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욱(鄭容郁, 1960 ~ )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다. 서울대가 한국현대사 전공 교수로는 처음으로 임용했다고 한다.

약력

1986.09.~1997.05.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1988.05.~1990.06. 역사비평 편집위원
1991.07.~1992.12. 하바드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객원연구원
1993.07.~1996.06. 역사와현실 편집위원
1996.09.~ 현 재 국사편찬위원회 현대사 자문위원
1997.06.~2003.0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교수, 부교수
2001.07.~2002.07. 하바드-옌칭연구소 객원교수
2003.09.~ 현 재 서울대학교 조교수, 부교수, 교수
2006.07.~2008.06. 역사와현실 편집위원
2010.01.~2011.02.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
2014.01.~2014.12. 한국역사연구회 부회장
2015.01.~2015.12.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2017.03.~2018.02.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 객원교수

신탁통치 정국에 대한 무리한 주장들

정용욱은 해방정국의 남북 문제에서 모든 나쁜 책임은 미군정이승만에게 돌리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래 글에 미군정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떤지 잘 드러난다.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 때문에 남북분단이 된 것처럼 말하며 소련과 김일성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는다. 반탁운동도 미군정의 정보조작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주장한다.

미군정은 여러가지 잘못도 있기는 하지만 어찌됐던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한반도 수천년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인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정용욱이 전혀 평가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좌경적 역사관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낸 정용욱 교수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도 많다. 미군정은 정보 조작을 통해 반탁운동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하지는 1946년 12월 이승만(李承晩)의 도미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유했다는 것. 또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지는 ‘실패한 정치가’였습니다. 한국인들과의 상호 이해나 친선교류보다는 일방적 점령통치로 일관해 훨씬 우호적일 수 있었던 길을 포기했고, 결과적으로 분단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죠.”

미군정이 정보 조작을 통해 반탁운동을 유도했다는 건 정용욱의 엉터리 연구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 미군정은 찬탁, 반탁 운동을 다 허용했지만 소련이 반탁은 불허하고 찬탁만 허용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련은 1946년 1월 2일 김일성, 김두봉 등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였고, 일체의 반탁운동을 불허했다. 2월 8일에는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 북한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까지 출범시키고 3월에는 토지개혁까지 단행하면서, 남한에는 찬탁, 반탁 대립의 혼란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여 신탁통치 논란의 최대 수혜자는 소련과 김일성이다.

남북분단의 씨앗은 미국이 뿌린게 아니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도 하기 전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토지개혁까지 단행한 소련이 뿌린 것이다. 이것은 남한마저 공산화를 수용하지 않는 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시발점이다.

이승만은 도미했다 미국의 귀국 방해로 억류될 뻔했고, 귀국 후에도 한때 가택연금도 당했다. 미군정은 줄곧 이승만김구는 배척하고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 정부를 시도했다. 그러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서 UN 감시하의 총선거 방식으로 결정하는데, 김규식마저 김구와 함께 이에 반대하면서 결국 이승만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미군정이 이승만을 멀리하려 한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Rhee Syngman, the most ardent exponent of the anti-Soviet and antiCommunist feeling of the Right, had been consistently ignored by the Military Government since his removal from the chairmanship of the 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in March 1946, because of his personal recalcitrance and intense hatred of Soviet Communism. The Democratic Council then replaced Rhee with the moderate Rightist, Kim Kiu Sik, at the instance of US officials who were trying to clear the air for the Joint Commission meeting. After the deposition of Rhee the extreme Right continued to campaign for immediate independence and against trusteeship, but it was not until recently that this campaign turned against the US Military Government.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국내의 오보에 대한 정용욱의 무리한 주장들

국내신문을이 1945년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보도를 하면서,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으나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잘못 보도되었다. 이는 미국에 특파원을 둘 형편이 되지 않았던 국내언론사들이 AP와 UP등 미국통신사들이 보내온 기사를 인용보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용욱은 이러한 오보의 배경에 대해 확인되지 않는 무리한 추측을 남발하며, 미국이 마치 국내의 반탁운동을 유발하기 위해 정보조작을 한 것처럼 몰아간다.

미군정은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성, 반대 운동을 모두 허용한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안이 미국의 안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북한에는 찬탁만 허용하고 반탁운동은 철저히 봉쇄했으며, 남한의 좌익들도 처음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려세웠다. 미군정소련 군정이 취한 대응을 보면 오보를 사실로 보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다.

국내에 반탁 운동의 열기를 몰고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상 회의 한국 관련 내용에 대한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의 1945년 12월 27일자 머리기사이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월 28일 오후 6시이므로 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 그러니까 주한 미군 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발표된 이른바 관측 보도이다.
〔사료 3-2-01〕 1945년 12월 27일자 신문 기사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 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농후해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 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 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훈령을 받았다고 하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미국이 ‘카이로 선언’에 따라 조선은 국민 투표로써 그 정부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것에 비하여,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 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출처: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의 내용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이른바 왜곡 보도이다. 이 기사는 반탁 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모스크바 삼상 회의와 그 결정 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 태도와 그 방향을 결정하였다. 당시 외신을 취급하던 국내 주요 통신사로는 합동 통신(合同通信)과 조선 통신(朝鮮通信)이 있었다. 합동 통신(KPP, Korean Pacific Press)은 우익 성향이었고, 외신 제휴사는 AP(Associated Press) 통신이었다. 조선 통신의 외신 제휴사는 UP(United Press) 통신이었다. 조선 통신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빨리 보도하지 않았다 하여 좌경사(左傾社)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결정이 국내로 처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국제적 모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후 일부 연구자들은 배후가 있었거나 최소한 당시 언론 기관을 통제하던 미국의 고의적인 ‘방조’가 있었을 것으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정황적 근거에 입각한 주장 차원에 머물고 말았지만, 최소한 기사의 출처와 취재⋅전달 과정을 추적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이 의혹을 해명하는 것은 미소 공위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와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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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동아 일보』 오보 기사의 출처와 국내 전파 과정을 미국 측 문헌을 통하여 정리하면,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대한 오보가 국내에 전달된 직후 미 군정청 공보부 정보 보고서 「정계 동향」이 오보의 국내 전파자로 합동 통신사를 지목하였고, 이후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관의 한 명으로 보이는 「신탁 통치」 집필자가 ‘비공식’이라는 전제를 달아서 『성조기』를 오보의 출처로 지목하였다. ‘성조기’는 미 육군이 해외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위해 발행하는 군인 신문이다.

『동아 일보』 27일자 기사의 출처가 국제 통신사가 아니라 『성조기』였다는 지적은 이 오보 소동이 모략이었다면 그 모략의 주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동아 일보』 오보를 모략이라고 주장했던 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오성은 이를 “국제적 통신 기관이 오랫동안 준비하여 착수한 모략”이라고 주장하였고, 또 다른 인물인 강대호는 “일 통신 기자의 모략적 관측 보도”라고 명명했지만 만약 기사의 출처가 ’성조기’라면 모략의 주체가 ‘일 통신 기자’나 ‘국제적 통신 기관’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 관한 ‘조선에 관한 결정’이라는 기사는 발신지가 워싱턴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그 취재원은 일본이 틀림없다. 미 군정 보고서 「신탁 통치」는 기사 출처로 『성조기』를 지목하였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기사의 출처는 태평양 방면 미국 군인들을 위하여 일간으로 발행하던 『태평양 성조기(Pacific Stars and Stripes)』 12월 27일자였다.

보통 외국 통신사가 보내 오는 외신 기사는 ‘발신지, 보도일자, 발신사, 수신사’를 밝히는 것이 관행인데, 합동 통신사가 발신사를 밝히지 못한 것은 이 기사를 워싱턴의 통신사로부터 수신한 것이 아니라 『태평양 성조기』에서 2차적으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아 일보 기사는 ‘워싱턴 25일발’로 되어 있고 발신지를 워싱턴처럼 보도하였으나, 발신사나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다.

정용욱은 국내의 많은 신문들이 같은 날 유사한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음에도 유독 동아일보를 오보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동아일보의 오보가 국내에 반소감정과 함께 거센 반탁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아일보가 기사 말미에 합동통신으로부터 받은 워싱턴발 기사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출처는 미군들을 위한 신문인 일본에서 간행되던 태평양판 성조지(星條紙, 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사라고 하면서 미국 정부의 대단한 음모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렇게 미국의 여론 동향과는 동떨어진 기사가 집필된 의도는 무엇이고, 만약 의도적인 왜곡 기사였다면 왜곡의 주체는 누구일까? 기사의 정확한 출처를 알아 보기 위해서는 랄프 헤인젠이 워싱턴 D.C에서 UP 통신을 통하여 이 기사를 실제로 내보냈는지 확인해야 하지만, UP 통신의 후신인 UPI 통신의 기록관에는 랄프 헤인젠의 송고 기사가 남아 있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사의 집필자는 랄프 헤인젠일 수도 있고, 『태평양 성조기』 측일 수도 있다. 이 기사가 포함된 『태평양 성조기』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관련 기사는 외신 종합이라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한국 관련 내용만 필자를 밝혀 놓았다. 이 기사는 『태평양 성조기』 편집부 또는 그 신문의 어느 기자가 랄프 헤인젠의 기사를 포함한 삼상 회의 관련 외신 기사들을 짜깁기하여 집필한 것이 된다. 이 과정에서 랄프 헤인젠의 이름이 도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합동통신은 AP 통신사와 기사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문제의 AP 기사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같은날 UP 기사는 남아있는데, 내용은 동아일보의 보도와 똑같다. 따라서 동아일보가 합동통신으로부터 받은 기사가 아닌 성조지 기사를 보고 썼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도 없다. 성조지 기사가 동아일보 기사와 유사한 이유는 역시 UP나 AP 기사를 받아썼기 때문이지 미국 정부나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 또는 한국의 미군정이 개입하여 그런 기사를 냈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정용욱은 이 기사를 못 찾아서 보지 못 했다. AP 기사도 이와 유사했을 것이다.

이 기사에도 보듯이 작성자의 이름은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동아일보 기사에 작성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문제삼는 것도 무리하다. 동아일보와 같은 내용의 기사는 같은 날 국내 여러 신문들도 보도했으므로 동아일보만 음모론적 시각으로 보는 것도 근거없다. 태평양 성조지도 이런 UP나 AP 기사를 받아 쓴 것에 불과한데도 마치 태평양 성조지가 의도적인 오보를 만들어내고, 국내신문들이 이를 받아 쓴 것처럼 검증되지도 않는 무리한 추측을 남발하며 음모론으로 몰아가는 것은 학자로서의 양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충격적인 뉴스는 12월 27일자 도하신문에 일제히 크게 보도되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면 제호 옆에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이라는 내리닫이 사설과 함께 4단 머리기사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자유신문(自由新聞)』, 『신조선보(新朝鮮報)』 등은 1면 머리기사로, 『서울신문』과 『중앙신문(中央新聞)』 등은 1면 중간 톱이나 2단박스기사로 다루었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민주중보(民主衆報)』도 같은 기사를 3단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전국 중요도시의 신문들이 대부분 이 합동통신 기사를 크게 다루었을 것이 틀림없다. 좌익신문들은 좌익정당들의 압력으로 조선통신이 UP통신 기사 배포를 보류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의 사장 홍증식(洪增植)은 중대한 기사를 임의로 보도했다고 합동통신에 항의하기까지 했다. 좌익정당들이 이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이 국민들의 큰 반발을 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의 파장이 얼마나 컸던가는 하지 사령관이 군정청의 보도부장을 합동통신사로 보내어 AP통신 원문을 요구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6) UP통신 기사는 12월 26일자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The Washington Times Herald)』에도 실렸고,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던 『스타즈 엔드 스트라이프스(The Stars and Stripes)』 태평양판은 12월 27일자에 AP와 UP의 기사를 종합해서 보도했다.7)

6) 『合同通信三十年』, 合同通信社, 1975, p. 12.
7) 『東友』(동아일보 사보), 2005, 2. 3,「‘음해’ 바로잡을 史實 드러나」.

이런 오보가 반소감정의 폭발과 거센 반탁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도 무리이다. 반탁운동은 신탁통치안 자체에 대한 반대이지 그것을 주장한 쪽이 어느 나라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3상회의 이전에도 1945년 10월경부터 미국쪽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발언들이 전해지고 있었고, 그때마다 국내의 여러 인사들은 반대의견을 내고 있었다.

또 처음의 반탁운동은 소련보다는 미군정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나타난 것도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가 반탁운동을 촉발시켰다는 주장이 근거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진우는 반탁은 하되 미군정과 대립해서는 안된다는 발언을 한 때문에 암살 당했다. 김구는 미군정에 대한 불복종과 쿠데타까지 시도하다 국외추방하겠다는 미군정의 강력한 경고를 받고 물러섰다.[1] 좌익들도 처음에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는데 이들이 기사를 보고 반소감정이 일어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초기 반탁운동은 신탁통치 자체에 대한 반대였고, 반소가 아닌 미군정에 대한 저항에 가까웠다. 오보가 반소감정을 폭발시켰다면 서울의 소련영사관이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관한 첫보도는 오보가 맞기는 하지만, 이후 정국에서 미군정은 찬탁, 반탁 운동을 모두 허용한 반면에 북한의 소련 군정은 찬탁만 허용하고, 일체의 반탁 운동을 불허했고, 이후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남한의 반탁인사들의 참여를 반대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신탁통치는 소련의 안인 것처럼 보도된 것이 딱히 오보라고 하기도 어렵다. 소련은 신탁통치가 미국의 안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왜 그 미국의 안에 일체의 반대도 허용하지 않고 찬성만 강요했는가? 소련은 표면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이 1/2 에서 1/4로 감소되어 오히려 불리해지는 4개국 신탁통치안에 대해 찬성만 강요한 것은 진심으로 이를 실현할려고 한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좌익들이 1945년 말에는 강한 반탁이었다가, 1946년 벽두부터 갑자기 찬탁으로 선회한 것도 소련의 의사를 따른 것이다. 이처럼 소련이 신탁통치는 미국의 안이라 주장하면서도 이의 실현에 미국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은 신탁안 자체의 실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소련은 반탁을 고집한다는 빌미로 북한의 조만식 등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일체의 반탁운동을 불허한다. 이어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토지개혁까지 단행하는 한 편, 남한에는 찬탁과 반탁 세력의 대립으로 혼란을 조성하는데에도 성공하였다. 이처럼 소련은 신탁통치안을 실제로 실현할 의사는 없으면서도 이를 표면에 내세워 적절히 활용하여 신탁통치 정국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정용욱의 주장에 대한 반박

  • 《[서평] 잘 정리된 새로운 시각의 한국현대사 입문서 : 차하순 외 지음, 『한국현대사』, 세종연구원, 2013.》, 시대정신 2013년 여름호
소련은 한반도에서 자신의 발언권이 4분의 1에 불과한 4개국 신탁통치보다는 한반도의 북반부에 단독 정권을 수립하는 데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이것은 네덜란드 학자 에릭 반 리(Erik van Ree)가 지적한 스탈린의 ‘1지역 사회주의(Socialism in One Zone)’ 전략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한다.
소련의 의도는 처음부터 북한 분할 통치. 신탁통치안은 속임수에 불과.

UP와 AP의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오보 배경

모스크바 3상회의와 관련한 국내신문들의 오보는 UP와 AP의 기사를 받아 쓴 때문에 발생한 것이 분명하지만, 미국 통신사들이 오보를 낸 배경을 정용욱은 마치 미국의 음모가 개입된 것처럼 주장한다.

정확한 오보의 배경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는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나돌던 소식들과 실제 회의의 결정이 달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회의에 참석한 당시 미 국무장관 James F. Byrnes(1882~1972)는 1944년 대선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부통령 Wallace를 대체할 러닝메이트를 고를 때 대상에 올랐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해리 트루먼을 선택하였고, 당선되자 취임 직후 작고하는 바람에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번즈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번한 것을 트루먼에게 빼앗겼다고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트루먼은 번즈를 국무장관에 임명했지만 그는 중요한 사안을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나중에 보고받는 일이 자주 있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불편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당시도 그러했는데 트루먼은 회의가 끝난 후에야 보고를 받고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 문제도 워싱턴 정가의 관측과 달리 번즈의 독단적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미국 통신사들이 오보를 낸 배경으로 보인다. 오보는 미국의 정보공작 때문이 아니라 정치권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에 대한 엉터리 주장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은 그가 1946년 1월 5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소련 1개국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한 발언이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VOA의 한국어 방송임)을 통해 국내로 전해지면서 이의 사실여부를 두고 일어난 공방을 말한다. 이 사건은 당시 여러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박헌영이 실제로 한 발언이 맞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박헌영이 이런 발언을 하지 않았는데도 미군정과 기사를 쓴 뉴욕타임스의 존스턴기자가 음모를 꾸며서 박헌영을 궁지에 몰아넣은 사건으로 만들어져 있다.

정용욱은 여러 글에서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에 대한 엉터리 주장을 내놓았다. 제대로 사료 조사도 하지 않은채 남들의 엉터리 선행 연구를 따라가다 보니 더 엉터리 연구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이나 당시 우익들이 허위사실로 박헌영을 탄압하기 위한 정보공작을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좌파 학자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음모론으로 미군정과 당시 반탁세력을 공격하고 박헌영을 억울한 희생양인 것처럼 옹호하는 여론공작을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방송함으로써 이 회견 내용에 잠잠하던 국내 언론을 자극하였고, 국내 우익 계열 신문들은 이 기사를 산사태처럼 쏟아 냈다.1) 신문들은 존스턴의 논조를 확대 과장함으로써 박헌영과 공산당에 대한 비난을 강화했고, 박헌영의 정적들은 그의 목에 30만 엔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박헌영의 신망은 이 사건으로 몹시 손상되었다. 그는 좌익들 사이에서까지 구제 불능의 친소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턴은 박헌영을 다시 만났을 때, 이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정정은 뉴욕 타임즈에 요청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기사의 게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정을 이용하여 그의 윤색된 기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또 그 책임을 천연덕스럽게 뉴욕 타임즈 본사로 미루었다. 그리고 하지 및 주한 미군 사령부 정보부와 공보부는, 막상 기자 회견 직후 국내 보도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기사를 열흘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윤색된 내용 그대로를 국내에 보급,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그 기사가 국내 여론에 미치는 파장을 지켜보았다.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실이 편찬한 『주한 미군사』는 존스턴 기자 회견이 “(미 군정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 관계를 끝맺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고 서술했으나 사실은 존스턴이 박헌영과의 회견을 왜곡하고, 미 군정이 재차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를 널리 유포함으로써 공산당은 소련의 괴뢰라는 인식을 확산한 것이다. 미 군정과 존스턴은 『뉴욕 타임즈』의 권위를 빌려 정작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그 기사가 국내에 확산되는 데에는 정체 불명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큰 역할을 했다.

방선주[11]는 이 사건을 미국 신문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의도적 오보’가 작용한 것으로, 또 한국인들의 반탁 운동으로 곤욕을 치르던 미 군정이 묘수(妙手)를 부린 것으로 평가했다. 이 기술은 사건의 배경과 의도를 정확히 지적했지만, 한편으로 미 군정은 반탁 운동의 정치적 효과를 만끽했고, 반탁 운동의 수혜자였다는 점을 간과했다. 공산당이 반탁 입장에서 삼상 회의 결정 지지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소련의 입김이 작용했고, 2) 이러한 방향 선회를 주시하던 미 군정은 박헌영-존스턴 회견을 여론 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내의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그 정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이 국내에 전달될 때에도, 통신 기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신 기사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발이었다.
서울대 교수라는 사람이 뉴욕타임스 기사는 찾아보지도 않고, 남들의 주장을 따라 존스턴의 기사는 없는 것이라 단정하고, 당시 한국에서 청취 가능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파로 송출하는 VOA(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서울중앙방송이 수신하여 중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기초적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중심, 2003년 08월 05일) pp. 72~73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정용욱의 엉터리 연구를 사실로 알고 잘못 인용한 사례

각주

  1.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2. 蘇聯(소련)은 信託統治主張(신탁통치주장) 蘇聯(소련)의 口實(구실)은 三八線分割占領(삼팔선분할점령) 米國(미국)은 即時獨立主張(즉시독립주장) 1945.12.27 동아일보 1면
  3. 朝鮮(조선)의 自主獨立(자주독립)은 어데로 / 獨立信託論對立(독립신탁론대립)? / 美國(미국)은 即時獨立(즉시독립)을 主張(주장) 1945.12.27 조선일보 1면
  4.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5. 朝鮮問題表面化, 蘇聯은 信託統治說, 美國은 即時獨立을 主張, 注目되는 三國外相會議 신조선보[新朝鮮報] 1945년 12월 27일 1면 1단
  6. 蘇聯은 信託統治, 美國은 卽時獨立主張, 公約바든 朝鮮獨立鐵壁이 가저온 悲哀 중앙신문[中央新聞] 1945년 12월 27일 1면 5단
  7. D-storyⅡ 6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보도가 조작? (1)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5월 - 7 - 2012
  8. 정용욱,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한겨레 2019-06-08
  9. 반탁운동, ‘동아’ 오보가 없었다면 한겨레 21 2010-01-27
  10. 남북분단 씨앗은 동아일보 기사였다 미디어 오늘 2017.04.21
  11. 방선주(方善柱, 1933~ ),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p. 184~188 의 『A. Johnston 記者의 朴憲永 發言 ‘誤引’ 事件』
  12.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으로부터 국어방송(國語放送) 중계(中繼) 1945-12-02 영남일보(嶺南日報) 2면
  13. 라디오 신조선보[新朝鮮報] 1946년 01월 16일 2면8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