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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최근 수정 : 2019년 7월 22일 (월) 07:24
1946년 당시의 박헌영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로 해방 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어 활동하다 월북하여 북한 부수상을 지내다 숙청, 처형 당했다.

생애

박헌영의 생년에 관해서는 다수의 이설이 있다. 생년은 소련군이 작성한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에 1900년 5월 1일[1], 레베데프가 작성한 박헌영 평정서에는[2] 1900년으로 나오므로, 이것이 맞을 것이다. (박헌영 본인에게 직접 확인한 자료일 것임.) 따라서 생년은 1900년이 맞고, 생일이 5월 1일이라 한 것은 양력인지 음력인지가 논란이 될 수 있다.[3] 소련군은 양력이라 생각하고 적었을 것이나, 당시 대부분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으로 쇠고 있을 때이므로 음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해 음력 5월 1일은 양력 5월 28일이다.

미군정이 작성한 박헌영 약력에도 생년은 1900년이다.[4]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변

신탁통치에 대한 소식은 1945년 10월부터 간간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여러 정당들은 일찍부터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10월 26일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에서는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조선공산당의 정태식(鄭泰植)김형선(金炯善)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1945년 12월 27일부터 국내언론에 보도되자, 좌우 가릴 것 없이 대다수 정파가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조선공산당 내에서도 반탁 기류가 상당했으나, 다른 정파와는 달리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없었고,[5] 정태식(鄭泰植)이 개인적으로 반탁입장을 밝혔다.[6]

한편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박헌영도 홍명희(洪命憙)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7],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8] 이를 위한 준비모임인 12월 28일 밤의 경교장 모임에 박헌영도 참석했다는 강원룡 목사의 증언이 있다.[9] 중앙위원에는 북한에 있는 조만식(曺晩植), 김두봉(金枓奉), 김무정(金武亭)도 들어 있는데 이들이 실제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박헌영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만으로 그의 참여가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튿날 상무위원에까지 선정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임의로 집어넣은 것으로 보기는 무리이다. 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이름이 본인 동의없이 임의로 들어간 것이라면 공산당 측의 거센 항의가 있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조선공산당 서울시 위원회에서는 12월 31일 탁치반대 전단을 살포하였다.[10] 같은 날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에 역시 공산당 서울시 위원회가 참여하였고, 박헌영의 심복인 이현상(李鉉相)이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를 했다.[11]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1846년 1월 1일 오후 2시부터 기자단과 회견하고 탁치안을 절대 배격할 투쟁방침을 선명한 담화를 발표했다.[12]

미군정의 기록에 의하면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13][14].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다.[15][16] 공산당은 하루만에 전날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180도 선회하였다.

이날을 기준으로 모든 좌파들이 연말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표변하였다[17]. 1월 3일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18]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변경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19][14][20] 좌파들은 입으로만 민주주의니, 인민의 뜻을 받드느니 하며 떠들 뿐, 실제로는 인민들은 자신들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졸로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좌파들이 1월 1일까지 반탁입장을 견지하다 1월 2일부터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시 미군정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21].


박헌영이 이 무렵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소련의 지령을 받아왔다고 증언한 사람이 많이 있으나, 사람마다 방북했다는 날자가 제각각이고, 명백한 문헌근거는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기 어렵다.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은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뜻을 파악하려고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고 증언했다.[22][23] 하지만 이 기간은 위에 언급한 다른 기록들과 상충하는 점이 많다. 이 일에 관해서는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시나(쿨리코바)의 증언도 있고[24],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朴吉用, 1920 ~1997)과 소련 군정 핵심 인사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메클레르 중좌의 증언도 있지만, 박헌영이 방북했다는 시기는 제각각이다.[25]


박헌영 본인이 공개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면서 찬탁 입장을 밝힌 것은 1월 5일 11시에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이다. 국내 기자와의 회견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반탁 진영을 맹비난한 것이 이튿날 국내 신문에 보도 되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외신 회견에서는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 ~ 20년 내에 조선이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뒤늦게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벌어지고, 공산당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도 큰 타격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이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리는 없으므로, 이 사건은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본인도 이런 발언의 파장을 모를리 없었으니 국내기자 회견에서는 당연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외신회견에서만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벌이고 있던 그가 소련에 잘 보일 목적으로 국내용 아닌 대소용(對蘇用)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외신 회견 발언 내용이 뒤늦게 국내에도 전해져 문제가 된 것이다.

외신 회견 발언 논란 외에도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 명백해진 1946년 이른 봄에는 남한에서도 김일성의 영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게 된다.[20][14]


정판사 위폐사건

박헌영은 1946년 3월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석차 서울에 온 소련대표 스티코프에게 상당한 액수의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내에서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위 서한들에 의하면 박헌영의 요청이 이오시프 쉬킨(Iosif Shikin, 1906~1973)을 통해 불가닌(Nikolai Bulganin, 1895~1975)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외상)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1890~1986)에게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금 부족 상황이 공산당 불법화를 초래한 정판사 위폐사건의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7]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의 증언에 의하면 박헌영은 해방 직후 남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6차례 비밀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동했다고 한다.[22]

제1차 회동 (1945년 10월 8일~9일)
제2차 회동 (1945년 12월 29일~ 46년 1월 1일)
제3차 회동 (1946년 4월 3일~ 6일)
제4차 회동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
제5차 회동 (1946년 7월 16일경~ 22일경)
제6차 회동 (1946년 10월 11일과 그 이후)

1차 회동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합의했고, 4차 회동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28][29] 5차 회동은 미군정 기록에 7월 22일에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나오므로 확인이 된다.[27] 3차 회동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이 되지 않고 있고, 6차 회동은 스티코프 일기(아래 참고)에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10월 6일 북조선에 왔다고 했으므로 별 의미가 없다. 2차 회동이 문제인데, 위에서 말한대로 당시 박헌영이 방북하여 소련으로부터 찬탁지시를 받고 왔다는 증언이 많으나 날자가 제각각이고, 박병엽이 주장하는 방북 기간에는 남한에서 활동한 기록이 다수 있어 상충한다.

4차 회동 당시 김일성과 박헌영은 7월 10일경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게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5차 외동은 4차 회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6차 회동은 박헌영이 미군정의 체포를 피해 월북한 후의 일로 보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 앞에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4차 회동 당시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게된 것은 김일성이 지도자로 결정된 것에 대해 박헌영 측이 집요하게 이의 제기를 하여 이루어진 것이나, 두 사람을 만나본 스탈린은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임명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30][31][32][33][34][35] 애초에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36]

박헌영은 서울에서 입만 열면 이승만, 김구 등 남한의 우파 세력은 파시스트라고 비난하고, 공산주의자들만 진정한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떠들고 다녔는데[37][38], 스탈린에게 지도자 임명을 받는 것이 박헌영이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인 셈이다.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2005)[39]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함께 스탈린에게 불려가서 면접시험을 보는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40]

당시 소련 극동군 사령부 부관이었던 코바넨코는 “김일성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박헌영이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6년 5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만을 폭발했다”고 밝히면서 “이 편지는 의외의 효력을 발휘해 박헌영이 처음으로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을 면담하는 기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사령관 부관이었던 코바넨코의 자세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1946년 5월 KGB 극동본부에서 박헌영이 보낸 편지를 가지고 사령관을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극동권 총사령부가 해체되고 극동군구로 바뀌어 사령관 역시 마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1898-1967) 원수로 교체되었습니다. 소련어로 된 장문의 편지는 일제때 지하에서 항일투쟁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고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사들만 앞세우는 등 독재가 많았으며, 중앙당을 무시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남한 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 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나(박헌영)를 추종하는 당원들을 배제하면서 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등 김일성을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이 편지는 소련군정 지도부가 당 총책임자인 자신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김일성에게만 적극 협력하고 있어 당의 권위가 추락해 혁명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등 소련군정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령관은 한참동안 심사숙고 끝에 최종 판단은 스탈린 대원수께서 내릴 수 있도록 모스크바 당중앙에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KGB에서 보낸 이 편지를 놓고 중앙당에서도 한 때 고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박헌영의 편지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지요. 스탈린은 이 편지를 읽고 박헌영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근거가 있다고 보이니 평양의 25군과 김일성 진영에 지시하여 즉시 시정토록 하라고 KGB 본부에 강력히 지시했습니다. 스탈린의 지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부에서 강력히 주장했던 ‘박헌영지도자론’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박과 김을 내가 직접 만나 볼테니 그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라”는 의외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러시아어로 쓰인 박헌영의 편지는 당시 서울 주재 쏘련 총영사관 부영사 샤브신(KGB 소속)을 통해 하바로브스크의 KGB 극동본부에 전달되었던 것이다.[41]

코발렌코가 말하는 말리노프스키 원수는 당시 트랜스바이칼-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으로 북한과는 별 관계가 없었으므로, 연해주 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를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메레츠코프가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42]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 스티코프와의 관계

스티코프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으로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였는데, 박헌영 등 남한의 공산주의자들도 수시로 그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스티코프 일기≫[43] 에 의하면 박헌영은 1946년 10월 7일 관 속에 들어가 북한으로 탈출했고, 수시로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도 소련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선택하여 내세운 김일성 못지 않게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인 것이 드러난다.

  • 쉬띄꼬프일기 Ⅰ부 1946년 9월 9일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파에 대한] 지원 대책을 강구한다.
    로동당의 당원 수는 약 40만 명이다.(377,000명) 합당이 임시적인 조치라는 말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론적인 문제들에서 명확하지 못한 점들이 많다.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공산당 제2비서) 및 이강국(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령을 말함)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1946년 10월 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다.

  • 쉬띄꼬프 일기 Ⅱ부 > 1946년 12월 25일
    박헌영이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처럼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흥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옳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고 조언하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의 관계

해방 후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서울의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샤브신과 자주 만나 그의 조언을 들었으며, 그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시나(쿨리코바)와도 잘 알았다.

미군정이 기록한 주한미군사에 의하면 샤브신은 믿는 한국인 친구에게 자신이 모든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이며,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Soviet vice-consul, Mr. A. I. Shabshin admitted to a Korean friend in confidence that he was the controlling leader of all Communists in South Korea and that Mr. Pak was his henchman.][20] 박헌영이 얼마나 소련의 지시를 잘 따랐으면 일개 부영사가 심복이라 불렀겠는가?




박헌영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위키백과의 박헌영 항목에는 미군정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봤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가 대통령으로 유력했다는 글들도 인터넷에 많이 보인다. 미군정의 문제의 기록은 1947년 3월 21일자 "G-2 Periodic Report No. 485"이다.[44] 그러나 거기에는 막연한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을 뿐이고,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7년 5월 미군정청이 1,000 명을 대상으로 실제 여론 조사를 한 결과는 박헌영에 대한 지지율은 0.4%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 조사는 아래와 같은 3건이 알려져 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고, 박헌영은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구, 김규식, 여운형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45].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46]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1949년 3월 초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 일행.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가 보인다. 3월 5일에 스탈린과 만나는데, 이때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말하며 소련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스탈린은 1950년 초에 남침계획을 승인하고,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50년 3월 31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머물렀는데, 이때 남침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있었다.[47]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48]
    이승만 43.9%, 김규식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6.25 남침 전쟁을 적극 주장

김일성에 못지 않게 박헌영도 남침 전쟁을 적극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두 사람의 속셈은 전혀 다른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김일성은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발탁되었지만 내세울만한 항일 전공도 없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으로 집권하여 정당성이 취약했으므로, 전쟁을 통해 남한 적화에 성공하면 그 공을 내세워 최고 지도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심산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북한에 권력 기반이 약한 박헌영은 남한에 남로당 지하세력 등 자신의 지지세력이 많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시작되면 수십만 남로당원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을 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호언장담했다.[49][50] 이들의 봉기로 남한 적화에 성공하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확대되어 김일성으로부터 최고 지도자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중앙일보 정창현(鄭昌鉉) 현대사전문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51]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6월29일 박헌영(朴憲永)은 『남반부 전체의 완전 해방은 오직 시간문제』라고 선언하고 『남반부 인민들이 인민군과 자기들의 최후 승리를 위하여 이번 전쟁에 통일적.애국적 역량으로 적극 참가』하도록 호소 하는 방송연설을 했다.[52][53] 이 연설에는 북한군의 서울 점령에 고무된 박헌영의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당시 박헌영은 전쟁시기「통일적인 령도기구」로서 조직된 7인 군사위원회의 일원이었다.[54][55]

해방직후 남한 공산주의자를 대표하는 박헌영이 한국전쟁에 대해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점은 오랜 논쟁점 중의 하나였다. 박헌영이 개전(開戰)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헌영이 조선노동당의 고위층과 소련당국에 북한이 남침을 시작하면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할 것임을 납득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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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박헌영은 부수상겸 외무상으로 제2인자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가 북한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는 아니었다. 그는 공식행사나 소련.중국방문때 남쪽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접받았으나 黨과 軍의 실권은 김일성 직계와 연안파, 소련파들이 장악했다. 따라서 북한정권에서 박헌영의 위상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박헌영은 북쪽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에서 뚜렷한 「투쟁성과」를 올려야 했다. 48년 남한정부 수립후 남로당이 폭력투쟁과 「유격투쟁」을 강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는49년 「8.15해방 제4주년에 즈음한 보고서」[56]에서 『조선의 통일이 지연되면 될수록 남조선의 인명은 더욱 더 잃어질 것이므로 통일은 당과 인민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즉각적인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전쟁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남쪽을 회복함으로써만이 노동당내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고, 김일성과도 동등 내지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박헌영은 남침 개시 이튿날인 6.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을 뿐만 아니라[54], 군총정치국장 직위까지 맡았다.[57][58] 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 내려와 남한의 남로당원들과 인민들이 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라디오 연설도 했지만 그의 희망과는 달리 남로당원들이나 인민들의 봉기는 없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평양이 국군과 유엔군에 점령당하고 북한군이 중국 국경으로 내몰리면서 전쟁 책임을 두고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은 격심하게 다투게 되며, 이것이 박헌영과 남로당파 등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진다. 전쟁 실패의 최고책임자는 당연히 김일성 본인이지만, 그는 책임을 박헌영 등 정적들에게 뒤집어 씌워 그들을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남침전쟁 실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김일성의 권력이 휴전 후에 훨씬 더 강화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6.25 당시 박헌영의 연설문

북한 내무성 문화국기관지 『보위』1950년 6월29일자 : <<보위>> 신문 1950년 6월28일 - 1950년 9월12일 p.7 : 1950년 6월 29일자 2면 - 남반부의 로동당 전체 당원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호소한 박헌영 선생의 방송연설

남로당의 전범행위, 좌익들의 학살 만행

6.25를 전후하여 남한내 좌익, 남로당이 벌인 학살 만행의 총책임자는 박헌영이다.

박헌영의 숙청과 처형

박헌영의 몰락은 6.25 전쟁 중에 시작된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발행한 소식지 "지리산 특보" 제5호 1953년 (단기 4286년) 8월 20일자 : 오호(嗚呼) ! 박헌영(朴憲永, 1900~1956) 선생(先生) - 8월 2일자 평양방송에서 외무상이던 박헌영 자리에 남일이 임명되었다고 보도한 것을 듣고 박헌영이 숙청된 것을 알고 김일성이 남로당의 원수라고 비분강개하고 있다. 빨치산 대장이었던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은 며칠 뒤인 9월 17일 사살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둘의 갈등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10월 8일 평양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을 방문한 중국대사 예지량의 목격담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1950년 11월 7일 전화(戰禍)를 피해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어 있던 임시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 폭발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열세로 몰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이다가 박헌영에게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고, 서로 막말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전 동독 주재 북한대사이고, 당시 외무성 부상이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먼저 김일성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간거야?" 박헌영이 "아니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흥분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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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53년 7월 휴전 후 전쟁 실패 책임을 박헌영에게 돌리고 그와 남로당 일파를 숙청한다. 박헌영이 '남로당원 20만 봉기설'로 전황을 오판하게 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전쟁 한 달 전인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도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박헌영은 부수상, 외무상 등의 모든 직책을 박탈 당하고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 박헌영이 처형된 연도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나, 주북한 소련대사 이바노프(Ivanov, Vasily Ivanovich)가 1956년 4월 19일 작성한 "Memorandum of Conversation with Kim Il Sung"에는[59] 사형 선고를 받은 박헌영에 대한 형집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련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으므로 이 날자까지는 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처형 일자까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연도가 1956년인 것은 사실로 볼 수 있다.

전 북한 내무 부상 강상호의 박헌영과 남로당파 숙청에 대한 증언

전(前) 북한 내무 부상겸 군총정치국장을 지냈으며, 박헌영 숙청과 재판에도 간여했던 강상호(姜尙昊. 1909~2000.12.12)는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갔는데, 1993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에서 박헌영 숙청과 재판 및 처형 과정에 대해 30회에 걸쳐 비교적 자세히 밝혔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터지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이 그에 대한 처형 지시를 내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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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글들도 검색하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1993년 12월호 월간잡지 《말》. 기고자는 소련파 출신 북한 내무성을 지낸 강상호.
수많은 남의 집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박헌영이 마지막 순간에 김일성에게 자신의 처자만은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박헌영에 대한 평가

박헌영은 좌경화된 남한학계에서 남북한 모두에 버림받은 비운의 지식인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좌파들의 우상이 되어있다. 대단한 공산주의 이론가라고 주장하지만, 변변한 이론서 하나 낸 적이 없다. 해방후 정치활동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인지 의심될 정도로 맹목적으로 소련을 추종하였고, 서울의 일개 소련 부영사가 박헌영은 자신의 심복이라고 떠들고 다닐 정도였다. 입으로는 이승만 등 우익은 파시스트이고, 공산주의자들만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떠들고 다녔으나, 스탈린에게 자신을 지도자로 임명해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실제로 김일성과 같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기도 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한에서 다수의 파업, 폭동을 사주, 조종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다. 북한에서도 식객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권력입지 강화를 위해 '20만 남로당원 봉기'를 호언장담하며 남침 전쟁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전쟁 최고지도부인 7인 군사위원회 위원, 군총정치국장 등을 맡아 전쟁에 깊숙히 개입하여 김일성 못지 않게 6.25 남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전범이다.

박헌영 관련 기록과 증언

1. 구두 정보 보고 1946년 3월 20일
2.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


박헌영이 1949년 8월 비서였던 윤레나와 재혼할 때의 사진첩이다.[60]

각주

  1. 2.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 평정서 : 니콜라이 레베데프(Н. Лебедев)가 1948년 12월 25일 작성
  3. 박헌영(朴憲永) 위키백과
  4. Information on Korean Leftist, US-USSR p.5 : Biographical sketch of Mr. Pak, Hun Yung - 1946.01.28 / p.6 Park, Hun Young:비망록/Gordon W. Avison, Jr. Special Agent, CIC 발신, 1945.11.16
  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탁치배격각당 각계층 대표자회, 국민운동 실행방법 결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8.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9.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 강목사는 29일 밤이라고 했으나 28일 밤의 착각이라고 한다.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가 설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1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조선공산당, 탁치반대전단을 살포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元旦의 決意는 託治 排擊!! 共黨서울委員會서 飛檄, 託治는 民族의 恥辱, 戰線 統一하고 走狗輩를 驅逐하자.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1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 朝鮮共産黨서울市委員會: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
  1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1월 1일 > 조선공산당, 탁치문제의 해결방법에 관한 담화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먼저 민족통일". 공산당 신탁통치반대 방법 闡明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13.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14. 14.0 14.1 14.2 주한미군사 2 >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모스크바 회담과 조선 > 후폭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16.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1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18. 신탁통치반대 시민대회. 來 3일 서울운동장서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2면
  19.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각정당, 조공과 인공의 2일의 찬탁대회 반박성명서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5일 : 찬탁대회는 2일이 아닌 3일에 있었다.
  20. 20.0 20.1 20.2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1. Telegram TFGBI #176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하지 장군이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1946년 1월 30일자 전문.
    미군정청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조선공산당이 소련 지시를 받는 문헌적 증거 입수
  22. 22.0 22.1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pp. 27~34, 제1장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23.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24. 박헌영의 정치노선: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
    박헌영의 정치노선: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 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
  25.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0> 신탁통치 소용돌이(1)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 중앙일보 1991.11.21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1> 신탁통치 소용돌이(2) 소 군정, 반탁 고수 조만식에 온갖회유·협박 중앙일보 1991.11.28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2> 신탁통치 소용돌이(3)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 중앙일보 1991.12.05 종합 11면
    증언에 나오는 서용규는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남한에 와서 쓰던 가명이다.
  26.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의 "[연구과제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27. 27.0 27.1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76 박헌영이 1946년 7월 22일 평양 갔다가 돌아옴. TFGCG 467 : 1946.08.09
  28.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29.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235~237;
  30.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ung : March 05, 1949 Wilson Center
    Cde. Stalin remembers that the last time two came to Moscow, and asks, appealing to Pak Heon-yeong, if he was the second. Pak Heon-yeong confirms this. Cde. Stalin says that Kim and Pak have both filled out and that it is difficult to recognize them now.
    김일성과 박헌영의 1949년 3월 방소 당시 스탈린 본인이 두 사람을 이전(1946년 7월)에도 만난 적이 있다고 확인해 준 셈이다.
  31. 김일성이냐 박헌영이냐/레베데프 당시 정치사령관 첫 증언 중앙일보 1991.11.30종합 1면
    스탈린/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 암시/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 중앙일보 1991.11.30 종합 3면[
  32.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9) 박헌영-김일성 4차 회동(3) 중앙일보 1992.01.06 종합 11면
  33.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지음; 김명호 옮김, 식민지 조선에서: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 기록 서울: 한울, 1996-03-08
  34.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235~237;
  35.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p.70 : 김일성과 박헌영의 4차 회동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때 박헌영과 김일성에 대한 스탈린의 면접 시험이 있었다.
  36. 1946년 김일성의 소련 첫 방문/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서울신문 2019.05.14.
    조갑제,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면접시험을 보았다! 2017-11-03
  37.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102 박헌영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코멘트, WS #6 (1945.10.30, p.6) ; p.182 박헌영이 말하는 공산당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옴, WS #12 (1945.12.11, p.6)
  38. 유·피가 傳(전)한 問題(문제)의 電文(전문) 동아일보 1946-01-17 1면
  39. Stanislav Levchenko / Ivan Kovalenko wikipedia
  40.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 pp.126~127
  41.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2년) pp. 210~212
  42.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43.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 일기 (전현수 번역)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44.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1946.9.17-1947.3.3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1988
  45.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46.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47. 송종환, 6·25 전쟁 50년의 再照明 ⑧ -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 : 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월간조선 1999년 11월호
  48.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49. 내가 치른 북한 숙청 (6) 전 내무성부상 강상호| <남로당파 제거> (1) 중앙일보 1993.02.16 종합 11면
  50. 이지수,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4]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조선일보 2010. 6. 24 종합 A08면
  51.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4 <김일성명령서> 金日成.朴憲永입장 중앙일보 1995.07.04 종합 10면
  52. 북한 내무성 문화국기관지 『보위』1950년 6월29일자 : <<보위>> 신문 1950년 6월28일 - 1950년 9월12일 p.7 : 1950년 6월 29일자 2면 - 남반부의 로동당 전체 당원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호소한 박헌영 선생의 방송연설
    남반부의 로동당 전체 당원들과 전체 인민들에게 호소한 '박헌영' 선생의 방송연설 : 국립중앙도서관 온라인 자료
  53. 200356 <<보위>> 신문 제106호 (1950년 7월2일) p.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성명...박헌영
  54. 54.0 54.1 북한, 군사위원회 조직 △위원장 김일성 위원 박헌영·홍명희·김책·최용건·박일우·정준택 대한민국사연표 1950년 06월 26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재홍, "북한군 최고사령관 위상 연구" 서울 : 통일연구원, 2006 (KINU 정책연구시리즈 ; 06-07) pp.11~12 군사위원회 설치, pp.32~36 (표 Ⅱ-1) 당‧최고사령관‧군사위원회 명의 주요 발표(1950.6~1955)
    6.25 전쟁사 제1집 - 전쟁의 배경과 원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2004 : p.607~608 군사위원회 조직
  55. 북한연표 해설목록 : 한국전쟁 발발 한국사데이타베이스
  56. 8.15 해방 4주년 기념 보고 - 8.15 4주년 평양시 기념대회에서, 박헌영 국립중앙도서관
  57.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58. 고명균, 박헌영의 북한군 초대 총정치국장 임명 배경 연구 현대북한연구 제17권 제2호, 2014.08, pp.200-259 (다운로드)
  59. Ivanov, Vasily Ivanovich, Memorandum of Conversation with Kim Il Sung : April 19, 1956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60. [BOOK책갈피] “소련은 일제때부터 김일성을 키웠다” 중앙일보 2008.06.27 종합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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