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갑동
朴甲東
기본 정보
출생
1919년 3월 11일
경남 산청 지주출신
직업
해방일보 수석기자, 정치인
경력
해방일보(解放日報)[1] 정치부기자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비서
남로당 지하총책
6.25 때 월북

박갑동(朴甲東, 1919년 3월 11일[2]~ )은 경남 산청 지주집안 출신이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정치인이었으며 현재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개요

해방 직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 정치부 기자로 있다가, 박헌영 월북 후 지하로 잠적하여 일시 남로당 지하총책을 맡다 6.25 때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으로 있다 남로당 숙청 때 투옥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제동이 걸리고 일시 석방 되자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경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거주하며 북한과 김일성에 관한 강연, 대담,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나, 자신이 상사로 모셨던 박헌영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판하지 않는다. 일본 동경(東京)에서 1976년 출판사 성갑서방(成甲書房)을 창업했다.[2][4]


박갑동 연보[5][6]

1919.3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山淸 新等面 丹溪里) 출생
1932.4 진주 고등보통학교 입학
1934.4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 전학
1935.9 동경 대성중학교(大成中学) 4학년 전학
1936.4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제1고등학원 입학
1941.12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졸
1945.4 지리산에서 반일유격대 조직
1945.5 조선독립동지회(朝鮮独立同志会) 조직대표
1945.9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 정치부 기자
1946.11 남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력인민(労力人民) 부장
1949.10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이론진 선전부 기관지부 블럭책
1950.4 남조선노동당 지하당 총책임자 취임
1950.6 한국전쟁에 협력하지 않아 군사위원(軍事委員)의 명령으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강등.[7]
1950.9 유엔군의 서울 탈환이 임박하자 북으로 피신
1951.3 처음으로 평양에 가서 문화선전성(文化宣伝省) 구라파부장으로 취임
1953.3 간첩 용의로 체포되어 산중(山中)에 감금됨
1956.3 흐루쇼프스탈린 비판으로 처형 직전 석방[8]
1957.6 북한 탈출 중국으로 감
1957.12 홍콩 경유 일본에 망명
1976.6 일본 동경(東京)에서 출판사 성갑서방(成甲書房)을 창업[2][6]
1989.6 전 주소련대사 이상조 (李相朝, 1916~1996)와 만나 북조선개방 추진위원회 조직 모의
1992.1 모스크바에서 북한을 탈출한 망명 동지들과 회동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朝鮮民主統一救国戦線)을 조직[9]

처형위기에서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으로 석방

6.25때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던 그는 남로당 숙청 때 걸려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다고 합니다. 1956년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을 고발하는 비밀 연설을 하자 김일성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소련에 대한 제스처로서 정치범들을 많이 풀어주었고 이때 박갑동씨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1960년대에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일본에 건너가 살고 있습니다.
박갑동씨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그래도 흐루시초프 같은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에 피를 덜 보게 되었다. 그의 스탈린 격하 이후 공산당 내부에선 피의 숙청이 사라지고 강제수용소도 없어졌다. 김일성만 예외였다'고 말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집권 당시에는 한국 언론에서는 흐루시초프로 표기했다. 흐루쇼프가 실제 러시아 발음에 가까워 오늘날은 이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고 증언

박갑동은 해방 직후 서울과 북한에서 겪었던 일을 근거로 여러 글에서 북한 김일성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겪은 3가지 사례를 들었다.

  1. 보천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출소한 박달(朴達, 1910~1960)박금철(朴金喆, 1911~1967 ?)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보였더니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한 것.
  2.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부하였던 사람이 북한 김일성의 부하가 아니라서 인민군에서 진급이 안 되어 매일 술만 마시고 있었다는 것.
  3. 남로당 숙청 당시 산골로 추방된 박갑동에게 밥해주는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6사장 김일성의 부대에 있다 1937년 전사했는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있다고 한 것 등이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朴憲永)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 안에 총 정치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朴金喆)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朴達, 1910~1960)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 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뒤에 박금철이 당 중앙간부부장 시대에「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이 발생되었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에 반발하여 떨어져 나가는 남로당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당 부위원장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나 드디어 김일성의 손에 의하여 이효순과 같이 숙청 당하고 말았다. 일반 사람들은 박금철을 김일성의 직계로 알고 있었으나(보천보 사건 관계로) 사실은 평양의 김일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며 박헌영의 덕을 입은 사람이다.

    6.25 당시 박헌영이 군 총정치국장, 박금철(朴金喆, 1911~1967 ?)이 부국장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10][11]

    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 : 박갑동<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1974.03.28 종합 3면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前代)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자이며 ...

  •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50)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5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p.137~138
    ​우리는 서울의 각 신문사가 평양에 파견하는 기자들에게 각종 편의와 지원을 해주고 각 방향에서 소위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김성주의 사진을 많이 찍어 오도록 부탁했다. 그들이 찍어 온 사진이 1백장을 넘었다.

    이 사진을 박달(朴達)과 박금철(朴金喆)에게 보였다. 박달과 박금철은 1937년 6월 김일성이 보천보 시가지를 습격했을 때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협조했으며 특히 보천보 시가지 지도를 그려 지형을 김일성에게 보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8.15에 석방되어 공산당이 조직한 혁명가구원회(革命家救援會)에서 병 치료와 휴양을 하고 있었다. 특히 정태식은 그들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같이 수감되어 있어 친했다. 10월 14일 평양운동장에 나타났던 자칭 '김일성 장군'이라는 자의 사진을 박달과 박금철에게 갖다 보이니 두 사람은 펄쩍 뛰며 전혀 다른 사람이며 나이도 전혀 틀린다고 했다.그들은 그때까지 서울의 공산당이 중앙이니 서울에서 일하려고 병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곧 평양에 가서 사실을 알아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달은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있었고, 박금철은 전신이 퉁퉁부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화물자동차로 개성까지 태워 주었을 뿐 아니라 안내원을 시켜 박달을 등에 업혀 38선 입구까지 보내주었다.

    두 사람은 평양에 도착하여 곧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에게 면회를 신청했으나 분리당하여 각각 감금당하고 만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한 것이 11월인데 해가 바뀌고 다음 해 1월말에야 그들은 김일성이란 자에게 호출당했다.그들이 면회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보다 열 살이나 젊어 보이며 키가 커 보이는 젊은 자가 "이 새끼! 전향하여 왜놈들한테 잘 얻어먹어 살이 쪘구나. 변절한 놈들은 보기도 싫어! 빨리 싹 없어져!"라고 호통을 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박금철은 앉은뱅이 박달을 평양에 남기고 혼자 강계로 떠나면서 서울의 박헌영에게 자칭 김일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왔다. 박헌영박금철의 보고를 권오직과 조두원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듣게 된 것이다.
    박갑동, 『북조선 악마의 조국 : 남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경악의 사실』 (서울출판사, 1997) pp.227~236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59 중앙일보 1990.11.10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p.395~396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 전사한 김일성의 부하가 북한군에 들어갔으나 북한 김일성이 자신의 상관이 아니기 때문에 진급도 안 되어 하릴없이 술만 마신다고 함.
    이남에서 평양에 간 친구들중 군복을 입은 자는 인민군 총정치국 제4부장(민청관계) 이환기(대령)이고 제7부(적진와해공작)의 설정식ㆍ김동석(이들은 소령군복)과 최고사령부 정찰국의 최상린(소령군복)이 있었다. 최상린은 경주사람으로 유진오의 처질서이며 와세다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

    나의 1년 후배로 나와 친했었던 그는 평양시내에 나오면 같이 한잔 하자고 종종 나를 찾아왔었다. 그 관계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제7부소령)도 알게 되었고 그외 몇몇 군인들도 알게되어 술도 같이 마시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40세쯤 된 만년 소령 두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1937년 함남 보천보를 습격한 진짜 김일성의 부하이고 한사람은 최용건의 만주시대 부하였었다. 이들 두 소령은 매일 아무일도 하지 않고 소주만 마시고 있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순진해 나는 흥미를 느껴 그들을 만나면 소주를 사주고 같이 놀게 되었다. 하루는 셋이서 술을 마시는데 김일성의 부하가 최용건 부하를 보고 술이 취해 『동무는 상부동무가 살아 있어서 좋겠소』라는 말을 했다.
    나는 즉석에서 이 말을 받아 『동무는 직속상부인 김일성 동지가 있는데 더 좋지 않소?』하고 물었다. 그는 슬픈 상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눈치를 알아챘다. 그후 나는 일부러 그 소령과 단둘이서 술을 마시며 보천보 습격사건의 진상을 물어봤다.

    그 당시 만주에는 의복감이 아주 귀해 조선에서 무명베를 많이 구해갔는데 김일성 부대에서는 군복감을 충당하기 위해 보천보를 습격하게 되었다.
    압록강 뗏목을 타고 건너와 밤중에 보천보 시오리 지점에 도착해 박달ㆍ박금철의 상세한 보고를 듣고 자기는 습격조가 아니고 약탈한 옷감의 운반조로서 등에다 옷감을 지고 달아나는데 일본인들의 추격이 심해 압록강을 겨우 건너 보니 등에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드디어 일본군에 포위되어 양목정자(楊木頂子)라는 곳에서 싸웠으나 자기는 달아나다 보니 김일성 사장(師長)은 피를 흘리며 밀림속으로 기어들어 갔는데 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들 남은 대원들은 41년에 소련땅으로 넘어갔는데 자기는 글을 전혀 몰라 소련 군인 집에 있다가 8ㆍ15가 되어서 평양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지금 평양의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진짜 김일성 부하들은 한사람도 군관학교에 보내주지도 않고 밥만 먹이고 놀리고 있어 답답해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박갑동(朴甲東), 평양의 '金日成'이 '普天堡 습격'의 주인공일까,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大邱 : 螢雪出版社, 1991) p.183

    1951년 평양에서 보천보를 김일성과 같이 습격한 군인과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이던 김일성은 전사하고 없어 출세도 못하고 만년 소령으로 있다."고 했다.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66 중앙일보 1990.11.26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411
    남로당 숙청시 박갑동이 직책에서 쫓겨나 산골로 추방되어 밥해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아들이 만주서 김일성 장군의 대원이었다가 1937년 전사했는데, 지금의 김일성은 그 김일성이 아니라서 자신은 아무 혜택도 못받고 있다고 함.
    1년이나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단 둘이 사니 밥해주는 할머니와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 할머니는 46년까지 만주 간도에서 살았는데 아들은 김일성 장군의 대원이었다. 37년에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대원으로 전사했다면 훈장도 받았을 것이요,할머니는 혁명가 유가족으로 연금도 받아 편안히 잘 살 것인데 왜 이런 산골에 와서 식모짓을 하며 고생스럽게 삽니까?』하니 『아니오. 사람이 달라요.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 아들이 죽은 곳도 아는데 무덤하나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하며 말을 더 하려 하지 않았다.

  • 『내가 아는 박헌영』(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
    박갑동,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1983, 서울, 인간사. p.190

    해방 직후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이었던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은 전력을 잘 알 수 없는 김일성에 대해 가장 직설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했다. 그는 1947년 여름 소련 유학을 간다면서 평양에 들렀다가,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현상이 했다는 발언을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증언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느냐. 그러나 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찌기 말이다. 박헌영은 25년에 조선 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의 경력이야말로 한점의 흐린데도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지리산특보(제5호) - 오호! 박헌영 선생 1953년 8월 20일 발행
    휴전직후 토벌대가 지리산 빨치산들에게 살포한 소식지에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했다는 평양 방송을 전하며 김일성이 남로당의 원수라고했다. 이현상은 이보다 한달 뒤인 9월 17일 사살되었다.

저서[5]

신문 연재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第31話 : 내가 아는 박헌영(朴憲永)』 : 1973년 2월 13일부터 9월 28일까지 178회에 걸쳐 중앙일보 연재
(683)<제31화> 박헌영 중앙일보 1973.02.13 종합 5면 - 첫회
(85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78)|박갑동 중앙일보 1973.09.28 종합 5면 - 최종회
  • 『서울.평양.북경.동경』 : 서울신문 연재
  • 『환상의 터널 - 그 시작과 끝』 : 1989~1990 중앙일보 연재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회상기 중앙일보 1989.08.14 종합 1면
(1)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회상기|「실패의 연속」-민족에 바치는 고백 중앙일보 1989.08.17 종합 3면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171 중앙일보 1990.12.08 종합 5면
  • 『발가벗긴 김일성』 : 세계일보 연재

저서 (한국어판)

중앙일보에 연재한 『내가 아는 박헌영』을 보완하여 간행.
중앙일보에 연재한 『환상의 터널 - 그 시작과 끝』을 보완하여 간행.

저서 (일본어판)[6]

  • 朴甲東 著, 「망망한 공화국(遙かなる共和国)」, 東京 三一書房,1970年
  • 朴甲東 著, 「탄식의 조선혁명(嘆きの朝鮮革命)」, 東京 三一書房,1975年
  • 朴甲東 著, 「안에서 본 조선전쟁(内から見た朝鮮戦争)」, 東京 成甲書房,1976年
  • 朴甲東 著, 「은행나무여! 이야기하라(銀杏の木よ語れ)」, 東京 成甲書房,1977年
  • 朴甲東 著, 「김일성과의 투쟁기(金日成との闘争記)」, 東京 成甲書房,1991年
  • 朴 甲東, 植田 剛彦, 『北朝鮮最期の選択』, 講談社, 1997年12月18日
  • 朴甲東 著, 『北朝鮮血と嘘と断末魔』, 동경(東京) 베스트셀러사 (ベストセラーズ, 1998)
  • 朴甲東 著, 『2000年第2次朝鮮戦争』, 講談社, 1999年09月24日
  • 朴甲東 著, 『북조선 악마의 조국 (北朝鮮祖國の惡魔)』, 동경(東京) 베스트셀러사( ベストセラ―ズ) 2003년 01월 01일
  • 朴甲東 著, 『北朝鮮哀しい斷末魔』, 동경 베스트셀러사( ベストセラ―ズ) 2003년 01월 01일

번역서 (일본어판)

  • 朴甲東 訳, 「三国史記」, 東京 三一書房,1974年
  • 朴甲東 訳, 「三国遺史」, 東京 三一書房,1975年


참고 자료

그는 核으로 망한다. 가져선 안 될 자가 가졌기 때문에


함께 보기


각주

  1. 조선공산당 기관지
  2. 2.0 2.1 2.2 成甲書房 フリー百科事典
  3. 구국전선 1세대 정추·박갑동 서울에서 만났다 2009-11-24 국민일보
  4. 成甲書房設立者 朴甲東とは 母ポン @ponkohaha000 · 2017년 6월 11일
  5. 5.0 5.1 박갑동 연보 bookdb.interpark
  6. 6.0 6.1 6.2 朴甲東の経歴
  7.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36 중앙일보 1990.08.22 종합 5면
  8. 조갑제, 朴甲東 증언: 흐루시초프 덕분에... 조갑제닷컴 2003-09-15
  9. 美, ‘김정일 전복’ 활동 박갑동씨 초청 동아일보 2003-07-1
  10. 고명균, 박헌영의 북한군 초대 총정치국장 임명 배경 연구 현대북한연구 제17권 제2호, 2014.08, 200-259
  11. 高在弘, 6·25戰爭期 北韓軍 總政治局의 位相과 役割 軍史. 제53호 (서울 : 國防部軍史編纂硏究所, 2004.12.13) p.154 부국장으로 김재욱과 박금철 2명을 두었다.
  12. 서울 평양 북경 동경 | <박갑동지음> - 중앙일보 1988. 1. 30
  13. [새로나온 책] 갈수록 멀어지는 공화국 上·下 부산일보 1989. 2. 1.
  14. 한국전쟁과 김일성 <박갑동 지음 구윤서 옮김> 매일경제 1990.04.10
  15. 이철승·박갑동씨 대담집 출간 중앙일보 1999.01.05 종합 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