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정
金武亭
기본 정보
본명
김병희(金炳禧)
국적
성별
출생
1904.05.16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성군 룡성면 근동리 524
사망
1951.07.10
직업
군인
병역
사단장

조선의용군 사령관
인민군 포병사령관
민족보위성 포병부상

인민군 제2군단장
경력
중국공산당 하에서 항일투쟁
학력
나남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학교 중퇴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졸업

김무정(金武亭, 1904.05.16 ~ 1951.07.10) 또는 무정(武亭)은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한 인물로 해방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하였다. 원래 성은 김씨가 맞지만 최무정이라고도 한다. 6.25 전쟁에서도 명성에 비해 별로 뛰어난 군사 지휘 능력을 보이지 못했고, 전쟁 중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숙청 당했다는 설도 있다.

생애


해방 당시 그는 중국에서 상당한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1945년 12월 15일 입북할 때에는[1] 이미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내세운 김일성이 권력 기반을 다져가고 있을 때라 그와 수하들은 무장을 해제 당하고 들어와야 했고, 부하들도 전국 각지로 분산 배치되어 독자적으로는 거의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과 김일성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하며, 김일성과는 계속 불화하였다.

그의 사후 그가 속했던 연안파(延安派)[2]들 중 김두봉(金枓奉, 1889 ~ 1961?), 최창익(崔昌益, 1896 ~ 1957) 등 대다수는 1956년 8월 종파 사건 때 숙청 당하고, 윤공흠(尹公欽, 1904 ~ ?) 등 일부는 중공으로 탈출한다.

소련 군정의 기록

РГАСПИ, ф. 495, оп. 228, д. 4, л. 2.
김무정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위원회 간부부장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
  1. 1904년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1921년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2. 1924~1926년 중국군관학교를 다녔다.
  3.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4. 1927~1929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군사부에서 일했고 상하이에서 조직 복구 사업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5. 검증되지 않은 자료에 의하면 1930~1936년까지 소련에 체류하면서 적군 아카데미에 다녔다.
  6. 1937~1945년 중국 홍군에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였는데 마지막 직책은 팔로군 군단사령관이었다.
  7. 1941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다.
  8. 1945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지시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9. 1946년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위원회 간부부장 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칼리닌

1946년 4월 17일

미군의 기록

6.25 전쟁 중에 작성된 미국 CIA 보고서에는 해방 당시 김무정이 상대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김일성보다 훨씬 더 인기가 높은 인물이라고 하였다.

미국 CIA의 김무정 관련 보고서.[3]
1. After the end of the war, KlM Il-song was brought back to Korea immediately, in October 1945, by the Soviet army and was introduced to the citizens of Pyongyang as the new head of the country. KIM returned with no army but under the aegis of the Soviet General Penkovsky. He was already well established and had his support well organized when the Koreans who had been fighting with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began to return to their om country.*

2. One of the outstanding leaders returning from China was KIM Mu-chong,** who arrived on 15 December 1945 with an army which had been aiding the Chinese Communists. As a brilliant military commander backed by a considerable army, he was a popular figure and more attractive to the Koreans than the relatively little known KIM Il-song. The latter, however, was already well-established politically, and he and his Soviet sponsors took care to neutralize any influence KIM Mu-chong's military strength might convey. The arriving army was immediately disarmed and scattered as far as possible, and when a new People's Army was organized in February 1948, the KIM Mu-chong forces were absorbed into the larger, centrally-controlled unit.

미군이 전쟁 포로 신문에서 획득한 무정(武亭)의 신상 정보

미군이 전쟁 포로 신문에서 얻은 무정(武亭)의 신상 정보.[4]

강상호가 증언한 김무정의 말로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姜尙昊, 1910~2000)는 무정의 말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회의에서 「불순분자」 등의 죄명으로 비판·강등·투옥 후 총살된 사람은 연안파의 무정(제7군단장·중장), 김한중(사단장·소장), 소련파의 김열(전선사령부 후방 총국장·소장), 채규형(최고검찰소 부총장), 남로당파의 허성택(노동상 겸 남조선 빨치산조직 책임자), 빨치산 파의 김일(전선사령부 군사위원·중장), 임춘추(강원도 당 위원장) 등이었다.

이 회의에서 지적된 무정의 (죄)는 이러했다.


무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평양방위를 포기, 적에게 평양을 넘겨주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동북부로 도망갔다..

그는 특히 도망갈 때 다수의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전쟁과 함께 2군단장에 임명된 무정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의 지도부와 인민군이 패주할 때 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됐다가 도주,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중국에서 제7군단을 편성해 지휘하다 소환돼 이 같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당시 강원도당 부위원장이던 나는 당원·민청회원·여맹회원·도민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후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들을 무정에게 넘겨주고 북조선의 임시지도부가 있는 강계로 내려가 있다가 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무정 장군은 무장군인들에 의해 군복이 벗기운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한참 후 그는 수인들로 구성된 「건설대대」의 대대장이 되어 평양시내 건설공사에 투입됐으나 중국의 요청으로 신병이 중국 측에 넘겨졌고 그 후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정 장군의 후임으로 제7군단장은 제3사단장이던 소련파 이영호 소장(53년 민족보위성 부상, 다시 해군사령관 등으로 승진)이 승진 전보됐다.

참고 자료

(p.163) 步銃...武亭 = 163 : 무정(武亭)이 직접 쓴 보총에 대한 설명.
武亭將軍 一代記 : 朝鮮義勇軍 總司令 / 서울新聞社 編 신천지. 제1권 제2호 (1946년 3월, 서울신문사) pp.238-241 : 국회도서관
김일성의 숙청정치-연안파 무정의 숙청(2) 자유아시아방송 2018. 5. 8


p.6 (pdf p.19) - 조선의용군(Korean Volunteer Army)과 김무정에 대한 내용.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