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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정
최근 수정 : 2022년 5월 16일 (월) 11:21

개요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38도선 이북의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련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군 점령 후 수개월이 지나서부터는 조선인들의 인민위원회에 행정을 이양하고 소련군은 이를 감독하는 간접적인 형태를 취하였으나 이를 소련이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직접 통치를 한 미군정에 비해 소련 군정은 그 형태가 간접적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미군정에 비해 훨씬 더 내정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지령문에 나온대로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 단독의 공산국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9월초에 스탈린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에의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5년간 자신들이 교육과 훈련을 시킨 진지첸 (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하였다.[1][2] 북한의 소련군정은 북한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던 김일성을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무수한 정치공작을 통해 지도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이를 위해 조만식, 현준혁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우파나 기독교 세력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여러 정치 조직들을 만들어서 김일성을 책임자로 앉혔다. 소련군정 시기는 토지개혁 등 북한 지역의 공산화와 소련의 대리인 김일성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주는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체제 선택권도, 지도자 선택권도 가질 수 없었고, 소련이 강제로 만들어준 공산체제와 김일성 지도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의 일방적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다.

소련군정 기간에 시행된 북한의 주요 정책이나 법안들은 모두 소련이 결정했고, 표면적으로는 김일성이 위원장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정해서 시행하는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북한 정권 공식 출범 당시에도 헌법 제정은 물론 초대내각의 인선까지 소련이 주도권을 행사했고, 그후로도 평양의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았으며, 특경부를 설치하여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을 감시했다.

반면에 미군정은 소련과 달리 자신들이 조선인 지도자를 임의로 선정하여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새로 출범하는 국가의 체제나 헌법, 지도자 등은 모두 한국인들이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했다.

해방 후 북한의 주권은 "일본천황 -> 소련군정 -> 김일성 -> 김일성 일족"으로 이전되어 왔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북한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압제자가 바뀌어 왔을 뿐이다. 오늘날 김일성 일족의 세습전제왕조 체제는 일제보다 훨씬더 폭압적이며, 전인민이 오직 수령 한 사람만을 위해 노예처럼 살도록 강요 당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비참한 현실은 주민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체제와 지도자 김일성을 받아들이도록 강압한 소련 군정에 기인한다.

반면에 한국의 주권은 "일본천황 -> 미군정 -> 한국 국민"으로 이전되어,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국민 주권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전개

일장기를 밟고서 조선인에게 태극기를 넘겨주는 소련군 그림. 소련군이 되찾아주었다는 태극기는 어디로 갔는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은 1945년 8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점령을 완료한다. 25군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었으나, 그는 야전 군인으로 정치문제에는 그다지 간여하지 않았다. 북한의 소련군정은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우수리스크에 사령부가 있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가 총괄하게 되며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된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과 민정청 사령관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등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북한 정권 출범 후 스티코프는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여전히 북한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방직전

해방직후

  • 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 (당 중앙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분국을 북한에 만들었음)
분국의 초대 책임자로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뽑혔으나, 1945년 12월 17일 김일성으로 교체된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나흘간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열었다. 마지막 날인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되었으나, 북한은 10월 10일을 당창건 기념일로 하고 있다.[3]
  • 김일성의 평양 출현 :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를 열어 국내 사람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소련군 88여단진지첸 대위를 전설적 항일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내세운다. 소련군 문서에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는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4]
김일성은 자력으로는 국내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능력도 전혀 안 되고,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사람이지만[5][6][7] 소련 군정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북한 정권의 수상직까지 차지한다.
만주 빨치산 출신 88여단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만주서 태어났거나 김일성처럼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중국에 거의 동화되어 중국말을 상용하며 조선말에는 서툴렀다. 이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그들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으며 소련으로 도피해서는 소련의 필요에 따른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국내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거의 알지도 못했으므로 그들은 북한의 핵심권력층이 되어야할 아무런 당위성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이 이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세력도 전무하고 낯선 북한이 아니라 생활기반이 있는 만주로 가서 중공당원이나 중공군으로 활동하며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북한의 핵심권력층이 되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 조선인들, 특히 김일성의 투쟁사가 북한의 핵심 역사가 되어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독차지하게 된다.
  • 남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보고서 : 1945년 10월 20일
SOVIET REPORT ON COMMUNISTS IN KOREA, 1945
수신 : GENERAL OF THE ARMY Cde. BULGANIN[8] / TO CHIEF OF THE MAIN POLITICAL DIRECTORATE OF THE RED ARMY GENERAL-COLONEL Cde. SHIKIN
공산주의자가 북한 지역에는 3,000명 이상, 남한 지역에는 2,000 명 이상이라고 함.
북한 지역 공산화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갖춘 소련의 고려인들을 대거 북한으로 데려와 주요 역할을 맡김.
김일성 등 소련군 88여단에서 5년간 훈련시킨 조선인 50여명을 데려와 북한의 핵심 권력을 쥐어주고, 공산주의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소련의 고려인들을 대거 데려온 것은 소련이 처음부터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소련은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4개국 신탁통치안에 뜻이 없으면서도 북한 지역에서의 반탁운동은 일체 금하고, 1946년 1월 2일에 김일성 등 정당 단체 대표들이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게 한다. 이어 1월 5일 신탁통치 반대를 구실로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처음에는 반탁 대열에 동참했던 남한 좌익들에게도 찬탁을 지시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도 반탁을 고집하는 남한 우파의 참여를 반대한다.

소련군의 만행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 시행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을 신탁통치

1945년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국내에서는 이에대한 격심한 찬반투쟁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찬탁이나 반탁운동 모두를 허용한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는 미국의 안이라고 극구 주장하면서도 북한지역에서 이에대한 일체의 반대 움직임을 봉쇄하고 지지, 찬성만 허용했다. 1946년 1월 2일 김일성, 김두봉 등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이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반탁 의사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시키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불허한다. 이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 북한의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조선인들이 북한을 통치하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주요사안은 소련이 결정해서 이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명의로 실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은 신탁통치 정국을 이용하여 사실상 북한단독의 임시정부를 세워 신탁통치를 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남한에까지 확대적용하려 했고, 이를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남한 사회를 흔들어 혼란을 조성하는데는 크게 성공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시작

소련군정기에 이미 김일성 우상화 공작이 시작되었다. 북한 전지역에 스탈린김일성의 사진을 내걸도록 했고, 공개된 6.25 당시 미군 노획문서에 보면 해방 직후의 북한 문헌에도 김일성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 글이 넘쳐난다. 이때 벌써 김일성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다.

  • 김일성 대학 개교 : 1946년 10월 1일 - 평양에 최초의 4년제 대학을 설립하면서 김일성 이름을 딴 것은 그를 이미 최고 지도자로 확정하고 우상화를 시작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북조선 『자유황해』라는 신문을 보면 김일성 장군을 례찬하는 노래가 있다. △이건 농군 박서방이 부르는 노래란다. △그 한 구절을 보면 △김일성 장군 빛나는 그 이름 받들어 한민족의 태양이라 찬양함은 장군이 오시므로 장군이 게시므로 봄빛처럼 다사로운 행복이 내 향토와 내 살림에 갈피갈피 깃드러 빙산같이 풀일 길 없던 온갓 고통이 영원히 영원히 사라진 까닭이라.
△이 노래를 드르면 북조선은 극락이오 천당이라. △그러나 하로에 몇천명씩 아버지 할아버지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쪼껴서 온갓 모욕을 당하며 남으로 남으로 밀려오는 동포는 김일성 장군과 같은 피가 흐르느 동포가 아니던가 △이북 천지가 어두어 촉누락시에 민누락(燭淚落時 民淚落)인데 Δ홀로 빛나신 분은 김일성 장군만이시런가

혼란 조성을 위한 대남공작

소련군정은 남한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남한 좌익들을 지원하여 폭동, 파업등을 일으키게 하고, 5.10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여러가지 공작을 펼쳤다.

  • 화폐개혁
해방 직후 남북한은 한동안 구일본 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했는데, 소련은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북한 지역에서 못쓰게 된 구일본 화폐를 남한 공산세력에게 내려보내 막대한 양을 유통시켜 혼란을 조성했다.

북한 정권 출범 전후

1948년 2월 8일에 북한 인민군이 공식 창건되고, 기만적인 남북협상이 진행되던 기간인 4월 29일에는 북한 헌법이 채택되어 남한의 5.10 총선 이전에 북한은 이미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헌법 제정에는 소련이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12일자 문건. "김일성 동무에게 보내는 충고"
1948년 4월 24일자 문건. "조선의 헌법문제에 대하여"
인공국(人共國)의 헌법(憲法) 1948.05.03 조선일보 1면


1948년 9월 북한 정권의 공식 출범 당시 레베데프가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한 북한내각의 각료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정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요직의 인사 문제에 소련이 깊숙하게 간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정권 출범후 소련 군정은 표면적으로는 종식되고, 소련군도 1948년말까지 철수한다. 하지만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가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은 또 비밀 경찰조직 특경부(特警部, Special Police Section)를 운영하며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소련 군정하의 북한 상황

소련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

소련 군정의 최대 목표는 자신들이 88여단에서 5년간 훈련시켜 데려온 김일성을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북한의 지도자로 만들고, 그의 권력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스탈린88여단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낙점한 것은 1945년 9월초이다.[1][2] 그러나 사실상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련군정은 모든 기관과 인력을 동원하고 수많은 정치 공작을 통해 김일성을 거의 ‘무(無)’에서 시작해 지도자로 만들어 갔고, 소련군 철수 후에도 권력을 잃지 않도록 그의 권력 기반을 다져주었다. 이에 대해 당시 일에 직접 참여했던 여러 소련군정 인사들이 후일 증언했다.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

평양의 소련군정은 당시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무명의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10][11] 해방 후 김일성이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를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진두지휘한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은 아래와 같다.[12][10]

[『김일성 외교비사』 pp.17~19]

1945년 8월 9일부터 대일전을 개시해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 제25군 군사위원(소군정 정치사령부 사령관)으로 사실상 오늘의 김일성을 만들어낸 레베데프 소련 육군소장(92년 5월 사망)은 91년 봄 가을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모두 9차례에 걸쳐 특별 인터뷰를 통해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로 양성 된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그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은 북조선 역사에 대한 양심선언”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역사를 창출했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레베데프 장군의 회고를 요약한다.

북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은 북조선 인민의 의사에 의해 추대된 것이 아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소련공산당 정치국과 스탈린의 직접적 구상에 따라 평양주둔 붉은 군대가 교육시켜 창조한 것이다. 일개 소련군 정찰부대의 대위를 일약 '김일성 장군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로 추켜세운 작업은 특정 장교의 특수임무가 아닌 평양주둔 소련군정 체제의 전반적 기구가 동원됐다. 이 작업의 총책임자는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주 당비서를 지냈고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특명을 받은 육군 중장(후에 대장 진급) 스티코프였다. 그의 지휘 아래 25 야전군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인 나와 소련 야전군 특수선동부장 중좌 코브젠코, 민정을 담당했던 소련군 육군소장 로마넨코, 그의 정치담당 보좌관 대좌 이그나치예프, 25 야전군 첩보국 책임자 육군소장 아노힌, 소련군 극동사령부 7호정치국 정치담당관 중좌 메크레르 등이 특명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소군정이 주관했던 조선신문과 라디오평양 등 선전매체를 동원했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세운 김일성대학에 소련학자 박일(朴一· 현재 카자흐 수도 알마아타 거주)을 부총장으로 앉혀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소련출생 조선인 2세 장교 15명 정도를 모스크바에서 급파해 오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한반도에 민주기지를 창설하라'는 특명수행을 위해 때로는 거칠게, 양심의 가책도 없이 철면피하게 거의 ‘무(無)’에서 지도자 김일성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붉은 군대는 3년여 동안(정확히 말하면 3년 4개월 동안) 김일성이 '위대한 수령'이 되기 위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김일성 외교비사』 pp.24~25]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와 김용범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의 증언

소련군 극동사령부 7호정치국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Григори Конович Меклер, Grigory Konovich Mekler, 1909.06.26~2006) 중좌를 인터뷰한 일본 언론인 에야 오사무 (惠谷治, 1949~2018)가 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pp.57~58]

메크레르는 소련의 정책에 따라 국내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젊은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해 정당이 아닌 대중조직 창설에 힘을 기울였다. 민주여성동맹 (11월 18일), 노동조합인 직업총동맹 (11월 3일) 결성에 이어 '민주주의 기치아래 애국청년은 단결하라'란 슬로건을 내걸고 1945년 12월에는 민주청년동맹의 모체를 결성하고 김일성이 위원장에 취임했다.

창립대회에서 연설한 것은 김일성과 메크레르 중령이었다. 이날 민주청년동맹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한 메크레르 중령은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김일성은 이 새로운 세력이 지지하는 형태로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 권력기반을 구축해 갔다. 여기에 김일성이 최고권력에 도달할 수 있었던 비밀이 있다. 이렇게 보면 김일성을 북조선의 최고권력자로 길러낸 것은 스탈린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이 직접 김일성을 면접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을 처음 증언한 것은 평양의 시민대회에서 김일성을 소개한 레베제프 소장이었다. 메크레르를 방문한 다음날 나는 레베제프의 아파트를 방문, 감추어졌던 역사를 들었다.

레오니트 바신 소좌의 증언

레오니트 바신(Леонид Тимофеевич Васин, Leonid Timofeevich Vasin, 1915~2006)은 소련군정 당시 소좌 계급으로 특수선동부장 바실리 코비젠코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당시의 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에 대한 후일 증언이 아래 신동아 기사에 나온다.

[pp.486~488]

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 만들어지고 길러지고 존재하게 된 것은 북조선 인민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 다. 그것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전인민의 수령에 의해 치밀하 게 계획된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권좌를 향한 첫 계단

김일성을 등단시켜 그를 정치지도자이자 이론가이자 수령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는 북위 38도선 이북에 조직된 모든 기관이 동원되었다. 그 기관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회 정치국 직속 대표로서 현지의 총책임자였으며 후에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한 슈티코프 테렌티 포미치 (Shtykoy Terentii Fomich) 대장, 25군 군사위원회 레베데프(Lebedev) 소장, 25군 특수선전부 부장이었으며 후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이 된 코브이젠코 바실 바실리예비치 (Kovyzhenko Vasil'. Vasil’evichi) 소령, 소련군 장교인 강 미하일이 편집장이었던 「조선신문」, 소련의 대표단이 프로그램을 짰던 평양방송,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창립되고 소비에트의 학자 박일(朴一)이 부총장으로 있던 평양의 대학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ABC 를 가르쳤던 사람이 바로 박일이었다), 소비에트 군정당국의 로마넨코 (Romanenko) 소장과 그의 정치담당직무대리 이그나토프 (Ignatov) 대령,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아노힌 (Anokhin) 소장을 대장으로 한 KGB의 軍방첩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군 특수선전부에서 부서장의 보좌관으로 일해야 했었다. 정규 편제상에서 이 부서는 전시에 적군 및 적지의 주민 가운데서 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이 부서의 활동대상은 조선의 주민과 조선의 공공조직 및 정당이었고 부서장의 판단에 따라 광범한 영역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다. 이 부서에는 14~15명의 조선출신 장교들이 있었다. 김일성 수령만들기는 거의 제로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작업은 공개적으로, 난폭하게, 거리낌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이 이루어졌다. 당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 수령만들기 작업에 관여해야 했는데, 처음 5~6개월 동안을 거의 매일, 매주 매달리다시피 했다.

후에 슈티코프대장의 기구가 확대됨에따라 우리 부서의 역할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2년 동안에 이루어진 작업으로 해서 김일성은 정치지도자뿐만 아니라 수령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평가

북한 소련군정의 목표는 스탈린 지령문에 나온대로 북한 지역에 공산 국가를 건립하고, 소련이 5년간 88여단에서 훈련시켜 데려온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는 진지첸 (김일성) 대위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역할을 할 지도자로 내세워 그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다져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지역의 민족 세력이나 기독교 세력의 정치 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이들 중 상당수가 월남하게 된다. 이후 북한 주민들은 소련이 만들어놓은 지도자 김일성을 바꾸기는 불가능했다.

소련군정이 만들어 놓은 김일성 체제는 스탈린 사후 중소이념분쟁을 이용해 소련의 절대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김일성 유일체제로 되고, 종국에는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유례가 없는 김일성 일족 세습전제왕조로 퇴보한다.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일족 수령 한 사람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노예로 전락한 것도 소련군정이 북한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만들어 놓은 체제와 지도자의 후유증이다.

오늘날 북한의 김일성 왕조는 스탈린이 낳은 사생아에 불과하며, 지구상에 아직도 남아있는 유일한 스탈린의 잔재이다.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차라리 대북전단 보내 北해방은 소련이라고 알려줘라"
태 의원은 "우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직시한다면 소련군이나 미군은 다 같이 해방군이자 점령군이였다고 볼 수 있다"며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가 필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점령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 지금에 와서 역사를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소련군이나 미군의 공식 문서들에 한반도 주둔 성격을 어떻게 표현했든 미군보다는 소련군이 더 점령군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며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 등 소련군 내 조선인들의 군복을 벗기고 사민복을 입혀 당과 군대 국가건설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태 의원은 "이것은 1948년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수립된 사민 정권과는 대조를 이룬다"며 "2차 대전 후 소련군이 많은 나라들에 진주했지만 북한처럼 소련군 내 장교들과 사병들을 제대시켜 정권의 핵심 인사로 임명하는 식으로 정권을 세운 나라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한에 사민 정권이 수립되도록 도와준 미군이 해방군이냐"며 "아니면 북한에 소련군 출신들의 군사정권을 세운 소련군이 해방군이냐"고 반문했다.

태 의원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 우리 정부 내각에 미군 출신 인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며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해방군, 남한에 들어온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고 했다.

미 국무부의 소련 군정에 대한 평가

아래 1948년 7월 2일 작성한 미국무부 문서에 소련이 만들어 놓은 북한의 정부구조에 대해 나온다. 소련이 선출되지 않는 소수에 의해 장악된 공산독재 체제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Structure of North Korean Government : July 2, 1948 (Department of State / Division of Research for far East /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아래는 위 미국무부 문서의 요약이다.

SUMMAEY OF CONTENTS

Structure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The governmental structure in North Korea is the result of Soviet manipulations of an originally confused situation to fit the Soviet plans for total Communist domination and elimination of all political opposition. The scattered local people's committees that arose concurrently with the disintegration of Japanese authority before the surrender have been enlarged, stripped of their autonomy, purged of non-Communists, and brought under an all-powerful central government. Within the central government, complete power is in the hands of the five member governing committee of the Central People's Committee - the executive arm of government. Although popular bodies and assemblies have been placed strategically throughout the system to give the appearance of representative government, they have no real power. None of the key positions of the central government are popularly elective, and this arrangement, combined with a biased local electoral system that effectively eliminates political opposition in local government, serves to entrench the Communist oligarchy in power.

참고 자료

  • 소련 군정 핵심 인물인 스티코프의 일기와 레베데프의 비망록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의 제주 4.3 자료집 - 비망록 번역문 전문을 볼 수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pdf
쉬띄꼬프 일기.pdf
쉬띄꼬프일기 해외사료총서 10권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48년 남북정치협상은 소(蘇)각본 - 소(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국토통일원, 1983 (복간본) -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판형을 바꿈.
  • Pauley 보고서 : 1946년 6월 -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점령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허락을 얻어 1946년 5월 29일 ~ 6월 4일 기간 북한 지역을 돌아보고 미국 대통령에 올린 보고서
Edwin Wendell Pauley, Report on Japanese Assets in Soviet-occupied Korea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s States June, 1946.
Edwin Wendell Pauley, Report on Japanese Assets in Manchuria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s States July, 1946.
Press Conferences, May 1946 -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 : Pauley 방한 당시 서울에서의 기자회견, 신문기사 등
일본이 8월 7일에만 항복했어도 분할 피할 수 있었다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②] 미·소 점령군, 통치권력으로 자리 잡다 신동아 2020년 9월호
해방 직후 약 3개월의 상황 : 이미 드러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이해 충돌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③]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신동아 2020년 10월호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④] 美대표단, ‘모스크바 3상회의’서 소련 계략에 말려들다 신동아 2020년 11월호
모스크바의정서 주역은 노회한 몰로토프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⑤] ‘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신동아 2020년 12월호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⑥·끝] 북한은 스탈린의 주도와 후원 아래 건국된 국가 2021년 1월호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이반 코발렌코의 증언
  2. 2.0 2.1 2.2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3. [이재호 칼럼] 歷史변조와 좌편향 史觀 동아일보 2008-10-13
  4.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5.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6.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7.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8. Nikolai Bulganin (1895~1975) Wikipedia
  9. 안드레이 란코프 (엮음) 지음, 전현수 옮김, 『소련공산당과 북한 문제 :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정서(1945∼1952)』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년 08월 20일
  10. 10.0 10.1 박길용, 김국후 저, 『김일성 외교비사』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1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 84~90.
  12. 박길용, 김국후 저, 『김일성 외교비사』 (중앙일보사, 1994) pp.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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