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주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변명을 실은 1945년 10월 3일자 해방일보 1면 사설(社說) "데마에 절대(絶對) 속지 말라. 소군(蘇軍)은 우리 은인(恩人)이며 전우(戰友)다". 이 기사는 역설적으로 당시 소련군이 민간을 상대로 벌이는 약탈 행위가 심각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해방일보(解放日報)』는 8.15 해방 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이다.

개요

『해방일보(解放日報)』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로 1945년 9월 19일 창간되었고, 조선공산당이 불법화 되면서 1946년 5월 18일 폐간되었다.[1]

  • 창간호 (1호) : 1945년 9월 19일
  • 최종호 (150호) : 1946년 5월 18일

논조

일관되게 북한 소련군정과 좌익의 활동을 미화 찬양하면서 남한의 미군정과 우익의 활동을 비방하였다. 좌익과 소련은 진정한 민주주의자이며 우익과 미국은 파쇼로 몰아부친다. 박헌영김일성이 주요 찬양 대상이었다.


1945년 10월 3일자 해방일보 1면에는 월남민들에 의해 전해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양민들을 상대로 벌인 약탈 행위에 대한 변명을 장황하게 실었다. 소련군인들이 시계등을 빼앗았다는 주장은 북한에서 쫓겨나 월남한 부호, 주구배(走狗輩)들이 퍼뜨린 데마에 불과하며, 소련군은 시계를 가져가더라도 반드시 대금을 지불하거나 구두 3,4켤레 또는 담배 몇 갑 등 상응하는 물건으로 보상해 준다는 근거도 없는 말로 변호한다. 또 소련군이 행색이 수상하거나 도망하는 자를 붙잡아 물건을 압수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에 퍼진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나쁜 소문을 의식해서 이를 불식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논조는 소련과 소련군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 일색이다.

수록처

간행된 해방일보 전체는 아래 책에 수록되어 있다. (일부 누락)

  • 김남식(金南植); 이정식(李庭植); 한홍구(韓洪九) 엮음, 『한국현대사자료총서(韓國現代史 資料 叢書) 제5권』 (서울: 돌베개, 1994)

기사 이미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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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해방공간의 좌익언론과 언론인들 –조선인민보, 해방일보, 건국, 노력인민의 출현과 쇠퇴–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 언론학), 관훈저널 2000년 겨울호(통권 77호)