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12-27에 발표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한반도에 관한 결정문. 북한의 1950년판 조선중앙년감에 실린 것으로 러시아어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보임.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는 2차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의 외무상이 1945년 12월 16 ~ 26일간에 모스크바에서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가진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에 대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의 신탁통치 방안이 결정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열리기까지

2차 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 7월 전승국 수뇌들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고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외무장관 협의체(Council of Foreign Ministers)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여러 차례 외무상 회의를 열게 된다. 제1차 회의는 1945년 9월 11일 ~ 10월 2일 간에 영국 런던에서 열렸으나 여기서는 한국 문제는 토의되지 않았다. 제2차 회의가 1945년 12월 16 ~ 26일간에 모스크바에서 열리게 된다. 미국의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 영국의 베빈(Ernest Bevin) 외무상, 소련의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상이 참석하였으며, 12월 27일에 발표된 합의문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들어 있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 진영 모두 반탁을 주장하다 좌익진영은 1946년 1월 2일부터 찬탁으로 태도를 돌변하여 정국은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합의문의 한국 관련 부분

모스크바 삼상회의 합의문에서 한국 관련 부분은 아래와 같다.[1][2]

영국, 소련, 미국 외상의 모스크바 회의 결정서

III. 한국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3.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3]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 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제출되겠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 원문

Communique Issued at the Moscow Conference of the Foreign Ministers of the United Kingdom,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December 27, 1945

III. KOREA

  1. With a view to the re-establishment of Korea as an independent state, the creation of conditions for developing the country on democratic principles and the earliest possible liquidation of the disastrous results of the protracted Japanese domination in Korea, there shall be set up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which shall take all the necessary steps for developing the industry, transport and agriculture of Korea and the national culture of the Korean people.
  2. In order to assist the formation of a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 and with a view- to the preliminary elaboration of the appropriate measures, there shall be established a Joint Commission consisting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command in southern Korea and the Soviet command in northern Korea. In preparing their proposals the Commission shall consult with the Korean democratic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The recommendations worked out by the Commission shall be presented for the consideration of the Government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China,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prior to final decision by the two Governments represented on the Joint Commission
  3. It shall be the task of the Joint Commission, with the participation of the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and of the Korean democratic organizations to work out measures also for helping and assisting (trusteeship)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progress of the Korean people, the development of democratic selfgovern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 The proposals of the Joint Commission shall be submitted, following consultation with the provisional Korean Government for the joint consideration of the Governments of the United States,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nited Kingdom and China for the working out of an agreement concerning a four-power trusteeship of Korea for a period of up to five years.
  4. For the consideration of urgent problems affecting both southern and northern Korea and for the elaboration of measures establishing permanent coordination in administrative-economic matters between the United States command in southern Korea and the Soviet command in northern Korea, a conference of the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and Soviet commands in Korea shall be convened within a period of two weeks.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는 과정

흔히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처음 거론되고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독립과 함께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하는 방안은 카이로 선언 1년여 전인 1942년 12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구상하고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도 협의한 것이 시초이다[4][5]. 이후로도 미국을 중심으로 각국 수뇌들이 협의하여 1945년 초에는 루즈벨트, 스탈린, 장개석 사이에 대체로 합의에 도달해 있었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는 이를 최종적으로 구체화 한 것에 불과하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전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거론되는 자료들은 아래에 있다.

삼상회의 이후의 사태 진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이나, 소련은 미ㆍ영ㆍ소ㆍ중 4개국이 참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이 1/4 로 줄어드는 신탁통치보다는 자신들이 비토권을 가진 신탁통치 전단계의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 더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삼상회의의 결의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격렬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남한의 좌파들도 반탁 일색이었으나 소련의 개입으로 1946년 1월 2일부터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서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가 대립하는 혼란상이 벌어졌다. 이것이 소련이 실제로는 신탁통치에 뜻이 없으면서도 그 안에 동의한 이유일 것이다.

소련은 1946년 1월 5일 신탁통치에 찬성하라는 요구를 완강히 거절한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2월 8일에 사실상의 북한 임시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고 3월 5일에는 토지개혁까지 단행하였다. 이런 일들이 소련의 속셈은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자신들의 영향권하에 있는 좌파주도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을 기도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1946년 3월 소련이 승인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하려던 '조선 통일 민주 정부' 구성원 목록에는 수상은 여운형, 부수상은 김규식, 군무상(軍務相) 김일성 등으로 되어 있었다.[6] 우파 지도자 이승만, 김구, 조만식 등은 배제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하는 소련의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처음부터 북한 지역에 자신들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나아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남북한 단일의 좌파 정권을 세워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신탁통치안을 두고 남한에 찬반 투쟁이 벌어져 혼란이 일어나도록 조장하는 것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안에 동의한 소련의 속셈이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은 삼상회의 결의안을 통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혼란만 겪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결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갈 수 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오보 논란

국내 신문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UP나 AP 기사를 인용보도했는데, 정확한 내용이 아니라서 오보 논란을 빚었다.

당시의 AP 기사는 보존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UP와 AP의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오보 배경

모스크바 3상회의와 관련한 국내신문들의 오보는 UP와 AP의 기사를 받아 쓴 때문에 발생한 것이 분명하지만, 미국 통신사들이 오보를 낸 배경을 정용욱은 마치 미국의 정보 공작 또는 음모가 개입된 것처럼 주장한다.

정확한 오보의 배경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는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나돌던 소식들과 실제 회의의 결정이 달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회의에 참석한 당시 미 국무장관 James F. Byrnes(1882~1972)는 1944년 대선 때 루스벨트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대상에 올랐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해리 트루먼이 선택되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선되자 취임 직후 작고하는 바람에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번즈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번한 것을 트루먼에게 빼앗겼다고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트루먼은 번즈를 국무장관에 임명했지만 그는 중요한 사안을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나중에 알게되는 일이 자주 있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불편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당시도 그러했는데 트루먼은 회의가 끝난 후에야 보고를 받고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 문제도 워싱턴 정가의 관측과 달리 번즈의 독단적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미국 통신사들이 오보를 낸 배경으로 보인다. 오보는 미국의 정보공작 때문이 아니라 정치권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United States Delegation Minutes, First Formal Session,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Spiridonovka, Moscow, December 16, 1945, 5:00–7:10 p.m.
United States Delegation Minutes of the Seventh Formal Session of the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Spiridonovka, Moscow, December 26, 1945, 11 p.m.
The Ambassador in the Soviet Union (Harriman) to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Moscow, December 27, 1945 : COMMUNIQUÉ ON THE MOSCOW CONFERENCE OF THE THREE FOREIGN MINISTERS

전승국 외무장관 협의체(Council of Foreign Ministers)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The Ambassador in the Soviet Union (Harriman) to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Moscow, December 27, 1945 : COMMUNIQUÉ ON THE MOSCOW CONFERENCE OF THE THREE FOREIGN MINISTERS
  2.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에 대한 모스크바3국 외상회의 결정서" 우리 역사넷에서 2019년 9월 30일에 확인
  3. 러시아어 본에는 '후견(tutelage)'이라는 의미의 '오뾰까(опека)'로 되어있다.
  4. "미국, 1942년부터 한국신탁통치 계획" 美 현대사 연구가 문헌 발굴 중앙일보 뉴시스 2015.11.26
  5. General wartime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with emphasis on China’s military position and United States efforts to give military assistance to China
    [158] Draft of Letter From Mr. Owen Lattimore to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undated (1942.12.24?)
  6. "소련, 김일성을 임시 지도자로 임명했을 수도" 연합뉴스 2018-11-06;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김일성 이전의 북한》, (한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