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毛泽东 / Máo Zédōng | |
기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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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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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12월 26일 청나라 후난성 샹탄현 |
사망 |
1976년 9월 9일 (82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정당 |
중국공산당 |
배우자 |
뤄이슈(사별) 양카이후이(사별) 허쯔전(이혼) 장칭(1939년 ~ 1976년) |
모택동(마오쩌둥, 毛泽东, 毛澤東, 1893.12.26 ~ 1976.09.09)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부터 1976년 사망 때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였다.
생애
- 마오쩌둥 - 위키백과
- Mao Zedong Wikipedia
- 毛泽东 - 维基百科
- 毛沢東 - ja.wikipedia
국공내전 시기에 국민당군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팔아넘긴 모택동
일본제국의 중국 침략기에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항일투쟁 아닌 중국 적화였기 때문에 그들의 적은 일본 보다는 중국 국민당 정부였다. 중공당은 일제침략의 가장 큰 수혜자이므로 모택동이 일본의 침략에 대해 감사한다고 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일제 침략이 아니었으면 중공군은 일찌감치 토벌되어 중국이 공산화되는 참사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북한도 공산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중공당은 집권 후 중국인들에게 일제보다 몇 백배 이상 큰 피해를 입혔다.
- [김용삼 칼럼]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한국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완전 가짜 펜앤마이크 2022.07.07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에서 편찬한 『마오쩌둥 외교문선』에는 1956년 마오쩌둥이 중일 우호를 위해 중국을 방문한 엔도 사부로(遠藤三郎) 전 일본제국 육군 중장에게 했던 발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일본 제국주의는 첫째, 장개석의 힘을 약하게 해주었다. 둘째, 우리 공산당 지도부의 근거지와 군대 확충을 도왔다. 항일전쟁 전 한때 30만 명에 달했던 우리 군대는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불과 2만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8년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군대는 120만 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권성욱,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2015, 491쪽).
- 박상후, 《毛澤東, 인민의 배신자》에 나타난 마오쩌둥의 親日 월간조선 2019년 7월호
- 장제스군 약화시키려 스파이 통해 일본군에 정보 넘겨
- 중공의 항일전쟁은 완전한 날조 박상후의 문명개화 2022. 2. 14.
- 엔도 호마레(遠藤誉, 1941- ),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毛沢東 : 日本軍と共謀した男)≫ (新潮社, 2015/11/14)
- 「일본군의 침공에 감사한다」(1956 년 9 월 4 일의 모택동 발언) 중국 연구 전문가가 그린 「건국의 아버지」의 진실。: 「日本軍の進攻に感謝する」(1956年9月4日の毛沢東発言)中国研究の第一人者が描いた「建国の父」の真実。[1]
천하의 모택동이 항일전쟁 시기 “일제와 공모를 했다니?" 엔도 선생의 논증은 그야말로 폭군의 목을 겨눈 날카로운 비수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모택동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장춘에서 아사한 수십 만 난민들 틈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가녀린 소녀가 70년이 지난 지금 동경대학 국제관계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자신을 단죄하리란 사실을!
- 엔도 호마레(遠藤誉) 저, 박상후 역,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 모택동은 왜 일본군의 進攻에 감사했나≫ ( 타임라인, 2019년 06월 10일)[2]
일본 침략에 맞서 항일전쟁을 벌인 쪽은 장개석의 국부군이며, 모택동의 중공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항일투쟁을 했다기보다 국부군을 타도하고 중국을 공산화하는 데에 더 주력하여, 일본군에 국부군의 정보를 거액의 돈을 받고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 중공의 항일전쟁승리와 반파시트전쟁승리는 가짜/역사의 진실/장개석의 '이덕보원' 박상후의 문명개화 2020. 9. 4.
-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홍콩에 문혁 2.0상륙하나? 박상후의 문명개화 2020. 5. 19.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 엔도 호마레(遠藤誉) 저, 박상후 역,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3][4]
- 모택동을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정당한가? 그런 의미에서 중국 인민들에게 공산중국의 국가적 정체성은 정당한 것인가?
- 모택동은 왜 스파이를 활용하여 침략자 일본군과 공모, 일본군에 의한 장제스 국민당군대의 파멸을 획책했을까?
- 모택동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의 애독자였다. 그는 왜 ‘제왕의 패도覇道’에 몰입했을까?
- 모택동은 왜 전범戰犯인 전 일본군인들을 초청해서 “나는 일본군의 진공進攻에 감사한다”고 했을까?
- 모택동은 왜 ‘난징대학살’에 대해 일본에 사과 요구는커녕 말 꺼내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을까?
- 모택동은 왜 충직한 동지들뿐 아니라 수천만의 무고한 인민을 학살하면서까지 모택동사상의 절대성을 강변하며 후대 권력으로 하여금 떠받들게 했을까?
일본 앞잡이 모택동
[Book튜브] 일본 앞잡이 모택동
모택동의 미국 찬양
1943년 모택동은 미국 독립기념일을 찬양해 마지 않는 논설을 썼다. 1945년 8월에도 링컨의 "Of the people,..."도 인용하고, 루즈벨트의 4가지 자유에 대해서도 찬양했다. 이후 중국 공산화에 성공하자 태도를 표변하여 미국에 대한 비난으로 일관했다. 6.25 전쟁 때는 중공군을 파견하여 미국과 전쟁까지 벌였다.
- [박상후의 월드뉴스] 홍콩을 삼키려는 거대한 뱀 2019.7.9 : 6분 20초 경부터
- 모택동이 찬양한 미국의 인디펜던스 데이 박상후의 문명개화 2019.7.8
- 毛澤東稱讚美國的民主和天賦人權(毛泽东称赞美国的民主和天赋人权) 凤凰网 / 百度文库/ 炎黄春秋
한국전쟁에 중공군을 파견하여 김일성을 구출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거의 궤멸되고,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김일성과 북한 체제가 멸망위기에 처하자 모택동은 수십만의 대군을 북한으로 파견하여 이들을 구해냈다. 모택동이 한국전에 보낸 군대는 주로 국공내전 당시 항복한 국민당군이나 반대세력의 군인들로, 이들을 총알받이로 앞세워 잠재적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김일성과 북한 체제도 구하는 일거양득의 실리를 챙겼다. 한국입장에서 전쟁에 불법개입해 한국의 통일을 저지한 세력의 수괴나 마찬가지다.
북진 할 때 뿐만 아니라 북한이 남침을 준비할 때도 지원을 했고,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족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를 몰래 보내기도 했고, 스탈린에 의해 저지되서 그렇지 모택동은 초반에 참전해서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6.25의 a급 전범이라고 볼 수 있다.
모택동 치하 중국 공산당의 만행
모택동과 중국공산당 치하에서 숙청과 정책 실패, 문화혁명 등으로 죽은 중국인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적게는 6천만명, 많게는 8천만명까지로 추정된다.
모택동의 선전 요원들
서방 세계에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을 미화해서 알린 주요한 선전 요원들은 아래와 같다. 이들 때문에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들은 감추어지고, 서방 세계에 미화되어 알려졌다. 이들은 모택동의 벗이자 중국 인민들의 적이다.
- Agnes Smedley (February 23, 1892 – May 6, 1950)
- Helen Foster Snow (September 21, 1907 – January 11, 1997) : Edgar Snow의 처로 Nym Wales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다.
- 저서: 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 조선인 공산주의자로 대장정에 참여했던 김산(金山, 1905 ~ 1938)을 미화한 책.
- 리영희(李泳禧, 1929 ~ 2010) :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을 극찬한 한국판 Edgar Snow
- [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 『리영희와 左派는 더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된다』 월간조선 2005년 9월호
- [문화대혁명 50년] 그는 왜 중국을 가지 않았나 : 끝내 진실을 외면했던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 리영희에 대한 고발 Pub 조선 2016-08-26
국내의 모택동 숭배자들
한국의 자칭 인권변호사들은 모택동을 가장 존경한다. 이들은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세습독재자들도 변호하고 다닌다. 무지막지한 최악의 인간 도살자들을 숭배하는 이들은 인권변호사가 아니라 인권말살변호사가 더 적절한 명칭같다. 이들의 정신적 스승은 모택동 미화에 앞장섰던 리영희(李泳禧, 1929~2010)일 것이다.[5][6]
- 노무현, "모택동을 존경한다" 중앙일보 2003.07.09 종합5면
- 2003년 7월 9일 중국 칭화(淸華)대학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 김대중-노무현의 北核 옹호 발언 모음 뉴데일리 2013-02-05
- [전문] 문재인 대통령 베이징대 연설 전문 연합뉴스 2017-12-15
-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같은 나라.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中國夢) 함께 하겠다."
- "마오쩌둥 주석이 이끈 대장정에도 조선 청년[7][8]이 함께 했습니다." : 2017. 12. 15 베이징대(北京大) 연설
- '文은 김정은 수석대변인'은 블룸버그통신이 첫보도 조선일보 2019.03.12
- South Korea's Moon Becomes Kim Jong Un's Top Spokesman at UN Bloomberg 2018년 9월 26일
대장정은 좌파들의 황당한 미화고, 실상은 국민당군에 쫓겨서 도망간 거다. 이승만은 런승만이라고 조롱하더니 모택동은 대장정인가?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족들이 6.25때 참전했는데, 6.25전범이 모택동을 갖고 참나 저게 한국대통령인가?
여담
아무리 6.25때 전범이고,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악마와 같은 인간이었지만(대약진 운동 등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다),
결국 중공의 일인자가 되고, 대륙에서 승리자가 된 이유는 그의 전략적인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사악한 놈이었지만 전략적인 안목이 없지 않았다. 이념에 경도되서 대약진운동 같은 개뻘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또 이 위기를 홍위병을 이용해서 벗어났다.
문혁 때 책을 불사르라고 홍위병한테 시켰지만, 본인은 역사책을 달고 살았을 정도. 역사책 중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이 그의 애독서였다고.
학력은 별 거 없지만, 엄청난 독서광으로 악마였지만 전략적 판단은 탁월한 악마였다.
6.25때 맥아더를 분석해서, 인천에 상륙할 것을 예상해 김일성에게 수차례 경고를 하기도 했다.
위안화 현행권의 모든 지폐 도안은 모택동이다. 위안화 돈을 보거나 만질 때마다 불결함을 느낀다.
각주
- ↑ 송재윤, <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역사> 4회.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II) pennmike 2018.01.19
- ↑ 중국의 산업공동화와 인민폐의 미래는 ? 박상후 유튜브 2019.5.26 : 5분 40초경부터
- ↑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4627762&orderClick=LEA&Kc=>
- ↑ (서평) 모택동 : 치부를 벗긴다 디지털 타임스 2019.06.19
- ↑ 이동호(李東湖), [한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리영희와 左派는 더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된다』 월간조선 2005년 9월호
- ↑ 이동호(李東湖), [문화대혁명 50년] 그는 왜 중국을 가지 않았나 : 끝내 진실을 외면했던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 리영희에 대한 고발 Pub 조선 2016-08-26
- ↑ 문 대통령이 베이징대서 언급한 ‘김산’의 진실 Pub 조선 2017-12-27
- ↑ 김산 (金山, 1905~1938)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