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말뚝 소동'의 출발점이 된 민간 단체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회장. 쇠말뚝 제거에 동참한 이로는 서경대학교 경제학과의 서길수 교수가 대표적이다.

다음은 쇠말뚝 소동의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쇠말뚝 소동'을 살펴보도록 한다.

1984년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나선 선 이 단체가 산 정상에서 쇠말뚝을 발견하였는데, 등산객들로부터 “일본인들이 서울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은 기둥”이라는 말을 들은 뒤 제거 운동에 나서면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쇠말뚝은 한때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관에 전시되어 우리 사회에 ‘쇠말뚝 신드롬’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도 쇠말뚝 제거 사업은 민간단체의 주도로 간간이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정도였다.

특히 1995년 2월, 당시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 기념 역점 추진사업’으로 쇠말뚝 제거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 사태가 커졌다. 쇠말뚝 제거 민간단체인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구윤서)이나 서경대 경제학과 서길수 교수, 그 외 몇 명의 풍수가 들이 추진해 왔던 사업에 국가의 정책적 지원과 홍보가 더해졌다.

정부가 나서기 전까지 민간 차원에서 쇠말뚝을 제거한 실적은, 북한산 17개, 속리산 문장대 8개, 마산 무학산 학봉 1개 정도였다.

1995년 2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6개월간 전국에서 쇠말뚝이 접수된 주민신고는 모두 439건, 이 가운에 일제가 박았다고 확실시되어 제거된 것이 18개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실제로 일제가 박았다고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어느 누구도 북한산 백운대 주변에 박혀 있던 쇠말뚝이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나 혈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입증할 만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운서 회장과 서길수 교수가 솔직히 인정했듯, 쇠말뚝은 일제가 박았다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감정 요청을 받고 나서 조사 작업에 착수해 보니, 군부대에서 필요해서 박았거나 목재 전신주 지지용, 광산이나 산판에서 사용하는 물건 운반용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일제의 쇠말뚝이라고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두 사람은 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쇠말뚝이 박혀 있다고 보고된 지역을 조사해 보면, 그 지역들이 측량을 위한 기점을 활용되는 대삼각점, 소삼각점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대삼각점은 측량기준점을 말하는데, 머리 부분의 열십자(+) 한가운데 측량기의 추를 맞추고 측량을 하는 기점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다음,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사실상 이 땅에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측량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측량기준점 표식을 전국의 높은 산에 설치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잃었다고 침통한 분위기에서 조선인들은 이상한 모양의 막대기가 땅에 박힌 것을 보고 “왜놈들이 조선에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으려고 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쇠말뚝의 발견 지점과 측량 기준점 지역이 일치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준 증언자가 있었다.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삼화리의 이봉득 씨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21세였던 1938년 무렵 산림보호국 임시직원으로 조선총독부 임정과에서 나온 측량기사 고가 주우켄(당시 30세)과 장길복(당시 25세)이라는 사람을 따라서 화천과 양구 일대를 돌며 업무를 도왔다. 그 당시 산봉우리 등에 설치한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려고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하는 조선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측량기사가 산에 올라가 대삼각점을 설치해 놓으면 주민들이 밤에 이걸 부수고 흩어놓는 일이 자주 있었다. 측량기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할 때 부역을 한 마을 장정들은, 어른들이 쉬시하면서 하던 이야기가 실제로 가서 보니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는 허탈해 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윤서 회장도 인정한다. 그는 “쇠말뚝이 박혔다고 제보가 와서 그 지역에 가 확인해 보면 측량용 삼각점이 박혀 있는 곳이 많았다”고 시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