀다. 그러나 두 여인이 마을에 들어서는 모습은 민오름 정상에서 망을 보던 삣개’가 지켜보고 있었다. 좌익단체인 민애청 단원들이 오름에서 내려와 순식간에 짐을 싣고 있는 여인들을 둘러쌌다. 이들의 살기가 등등하자 분위기를 직감한 마차꾼은 도망쳐버리고, 두 여인은 눈을 가리고 포박 당한 채 민오름 으로 끌려갔다. 두 여인은 민오름 정상에 있는 소나무 두 그루에 묶여졌다. 그리고 민오름 어 딘가에는 그 전날 잡혀왔던 오라리 대청단장과 부단장도 감금되어 있었다. 민오름의 무장폭도들은 대청단장과 부단장을 두고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로 왈가불가하고 있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눈이 가리고 손이 묶인 두 여인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경찰이 온다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갔던 마차꾼이 경찰에 신고하자 경찰이 출동한 것이었다. 경찰이 온다는 소리를 들은 임갑생 여인은 뒤로 묶은 손목에 힘을 주고 밧줄읕 卜슨하게 풀기 시작했다. ᄀ■러자 밧줄이 느슨하게 풀리고 손목이 빠져나올 정:£가 되었다. 경찰이 오름 아래로 가까이 다가온 듯하자 임 여인은 밧줄에서 손목을 빼고 눈을 가린 헝겊을 벗겨내고 냅다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상처투 성이로 구르다시피 내려온 임 여인은 경찰을 만났다. 그리고 경찰과 함께 다시 민오름 정상에 도착했을 때 강 여인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폭도들 이 도망가면서 임신 중이었던 강 여인의 머리에 총을 쏘았던 것이다. 경찰은 죽은 강 여인을 싣고 읍내로 돌아왔다. 뒷날 5월 1일 아침에 강 여인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자 청년단원들이 그 보복에 나선 것 이 오라리의 방화였다. 청년단원들이 불을 질렀던 5가구는 강 여인 살해에 관계됐거나,대청단장과 부단장,그리고 두 여인을 납치했던 좌익 단체들에 관계된 인사의 가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 라 리 사 건 의 발 단 은 민 가 에 불 을 지 르 는 오 라 리 방 화 사 건 이 아 니 었 다. 그 전에 이미 오라리 사건의 전조는 발생하고 있었다. 29일에는 대동청년단원 두 명이 민오름 폭도들에게 납치되었다. 결국 두 사람도 피살되었다. 30일에는 대동청년단원 부인 두 명이 폭도들에게 납치당하여 그 중 한 명은 피살되었다. 그 뒷날 방화사건은 폭도들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오라리 민가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오라리 사건에서 방화는 우익 측이 저지른 것이었지만 좌익의 납치와 살인에 대응한 보복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오라리는 폭도들에 의한 양민들의 납치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제민일보는 오라리 사건에서 우익의 방화는 문제를 삼으면서 조ᅡ익의 납치 살인에는 관대했다. 그리고 4.3 정부보고서도 편파적인 제민일보를 그대로 이어받아 오라리의 폭도들과 납치살인에는 관심 없고 방화사건에만 몰두하는 이상한 보고서가 되어버렸다.

민오름의 폭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