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이란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이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합의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국내 언론 보도와는 달리 뒤늦게 전해진 외신보도는 그가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여 이 때문에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사건의 개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은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 회견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국내 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박헌영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며 반탁진영을 비난했다는 발언 요지가 실렸다.[1][2][3][4][5] 좌파 진영은 연말의 반탁 입장에서[6] 새해 벽두에 찬탁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7][8]. 그런데, 1월 15일 아침 청취된 샌프란시스코(桑港) 방송[9]에서 뉴욕타임즈(NYT)에 보도된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1910~1986)[10] 기자의 서울발 기사를 인용하여 "박헌영이 인터뷰에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나아가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는 보도를 하여, 이에 격분한 사람들과 정당, 단체들이 박헌영 측에 거세게 항의하고 비난하는 파문이 일어났다.[11][12]

이에 1월 17일 박헌영조선공산당은 기자회견에서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며, 명백한 오보이고 사실무근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13][14][15],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기자들도 박헌영이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16] 그래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항의와 비난은 그치지 않았으므로, 조선공산당은 1월 26일에 책임비서 박헌영의 명의로 미군정청에 문제의 기사를 쓴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달라는 공문서를 접수시킨다.

사태를 주시하면서도 민간의 일이라 직접 개입하지는 않고 있던 군정청은 불가피하게 진상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그 결과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2월 18일 발표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은 이로서 종결되었지만, 조선공산당은 한 차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17], 한민당 등은 박헌영의 매국적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며 공격하는 등[18] 한동안 여진이 계속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들에 묻히게 된다. 이 사건은 남한에서 박헌영의 입지를 좁히고,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찾아낸 일부의 당시 신문 기사와 미군정청 문서를 토대로 존스턴의 기사는 오보이며, 미군정이 오보인 줄 알면서도 은폐하고 조작된 조사 결과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또 뉴욕 타임즈의 문제의 기사를 찾는데 실패하고는 그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단정하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조작해서 있는 것처럼 인용하여 보도했으므로 여기에는 미군정청과 존스턴 기자의 음모가 개입되었다고 우긴다. 학계와 일반에는 이것이 널리 사실로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 "박헌영 존스턴"으로 검색해 보면 온통 이런 식의 주장만 나오고, 이에 대한 반박 글은 거의 전무하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당시의 주요 문헌들을 보면 이런 주장은 성급한 판단으로 잘못된 것이고, 당시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가 맞다는 것이 재차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대로 미군정청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하여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박헌영이 국내 기자 회견에서와는 달리 외신 회견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문제의 뉴욕타임스 기사 뿐만 아니라 UP의 기사에서도 확인되므로, 이는 사실임이 분명하다. 논란이 일 것이 뻔한 발언을 외신에서만 한 것은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한 대소용(對蘇用) 발언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지도자 경쟁에 사활을 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소련에 잘 보여야할 이유가 많았고, 그러한 발언이 외신을 통해 국내가 아닌 소련측에만 전달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박헌영이 소련측에 지도자 김일성에 대해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1946년 7월초 스탈린이 박헌영과 김일성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는 것이 이런 것을 뒷받침한다.[19] 박헌영은 표면적으로는 김일성 지도자에 찬성하는 것처럼 발언하고 다녔지만[20][21] 속으로는 소련이 조선공산당 당수인 자신을 지도자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어떻게든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되고싶어했다.

새로운 자료로 밝혀진 사건의 진상

새로 발굴된 자료들까지 검토하여 사건의 진상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거론된 모든 자료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의 원문 이미지임.)
  • 1946년 1월 5일의 박헌영 내외신 기자 회견은 내신과 외신 구분하여 따로 열렸으며, 11시에 시작한 외신 회견이 끝나고 나서 내신 회견은 따로 진행하였다.[1][2][22] 외신회견에서는 박헌영 본인도 영어로 문답하였다. 따라서 국내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 및 이를 근거로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판단한 미군정청 일부 인사들의 기록이[23] 외신 보도가 실제 오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들도 내외신 회견이 동시에 열린 줄로 잘못 알고 대다수 국내 신문 기사와 다른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오판한 것이지, 조사 이전에 실제의 진상을 알 방법은 없었다. 2월 18일 미군정청의 공식적인 조사 발표 후에는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기록을 남긴 군정청 인사는 아무도 없다.
후대의 연구자들도 박헌영의 내신과 외신 기자회견이 같이 열린 줄로 잘못 알고 국내 신문 보도와 다른 존스턴의 뉴욕타임즈 기사가 오보라고 단정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내용의 존스턴의 기사는 뉴욕타임스에 실린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존스턴의 기사는 1월 10일자 뉴욕타임스에 실제로 실렸고, 국내 신문기사는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UP 통신도 뉴욕타임즈와 같은 내용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동아일보 1946-01-17 1면 "유·피가 傳(전)한 問題 (문제)의 電文 (전문) 朴憲永氏談 要旨(박헌영씨담 요지)"
조선일보, 공업신문도 동일한 보도를 했다.[24][25] 박헌영의 외신 기자회견이 1월 5일에 있었음에도 UP의 기사가 국내에는 뒤늦게 1월 17일에 보도된 이유는 UP가 계약한 국내의 『조선통신(朝鮮通信)』이 좌파계열이라 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내보내지 않고 보류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26][27][28] 아마도 1월 15일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소동이 벌어진 후, UP의 해당 기사를 내보내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 모든 연구자들이 존스턴 기자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946년 1월 10일자 기사로 실렸다.[29][30] 존스턴이 최초에 송고한 기사는 전송에 문제가 발생하여 실리지 못했으나, 인터뷰 이튿날 박헌영이 미군정청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로부터 존스턴 기자가 문제의 기사를 송고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22][31],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1월 8일 존스턴을 찾아가 기사를 정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존스턴이 거절하자 박헌영은 재인터뷰 형식으로 지난 발언을 수정하는 발언을 하고, 존스턴이 이를 받아들여 다시 송고한 기사가 1월 10일 뉴욕타임즈에 실렸는데, 여기에는 수정 발언과 함께 박헌영이 최초에 한 문제의 발언도 같이 나와 있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NYT 기사를 조작하여 있는 것처럼 방송했다는 음모론의 근간이 무너짐.)
  • 미군정청 사람들이 존스턴의 기사 내용을 미리 알게된 이유는 기사를 미국에 송고할 때 군용 전신망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에 상업용 민간 전신망은 없었을 것이다. 작성한 기사를 군정청 담당 부서에 제출하면 담당자가 전송해주는 방식이었을텐데, 기사 내용이야 어차피 신문에 실리는 것이니 굳이 비밀을 유지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존스턴의 기사 내용을 알게 된 일부 미군 장교들이 국내 신문에 보도된 박헌영의 인터뷰 기사와 다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기록을 남긴 것이 다수 발견되어 후대 연구자들이 존스턴의 기사가 조작된 오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외신과 내신 기자회견이 따로 열렸기 때문에 존스턴의 기사가 국내신문의 보도와 반드시 같아야할 이유는 없다.
  • 뉴욕타임즈 기사를 인용한 1월 15일 아침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단파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VOA)" 한국어 방송이며, 국내에서는 단파 라디오가 있어야 직접 수신이 가능하나, 서울중앙방송국이 이를 국내에 중계하여 많은 사람들이 청취한 것이다.[32] 이는 당시 매일 해 오던 프로그램 진행 방식이었으므로[33] 여기에 미군정의 음모가 개입되었을 여지는 없다. 미군정청이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직접 청취하고 국내에 널리 알리려고 보도자료를 만들어 돌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34] 미군정청 사람들이 한국어를 한국인들보다 더 잘 알아서 서울중앙방송이 중계한 한국어 방송을 한국인들이 못 알아들었을까봐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는 말인가?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방송의 실체를 몰라서 미국서 하는 영어방송으로 오인한 것이다.
  •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9], UP 통신이 타전한 기사[35][24][25], 군정청 홍보장교(PRO) Tucker 대위가 당시에 기록한 메모[36] 등에 나오는 박헌영의 외신회견 발언은 서로 부합하며,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문[37][38]에 나오는 것과도 일치한다. 특히 UP 통신이 존스턴의 뉴욕타임즈 기사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고, 당시 국내 신문에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존스턴의 기사만 문제가 되고 아무도 UP 기사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연구자들도 같은 내용의 UP 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면서, 존스턴과 미군정의 음모론만 펼치고 있다.
    1946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뉴욕타임스 뿐만 아니라 UP의 기사까지 거론하며 박헌영의 해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39]
  • 박헌영측은 그가 외신회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외신 기자들의 기사나 증언이 아니라 관계없는 국내 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속이려 하였다.[40][13][14][41][42]
  • 미군정청이 진상을 조사할 때 외신 기자들만 대상으로 사실 확인을 하고, 국내신문 기자들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은 이유도 박헌영이 외신 기자회견을 따로 열었기 때문이다. 박헌영 측이 국내 기자들은 제외하고 외신 기자들만 대상으로 조사한 것에 대해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도 국내 기자들과는 관계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Johnston 기자가 쓴 1946.01.10일자 New York Times 박헌영 인터뷰 기사.
(참고 : 존스턴의 1946.01.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Korean Open Letter 1945-1947)
  • 2월 18일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가 있은지 불과 19일 후인 3월 9일 오전 11시에 박헌영이 공동 의장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의장단 7명 (의장 3명, 부의장 4명)이 New York Times의 Johnston, UP 의 호이트(Palmer Hoyt, 1923 ~ 2005) 등 외신 기자와 회견을 한다. 박헌영은 자신이 추방을 요구했던 존스턴 기자와 다시 회견을 한 것으로 보아 군정청 발표에 승복한 것으로 보인다.[43][44] 또 그는 3월 2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UP의 호이트 기자가 3월 22일 서면으로 제출한 질문에 대해 응답하였다.[20][45] 박헌영이 문제의 기자들과 계속 회견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이 썼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작 기사를 쓰는 사람들과 계속 인터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1948년 8월 13일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 주재 최고대표(주한 특사)로 임명된 존 무초(John Muccio, 1900~1989)가 1948년 12월 2일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사건의 진상이 잘 정리되어 있다.[22] 존스턴이 최초에 발송한 기사는 전송에 문제가 발생하여 기사화되지 못했지만, 박헌영은 인터뷰 이튿날 기사 내용을 아는 미군정청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로부터 그 내용을 전해듣게 된다. 그는 미군정청 사람들도 자신의 외신 발언 내용을 아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존스턴 기자를 찾아가 기사 정정을 요청한다. 하지만 거절 당하고 재인터뷰 형식으로 수정 발언을 한 것이 1월 10일자 NYT에 실리면서, 원래 말했던 내용도 함께 기사화 되고,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국내에 전해진 것이다. 박헌영이 외신회견에서 한 발언을 실은 존스턴의 기사 내용은 모두 사실이지만, 미군정청 인사들 중에 국내신문에 실린 박헌영의 내신회견 발언이 이와 달라서 존스턴을 의심하는 기록을 남긴 것이 혼란의 원인이다. 박헌영은 내외신 회견을 따로 했으며, 두 회견에서의 발언 내용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뉴욕타임스 및 UP의 기사 내용이 국내신문 기사와 달랐을 뿐이다.

존스턴의 1946년 1월 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지금까지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찾는데 실패하여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존스턴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는 실제로는 실렸다. 다만 최초에 송고한 기사는 전송에 문제가 있어 실리지 못했고, 1월 8일 박헌영이 존스턴을 찾아가서 기사 취소를 요구하다 거절 당하고, 지난 인터뷰 발언을 수정하여 다시 한 발언이 1월 10일자 기사로 실렸다. 기사에는 수정 발언 이전 최초 기자회견 당시의 실제 발언 내용도 함께 나온다. 문제의 1월 15일자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이 기사를 인용한 것이며, 없는 뉴욕타임즈 기사를 조작해서 방송한 것이 아니다.

  •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 원문 이미지 보기
USAMGIK: Miscellaneous Letters on US Policy; Indexed: Press Clippings of Korea p.216 : (미군정청의 미국 신문기사 스크랩. 전체273개 스크랩중 216번째임)
Richard J. H. Johnston,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January 10, 1946, Page 1

이 기사는 뉴욕타임즈 Archives 에서도 검색된다.

오른쪽의 기사 이미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있는 것이고, 원문은 아래와 같다.

존스턴의 1946.01.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By Richard J. H. Johnston

 By Wireless to The New York Times.
 Seoul, Korea, Jan. 8 (Delayed)--Carrying a communication from Lieut. Gen. Chritiakoff commander of the Soviet forces of occupation in Korea, to Lieut. Gen.Hodge, commander of United States forces here,........

Communist Revises Views

 Expressing fear that views voiced two days ago in a press conference might be misunderstood in the United States, Pak Heun Yung,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here, issued this morning a "restatement of his attitute" on the questions of a trusteeship for Korea and possibility of the inclusion of Korea in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In a conversation with me this morning Mr.Pak demanded that I "correct the impression." When I refused to do other than stand by the story written two days ago, Mr. Pak agreed that he had not been misquoted, as he originally contended, but that "language difficulties may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 misinterpretation."  (The story referred to was incomplete because of transmission difficulties and hence was not published.)
 Two days ago Mr.Pak said he had "no objections to a single-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his country" and that "the inclusion, after ten or twenty years of democratic development, of Korea into the Soviet Union" was a possibility.

New Version of Opinions

 Mr. Pak, whose command of English is unusually good and who previously had never failed to get his ideas across clearly to the press, said he wanted to reword his opinions as follows :
 "I cannot speak about the question of a one-nation trusteeship. It is not decided upon by the United Nations."  
 "About the incorporation of Korea into the USSR, at no time can I speak about this present or future."
 "The question of socialism or sovietism in Korea cannot be discussed now."
 Through mysterious and devious sources, Mr. Pak learned parts of my story of two days ago, shortly after it was filed here. Mr.Pak was unable to explain satisfactorily how he obtained the information.
New York Times JANUARY 10, 1946

위 기사에서 존스턴은 박헌영이 자신이 송고한 기사 내용을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이의를 제기하며 수정을 요청했는지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무쵸 대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박헌영은 미군정청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로부터 존스턴 기자가 문제의 기사를 송고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존스턴을 찾아간 것이다.[22][31]

아래는 역시 Johnston 기자가 쓴 1946년 1월 18일자 뉴욕타임즈 기사의 박헌영 관련 부분이다.[46] “박헌영은 ‘어제’ 미국 언론과 회견했고, 소련 일국의 조선 신탁 통치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가 없다고 말했다. 박헌영은 이 발언을 좌익 언론에 해명하면서 그의 발언이 와전되었고, 그는 언어 장벽(language difficulties)의 희생자라고 말하였다.”는 내용이다.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ed Leader Called Traitor on Trusteeship--U.S.-Soviet Talks Deeply Secret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January 18, 1946, Page 8)

.......

In the latest break the parties on the Right have refused to attend further parleys and the Rightists continue to hurl the accusation of "traitor” at Pak Huenyung, Secretary General of the Communist party. Yesterday in a conference with the American press, Mr. Pak expressed himself as “having no objection to a single 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Korea. In his defense Mr. Pak is quoted in the Leftist press as saying that he was misunderstood and that he was the victim of "language difficulties."

신한민보 1946년 1월 17일 기사

미국 로스안젤레스의 교민들이 발행하던 주간지 신한민보(新韓民報)도 1946-01-17 (목)일자로 박헌영의 외신 기자회견 발언을 보도하였다. 서울의 존스턴의 1월 8일자 전보를 받아 쓴 것처럼 말했으나 실제로 그런 전보를 받았을 가능성은 없을 것같으므로 1월 10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고 쓴 듯하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국내에 전해진 뉴욕타임스의 박헌영 발언 기사 내용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것을 모르는 채로 신한민보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설명
공산당 박헌영의 작언금어(昨言今語)[47]
[8일 경성 타임스통신 존스턴 전보] 이틀전에 공산당 총무 박현영은 말하기를 자기 나라의 한 나라 즉 소아(소련)의 신탁을 반대 하지 않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十년 二十년 동안 민주주의로 발달한 후 소아(소련)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더니 금일 존스턴을 보고 이 말을 고쳐 달라고 하거늘 존스턴이 말하기를 네가 참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하니 박이 말하기를 영어 번역이 잘못되었을 듯하다

박은 영어를 잘하고 아틀전에 영어로 분명히 말하였고 오늘은 고쳐달라고 청하기를 내가 말한 것은 「한 나라의 신탁은 말할 수 없고 신탁에 대하야 연합국이 아직 작정하지 아니하였다 한국이 공산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즉금이나 이다음에나 말할 수 없고 한국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즉금은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작언금어(昨言今語) : 어제 말과 오늘 말
경셩 타임스통신 ㅅ잔스톤 : 서울의 뉴욕타임스 통신원 Richard Johnston
소아 : 소련을 뜻하는데, 소비에트 + 아라사(俄羅斯, 러시아)를 축약한 말인 것 같다.

결론

존스턴의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제로 보도되었으며 조작하지도 않았고, UP 통신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으며,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없는 기사를 있다고 조작 보도한 것이 아니다. 미군정청이 이를 공산당 탄압에 악용할 음모를 꾸민 적도 없고, 하지 장군이 진상조사 발표문[38]을 조작하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 박헌영은 외신회견에서 실제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미군정이나 당시 우익들이 허위사실로 박헌영을 탄압하기 위한 정보공작을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좌파 학자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음모론으로 미군정과 당시 반탁세력을 공격하고 박헌영을 억울한 희생양인 것처럼 옹호하는 여론공작을 하고 있다.

코멘트

  • 박헌영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좌익들도 1945년말까지는 반탁을 주장하다가 새해 초에는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섰다. 박헌영은 1월 1일과 1월 3일 두 차례 연달아 미군정사령관 하지(Hodge) 중장을 만났는데, 1월 1일에는 반탁을 주장하다 1월 3일에는 찬탁으로 돌변해 있었다고 한다.[48] 하지는 좌익들이 새해 벽두에 일제히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데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일로 해서 공산당과 박헌영은 상대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듯하다.
  • 박헌영이 기자회견을 열었던 1월 5일 오전 11시에 서울 광화문에서는 12월 30일 암살 당한 송진우(宋鎭禹, 1890~1945)의 영결식이 있어[49] 우파 언론 기자들은 그쪽으로 가고, 박헌영의 회견에는 좌파 언론 기자만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회견 기사도 좌파 언론들이 주로 실었다. 이때문에 내신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기자들이 자신들은 참석하지도 않은 외신 회견 발언을 두고 모두 박헌영을 옹호하는 성명을 낸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은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는데도 불구하고[50] 송진우의 장례식에는 가지도 않고 굳이 영결식과 같은 시간에 문제의 외신기자회견을 따로 가진 것으로 보아 국내의 시선이 외신회견에 쏠리는 것을 일부러 피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소련군이 반탁 의사를 굽히지 않던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을 친일파로 몰아 고려호텔에 연금하였다. 그 직전인 1월 2일에 김일성, 김두봉 등을 포함한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51] 박헌영도 평양의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 UP 통신이 타전한 박헌영 외신회견 기사는 국내에 좀 늦게 보도되었는데, 당시 UP와 계약한 국내통신사는 조선통신사로[52], 좌파 계열이라 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보류시키고 내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므로[26]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UP 기사가 뒤늦게 국내에 보도된 것은 샌프란시스코 방송으로 문제가 커지자 기사 내용을 공개하라는 요구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통신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관한 UP의 최초 기사도 좌익들에게 불리하다고 내보내지 않았다고 한다.[27]
좌익신문들은 좌익정당들의 압력으로 조선통신이 UP통신 기사 배포를 보류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의 사장 홍증식(洪增植)은 중대한 기사를 임의로 보도했다고 합동통신에 항의하기까지 했다. 좌익정당들이 이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이 국민들의 큰 반발을 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 외신회견 참석자 중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 콘월(Robert Cornwall) 중사가 박헌영은 존스턴의 기사와 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면서 영자신문 Seoul Times 가 보도하였는데[53], 그는 미군정청 조사에서는 존스턴의 기사가 맞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하여 엇갈리는 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엇갈리는 그의 말은 무시하더라도 다른 UP 기사나 Tucker 대위의 메모, Massock 의 진술 등만으로도 NYT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오보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된다.
  • 버취(Leonard Bertsch) 중위가 공보국장 Newman 대령에게 1월 20일자 "Political Trend #17"에 존스턴의 기사가 정확한 것처럼 썼는데, 다음 호에서 이 기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고쳐써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뉴먼 대령이 그럴 필요없이 그냥 두라고 한 것을 들어[54] 미군정청이 기사가 조작이라고 밝히는 것을 거부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버취 중위는 기자회견 현장 참석자도 아니라서 정확한 진상을 아는 사람도 아닌데다, 존스턴의 기사가 국내 신문기사와 다른 것을 근거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기록이 작성된 날인 1월 26일에는 박헌영이 미군정청에 정식 공문으로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 달라고 요구하여[37][38]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따라서 조사 후 결과를 발표하면 되므로 조사도 하기 전에 버취 중위가 과거 기사를 고쳐 쓰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어 뉴먼 대령이 그대로 두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논란이 일 것이 뻔한 문제의 발언을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도 당시에 그것을 알았기에 국내 기자회견에서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고, 국내에 보도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외신회견에서만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그는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지도자 결정권을 가진 소련에 대한 아부성 발언이 외신을 통해 소련에 알려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즈 기사를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인용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국내에는 문제의 발언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에는 조선공산당 하위조직인 북조선분국이 있었고 김일성이 책임자였지만 명목상으로만 서울의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 아래에 있었을 뿐 실제로는 박헌영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 명백해진 1946년 이른 봄에는 남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의 영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게 된다.[55][56] 분위기가 이렇게 변해가는 것을 박헌영이 몰랐을 리가 없으므로 초조해져서 소련에 잘 보이기 위해 외신회견에서 무리한 발언을 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기자회견 며칠 후인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되어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나선다. 이에 반발한 박헌영이 소련측에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1946년 7월 초 스탈린은 박헌영과 김일성 둘 다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선택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19]
  • 박헌영은 문제의 외신회견 하루 전날인 1월 4일 두 미국인 기자와 회견하였는데, 오후 3~5시 사이에는 미국 공산당원과, 6시부터 한국을 방문 중인 Edgar Snow(1905~1972) 와 만났다.[57][58] 회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Snow가 1월 6일 미군정 사람들과 만나 Johnston 기자의 기사에 대해 이야기한 기록을 보면 Snow와의 회견에서는 특별히 논란이 될만한 발언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59]
  •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박헌영 폭탄이 터지던 날 공교롭게도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인 스티코프와 수행원 13명이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 사항 이행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위해 0시 45분에 평양으로부터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였다.[60] 스티코프가 도착한 불과 몇 시간 후인 7시 5분부터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시작되었다. 1월 16일에 개막되었던 미소공동회담은 2월 5일 오후 5시 종료되고, 스티코프 등 소련대표 일행은 2월 7일 오전 2시 15분 특별열차로 서울을 출발,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서울에 23일간 체류함.)[61] 당시 박헌영도 스티코프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박헌영은 수시로 각종 사안에 대해 스티코프에게 지침을 구하곤했다는 것이 스티코프 일기에 나온다.[62]
스티코프가 평양으로 돌아간 바로 다음날인 2월 8일 사실상 북한의 임시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다. 김일성은 이때 처음 비록 제한적이나마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후 1994년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다 아들 김정일에게 물려주었다.
  • 박헌영이 발언할 때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미군정청 기록들도 꼬집고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데 박헌영은 입만열면 다른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고, 공산주의자들만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얄팍한 사탕발림이라고 하고 있다.[63][35] 해방 당시에도 공산주의식 용어혼란 전술이 만연해 있었고, 박헌영은 그런 방식을 가장 애용하는 선동가였다. 박헌영식의 논리라면 그가 추종하는 스탈린이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가 되고, 미국은 파시스트 반동국가가 되는 듯하다.

NYT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청의 음모로 몰아간 연구 사례

오늘날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를 찾아는데 실패하고는 뉴욕 타임즈에 그런 기사가 실린 적이 없다고 단정하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인용보도했으므로 미군정청과 존스턴 기자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한다.

박헌영의 외신 인터뷰 사건은 엉터리 학자들의 엉터리 연구의 백미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내놓는데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이자 노련한 정치인 박헌영이 그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 리가 없으므로 극우 파쇼(?) 미군이 그를 탄압하기 위해 당연히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는 그들 특유의 선입견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이나 당시 우익들이 허위사실로 박헌영을 탄압하기 위한 정보공작을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좌파 학자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음모론으로 미군정과 당시 반탁세력을 공격하고 박헌영을 억울한 희생양인 것처럼 옹호하는 여론공작을 하고 있다.

“우익이 좌익을 매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은 1월 5일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인 죤스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었다. 죤스톤은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이러한 내용이 보도되자 한민당은 즉시 죤스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헌영을 타도하자”라는 팸플릿을 배포하였다.

그런데 이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다른 미국인 기자들은, 박헌영은 단지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 a Korea run by Koreans for Koreans 을 원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한국의 신문들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했다. 당시의 미군정 보고서 (G-2 Report)에도 박헌영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으며 그의 말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죤스톤의 보도내용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 보도내용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의 명성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는 좌익들 가운데서도 그는 고질적인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초부터 우익집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하지 장군은 존스턴의 기사의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잘못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을 뿐이고, 그 기사가 왜곡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가 알면서도 일부러 존스턴이 기사를 취소하도록 요구하지 않아 박헌영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주장은 커밍스의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방선주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이 소장한 미군정청 문서들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에 이를 가장 많이 열람한 사람으로, 당시 미군정청 사람들이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의심스럽다고 한 기록을 다수 찾아내고, 이를 토대로 음모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문제의 뉴욕타임즈 기사는 찾는데 실패하여 실린 적이 없다고 단정하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인용한 것은 미군정의 음모가 개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속의 연구자들은 모두 이런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NARA의 미군정청 문서를 처음 발굴하고 국내에 소개한 공로는 있지만, 그의 역사 해석은 잘못된 경우가 다수 있다.


존스턴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없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음모론으로 몰아감.
현대사 사료의 문제(서중석) > Ⅱ.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①-국내자료(남한) 國史館論叢 第73輯 (국사편찬위원회, 1997)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된 왜곡보도는 그뒤에도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1946년 1월 16일자에서 1월 5일 박헌영이 뉴욕타임스기자 존스턴과 회견하였을 때, 소련의 1국신탁을 지지하였고,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연방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방송에서 방송한 뉴스를 크게 다뤘다.[註 034] 다음날 역시 『동아일보』에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여 박헌영 언동에 각 정당과 50여 단체가 분연 궐기하였다고 보도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이 문제에 대한 사설을 썼다. 하지는 진상을 알고 있었는데도 박헌영이 말했다는 부분에 대한 존스턴의 보도가 정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명서가 나오자 우익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대서특필하였다.[註 035]

[註 034] 같은 날짜에 『조선일보』에서는 방송 내용과 박헌영의 부인담화를 함께 실었다.
[註 035] 강준식,「김일성과 박헌영, 그 숙명의 대결」(『신동아』, 1989. 4) pp.501~502.
이는 아무 근거 없는 말이며, 자신의 희망사항을 사실인 것처럼 주장한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방송함으로써 이 회견 내용에 잠잠하던 국내 언론을 자극하였고, 국내 우익 계열 신문들은 이 기사를 산사태처럼 쏟아 냈다.1) 신문들은 존스턴의 논조를 확대 과장함으로써 박헌영과 공산당에 대한 비난을 강화했고, 박헌영의 정적들은 그의 목에 30만 엔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박헌영의 신망은 이 사건으로 몹시 손상되었다. 그는 좌익들 사이에서까지 구제 불능의 친소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턴은 박헌영을 다시 만났을 때, 이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정정은 뉴욕 타임즈에 요청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기사의 게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정을 이용하여 그의 윤색된 기사를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또 그 책임을 천연덕스럽게 뉴욕 타임즈 본사로 미루었다. 그리고 하지 및 주한 미군 사령부 정보부와 공보부는, 막상 기자 회견 직후 국내 보도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던 기사를 열흘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윤색된 내용 그대로를 국내에 보급,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그 기사가 국내 여론에 미치는 파장을 지켜보았다.

주한 미군 사령부 군사실이 편찬한 『주한 미군사』는 존스턴 기자 회견이 “(미 군정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 관계를 끝맺게 하는 시초가 되었다.”고 서술했으나 사실은 존스턴이 박헌영과의 회견을 왜곡하고, 미 군정이 재차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를 널리 유포함으로써 공산당은 소련의 괴뢰라는 인식을 확산한 것이다. 미 군정과 존스턴은 『뉴욕 타임즈』의 권위를 빌려 정작 보도되지도 않은 기사를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그 기사가 국내에 확산되는 데에는 정체 불명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큰 역할을 했다.

방선주[65]는 이 사건을 미국 신문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의도적 오보’가 작용한 것으로, 또 한국인들의 반탁 운동으로 곤욕을 치르던 미 군정이 묘수(妙手)를 부린 것으로 평가했다. 이 기술은 사건의 배경과 의도를 정확히 지적했지만, 한편으로 미 군정은 반탁 운동의 정치적 효과를 만끽했고, 반탁 운동의 수혜자였다는 점을 간과했다. 공산당이 반탁 입장에서 삼상 회의 결정 지지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소련의 입김이 작용했고, 2) 이러한 방향 선회를 주시하던 미 군정은 박헌영-존스턴 회견을 여론 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내의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그 정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이 국내에 전달될 때에도, 통신 기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신 기사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발이었다.
서울대 교수라는 사람이 뉴욕타임스 기사는 찾아보지도 않고, 남들의 주장을 따라 존스턴의 기사는 없는 것이라 단정하고, 당시 한국에서 청취 가능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파로 송출하는 VOA(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서울중앙방송이 수신하여 중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기초적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중심, 2003년 08월 05일) pp. 72~73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정용욱, 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2003년 봄호(통권 62호, 2003.2) pp. 287-322.
  • 정용욱의 엉터리 연구를 사실로 알고 잘못 인용한 사례
김기협, 우익의 공세…"박헌영을 공격하라!" [해방일기] 1946년 1월 19일 프레시안 2011.01.19.
1946년 1월5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된 조선임시정부 수립방안의 수용여부를 놓고 국내의 정치세력이 반탁과 찬탁으로 첨예하게 대립돼 있던 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이 회견에서 박헌영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절대지지하며 조선의 현단계는 소비에트화 단계가 아니라 민주주의 변혁과정에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내용은 다음날 <조선인민보> 등에 보도되었는데 박헌영이 늘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한 것인지라 별다른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나 10여일 뒤 미군정은 보도자료를 통해 1월15일 오전 7시5분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Richard Johnston) 기자에게 자신은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련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 내용을 “조선을 소련 속국으로-상항(桑港)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씨 희망”이라는 표제를 달아 크게 보도했다. ... (중략)....
미군정 당국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미군정의 내부문서에서는 존스턴의 기사가 왜곡된 것으로 나와 있는 점을 보아도 박헌영은 미군정 당국과 우익언론의 결탁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뉴욕타임스>는 박헌영이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적이 없음에도, 국내에서는 미군정의 개입에 의해 마치 이런 기사가 보도된 것처럼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뉴욕타임스>에 오보는 없다는 말은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홍구는 이 사안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서울중앙방송이 중계하는 VOA의 한국어 방송인데, 영어 방송인 줄로 잘못 알고 미군정측이 이를 청취하고 보도자료를 만들어 그 내용을 국내에 알렸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미군정 인사들이 한국인들보다 한국어를 더 잘 알아서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뉴욕타임스는 1월 10일자로 존스턴의 기사를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홍구는 이 기사를 찾지도 못하고 보도한 적이 없다고 제멋대로 주장하고 있다.
한홍구, 《대한민국사 1》 (한겨레출판, 2013. 7. 4)
공산주의자들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다 : 박헌영 존스턴 기자회견 사건

1946년 1월 16일, 《동아일보》 등 남한의 우익 언 론들은 박헌영이 외국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매국적 발언을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박헌영이 소련 일국의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10~20년 후 한국이 소련의 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언론들의 보도로 박헌영은 순식간에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었다.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들은 즉시 박헌영 타도를 결의했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언론의 보도 내용을 부인했지만 파동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 일로 박헌영은 정치적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후일 이 사건은 '박헌영 존스턴 기자회견 사건'으로 명명되었다.
사실 이는 미군정이 기획한 의도적인 왜곡 보도 사건이었다. 《뉴욕타임스》 기자 존스턴(Richard Johnston)이 작성한 악의적인 왜곡 기사를 미군정이 샌프란시스코방송을 통해 보도하게 하고, 다시 이를 보도자료에 담아 국내 언론들이 보도할 수 있도록 조장했던 것이다. 언론 보도 후, 우익 세력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헌영을 타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이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대중은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충분한 개연성과 호기심을 자극할 요인만 존재한다면 조작된 사실이라 해도 얼마든지 대중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군정과 우익 진영은 큰 성공을 거뒀다. 박헌영조선공산당에게 매국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덧붙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아래 주한미군사의 자료는 위 사건의 경과를 최종 정리한 기록이고, 당시 찬탁 반탁 운동이 진행되어가는 과정도 요약되어 나온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국제적 민주조선 수립, 통일전선은 4정당 교섭으로 : 공산당 朴憲永씨 내외기자단과 회견 자유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2.0 2.1 國際路線順應해야 朝鮮獨立은 可能, , 朝共朴憲永氏, 外人記者團과 會見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06일 2면1단
  3. 朴憲永氏와 記者團 會見, 統一 急速 實現 可能, 莫府會議 決定 承認을 原則으로 共産黨에서 各黨과 交涉中 중앙신문[中央新聞] 1946년 01월 06일
  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조공(朝共) 朴憲永, 당면문제에 대해 내외기자단회견 서울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朴憲永氏 外國記者團과 會見 民主衆報 1946.01.07
  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8.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9. 9.0 9.1 朝鮮(조선)을 蘇聯屬國(소련속국)으로, 桑港放送(상항방송)이 傳(전)하는 朝共 朴憲永氏 希望(조공 박헌영씨 희망) 동아일보 1946-01-16 1면
  10. 존스톤씨 25일 離韓 자유신문 1949년 10월 19일
  11. 朝共의 蘇聯託治希望說, 韓民黨에서 排擊决議 / 朝共사實否定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16일 1면 6단
  1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6일 > 우익계각단체긴급협의회, 조선공산당 배격 결의 전단 1946년 01월 16일
  13. 13.0 13.1 "유욕(뉴욕)紙 所報는 誤傳" 共産黨에서 記者團에 言明 : 조선일보 1946-01-18
  14. 14.0 14.1 민족적 지도자를 誣言하는 음모배 韓民黨幹部는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 필자가 취소하는 괴기사 사건의 진상에 대하야 성명함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朝鮮共産黨 中央委員會 宣傳部) 1946.01.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5. Korean Nationalist Party spreads ill propaganda for Communist Party, even after writer spikes misunderstanding. : 박헌영 발언 논란에 대한 朝共의 반박 성명 (조선인민보 1946-01-18 기사 영역)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6.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81 (The Seoul Times), p.238 (조선인민보 기사 영역) :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17. 군정청 발표(軍政廳 發表)에 조공(朝共)서도 성명(聲明) :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 1면
  18. 朝共도 中共을 본 밧드라, 韓民黨 咸宣傳部長談 중앙신문 [中央新聞] 1946년 02월 20일
  19. 19.0 19.1 박헌영 /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 앞에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다 : 우남위키
  20. 20.0 20.1 UP記者 設問에 朴憲永氏의 答辯, 金日成氏 大統領은 總意라면 支持한다 嶺南日報 1946.03.29
  21. 金日成將軍은 民族的英雄: 朴憲永氏의 對答 光州民報 1946. 03. 31
  22. 22.0 22.1 22.2 22.3 UN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문서 5(대한민국사자료집) > 박헌영 발언관련 정보 (Information about Pak Hun Yung statement) 1948년 12월 2일 무초(Muccio) 초대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 외신 회견은 한국 기자들과 분리해서 이루어짐.
  23. 예를들면 1946-01-15 일자 주한미군 문서 Weekly Summary #18에 나오는 박헌영 외신 인터뷰 관련 기록에 국내신문 보도된 인터뷰 내용이 존스턴의 기사보다 훨씬 온건하다고 하고 있다.
  24. 24.0 24.1 UP 記者의 報道 조선일보 1946년 1월 17일자 1면 최하단 우측
  25. 25.0 25.1 蘇聯 一箇國의 托治 反對치 안는다, UP가 報導한 朴憲永氏談 / UP 記者의 報道 공업신문(工業新聞) 1946년 1월 18일
  26. 26.0 26.1 우승규, 「나절로 만필」 (탐구당, 1978년) 212, 216, 220쪽 : 적색화한 「조선통신」
  27. 27.0 27.1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28. 조선통신(朝鮮通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9. Richard J. H. Johnston,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January 10, 1946, Pag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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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31.0 31.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하지고문으로 베닝호프가 着任하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7일
  32. 朴憲永氏의 談話 問題化 중앙신문, 1946.01.17 1면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국내에 중계되는 과정이 나옴.
  33. 상항(桑港)으로부터 국어방송(國語放送) 중계(中繼) 1945-12-02 영남일보 2면
  34.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한겨레 21, 2002.01.30
  35. 35.0 35.1 유·피가 傳(전)한 問題(문제)의 電文(전문) 동아일보 1946-01-17 1면
  36. 朴憲永 失言 事件 絶對로 辯明 못할 實事 : 臨席하엿든 美將校談 대동신문 1946-01-23
  37. 37.0 37.1 Military Government Press Relaese, 18 February 1946 : Incl #1 to USAFIK G-2 Periodic Report #156 (19 February 1946).
  38. 38.0 38.1 38.2 美國記者(미국기자)와 朴憲永氏(박헌영씨)의 問答(문답) 正確 동아일보 1946-02-19 1면
  39. 1946-01-18 동아일보 사설(社說) "誤解이냐 歪曲이냐, 朴憲永氏 失言問題"
  40. Korean Nationalist Party spreads ill propaganda for Communist Party, even after writer spikes misunderstanding. : 박헌영 발언 논란에 대한 朝共의 반박 성명 (조선인민보 1946-01-18 기사 영역)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41. 1946-02-20 조선인민보 (영역) :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항변.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235, p.239
  42. 군정청 발표(軍政廳 發表)에 조공(朝共)서도 성명(聲明) :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 1면
  43.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3월 09일 > 민전 의장단, 외국인 기자단과 회견 조선일보 1946년 03월 09일
  44.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 民戰의장 제씨 외국기자와 문답 : 3월 9일 오전 11시 자유신문 1946년 03월 10일
  45. UP記者 設問에 朴憲永氏의 答辯, 金日成氏大統領은 總意라면 支持한다 嶺南日報 1946.03.29
  46.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ed Leader Called Traitor on Trusteeship--U.S.-Soviet Talks Deeply Secret New York Times January 18, 1946, Page 8.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obert T. Oliver Papers / The Korean Open Letter: 1945-1947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The Murphy Collection on International Communism, 1917-58, Entry Murphy Papers, Box 69 (1)
  47. 공산당 박헌영의 작언금어 신한민보[新韓民報] 1946년 0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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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最後(최후)로 靈柩(영구)에 一哭(일곡) 昨日 故宋先生 永訣式(작일 고송선생 영결식) 1946.01.06 동아일보 2면
  50. 40. 동아일보 사람들- 박헌영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11월 - 9 - 2018
  51. 파일:1946-01-02 북한 정당단체 대표의 신탁통치 지지 성명.pdf : 우남위키
  52. 조선통신사, 미 UP사와 통신계약 체결 중앙신문 1945년 12월 03일
  53. American Correspondent Endorse Park's Statement of Deny 1946-01-18 「The Seoul Times」
  54. 존스턴 기자 기사의 진위와 관련하여 Bertsch 중위와 Newman 대령이 나눈 대화의 기록 : 1946-01-26
  55.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6. 주한미군사 2 >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모스크바 회담과 조선 > 후폭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7.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85 : 1946년 1월 4일 박헌영이 두 미국기자와 인터뷰. 한명은 공산당원. 에드가 스노우는 저녁 6시부터
  58. “國際潮流를 把握하라”, 『亞細亞의 鬪爭』著者로 有名한 美人記者 에드가-스노-氏 “朝鮮現在” 視察次入京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06일 2면 1단
  59. 1946년 1월 6일자 「사관기장(史官記帳, Historical Journal)」의 뉴욕타임즈 박헌영 외신 인터뷰 기사 논란 관련 기록 Edgar Snow가 박헌영은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함.
  60. 美(미)·蘇共同委員會(소공동위원회) : 蘇聯代表昨日入京(소련대표작일입경) 軍政廳第一會議室(군정청제일회의실)에서 南北統一問題(남북통일문제)를 먼저審議(심의) 동아일보 1946-01-16, 1면
  61. 國內 諸團體와 協議, 臨時政府 樹立 援助, 一朔 內에 美蘇共同委員會 設置. 중앙신문, 1946.02.08
  62. 해외사료총서 10권 :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63.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102 박헌영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코멘트, WS #6 (1945.10.30, p.6) ; p.182 박헌영이 말하는 공산당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옴, WS #12 (1945.12.11, p.6)
  64.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Vol.1 pp.224~225.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1986) 하권 pp.34~35. (원저 Vol.1을 상, 하 2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
  65. 방선주(方善柱, 1933~ ),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p. 184~188 의 『A. Johnston 記者의 朴憲永 發言 ‘誤引’ 事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